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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산 각연사(寶蓋山 覺淵寺).충북 괴산 본문

☆~ 절집.절터/충 북

괴산 각연사(寶蓋山 覺淵寺).충북 괴산

푸른새벽* 2006. 5. 1. 22:47

 

 






 






 











 

 






 






 






 






 






 






 











 

 






 






 






 











 

 






 

보개산 각연사(寶蓋山 覺淵寺)

 

충북 괴산군 칠성면 태성리


속리산국립공원 자락에 드는 보개산 기슭에 자리잡은 절이다.태성리에서 산자락을 향해 들어가는데 마을이 끝나고 논밭도 끝난 후 본격적으로 계곡을 끼고 들어가기를 한참 꽤 깊숙이 들어가는구나 하는 느낌이 들 때쯤 계천(溪川)건너 왼쪽에 정남향한 절이 나타난다.오래된 절이 있을만한 아늑한 자리이다.


각연사는 신라 법흥왕 2년(515)에 유일 스님이 창건했다고 전해진다.처음에는 각연사 앞산인 칠보산 너머 칠성면 쌍곡리 사동(절골) 근처에 절을 지으려고 공사를 시작했는데 자고 일어나보면 목재 다듬을 때 나온 대패밥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이상하게 여긴 유일 스님이 밤잠을 안 자고 지켜보니 까치(또는 까마귀)들이 몰려와 대패밥을 하나씩 물고 어디론가 날아가는 것이었다.스님이 따라가보니 까치들은 산 너머 못에 대패밥을 떨어뜨려 못을 메우고 있었다.그 못에서 이상한 광채가 솟아나 들여다보니 석불이 한 기 들어 있었다.유일 스님은 쌍곡에 짓던 절을 못 있는데로 옮겨 짓고 못에서 나온 석불을 모신 후'깨달음이 연못 속의 부처님으로부터 비롯되었다(覺有佛於淵)라는 뜻에서 절 이름을 각연사(覺淵寺)라 지었으며지금 비로전에 모셔진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이 못에 있던 그 석불이라고 한다.


그후 고려 초기 통일대사가 중창하여 대찰이 되었고 고려 혜종 때 불전들을 중수했으며 조선시대에도 1648년과 1655년의 중수를 거쳐 1899년 비로자나불 개금 불사를 했다고 한다.근래에 들어서도 여러 차례 중수를 했다.그러나 절의 내력을 상세히 전해줄 기록자료는 매우 빈약하다.


신라시대에 창건된 유서 깊은 절이지만 지금 각연사의 규모는 그리 크지 않다.불전으로는 대웅전과 비로전이 있고 요사채 두 동과 삼성각,산신각이 있을 뿐이다.그러나 대웅전 앞 층계를 오르노라면 옛 건물의 기단 등으로 쓰였을 길다란 석재들이 계단돌로 끼어 있음을 볼 수 있다.절에서 이런저런 공사를 하는 중에 발견된 맷돌이나 기름틀,석등 또는 부도의 지붕돌 등도 입구의 새로 쌓은 축대 가에 쌓여 있고,주춧돌 같은 것은 이곳저곳에서 무수히 나온다고 한다.


각연사 대웅전은 조선시대 후기의 건축이며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다포집이다.다듬지 않은 덤벙초석을 놓고 가볍게 배흘림된 기둥을 썼다.네 귀퉁이의 평방머리 이에 자못 익살스러운 표정으로 고래를 푹 숙인 용머리들을 올려놓은 것과 기둥 사이 평방과 창방,문틀 등에 꽃판을 하나씩 달아 장식한 점이 재미있다.건물 안쪽에도 곳곳에 코끼리나 용의 얼굴,꽃판 들이 끼어 있고 쇠서 끝에는 층층이 봉황이나 물고기,연꽃 봉오리,연잎 모양 등이 조각되어 매우 화사하다.불단에는 석가여래좌상과 아미타여래좌상,약사여래좌상이 봉안되어 있고 법당안 동쪽에는 높이 1.3m의 흙으로 빚은 승려상이 한 분 있다.무릎 위에 지팡이를 올려놓고 앉은 이 승려상은 이 절을 창건한 유일 스님이라고도 하고 중국의 달마상이라고도 한다.각연사 대웅전은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26호이다.


대웅전 동쪽으로 조금 높게 돋워진 마당에 보물 제433호인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을 봉안한 비로전이 있다.역시 조선 후기의 건물이며 낮은 기단 위에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선 다포식 팔작집이다.1975년에 보수했는데 기단과 주춧돌의 석재는 신라시대 때부터 있던 본래의 것이라 한다.
비로전은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25호이다.


절 앞으로 나가 개울을 따라 거슬러 오르면 곧 하늘이 열리면서 넓고 평평한 터가 나온다.지금은 밭고랑으로 변했지만 옛날에 절 건물이 있었던 듯 주춧돌이 흩어져 있었다고 한다.너른 터 가장자리쯤에 돌거북 하나가 따로 만들어 꽂았던 머리를 잃고 몸통만 남아 있다.그러나 비좌 옆면에 새겨진 안상이나 등껍데기와 목 둘레에 새긴 꽃잎,발톱과 배 껍질의 표현등이 아주 똑 떨어진 잘생긴 거북이다.이 돌거북은 각연사 사적비를 받쳤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돌거북이 이 정도이면 비석이나 비석머리도 그에 걸맞게 훌륭했겠지만 행방을 알 수 없다.지금 절 입구에 쌓인 옛 석재 가운데 부도나 석등의 지붕돌이었을 커다란 돌이 이 돌거북 근처에서 발견된 것이다.


돌거북이 있는 데서 돌아나와 다시 개울을 건너 조금 올라가면 오른쪽에 석종형 부도 두 기가 있고 거기서 또 얼마간 올라가면 통일대사 부도비가 나온다.통일대사 부도비는 보물 제129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돌거북과 비석머리가 온전하지만 비면이 심하게 풍화되어 거의 읽을 수가 없다.
비신은 높이 2.58m 너비 1.28m 이다.


통일대사는 고려 태조 때의 큰스님으로 속성은 김씨이고 신라 말에 당나라에 유학했으며 귀국한 후 각연사에 머물렀다.부도비의 돌거북과 비좌,비석머리는 신라 하대로부터 고려 초기의 양식을 보이며 건립연대는 고려 광종 9년(958) 8월부터 11년(960) 3월 사이로 추정된다.부도비에서 뒤쪽 산기슭으로 30분 가량 올라간 곳에 통일대사의 사리를 모신 것으로 알려진 석조부도가 있다.
*한국문화유산답사회 지음 '답사여행의 길잡이'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