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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 대장각기비(大藏閣記碑).여주 신륵사 본문

☆~ 풍경소리/경 기

여주 대장각기비(大藏閣記碑).여주 신륵사

푸른새벽* 2007. 1. 9. 00:39

 

 

 

 

 

 

대장각기비(大藏閣記碑)


신륵사의 사격(寺格)을 가늠하는 중요한 사료 중 하나가 금석문(金石文)이다
보제존자 석종비와 대장각기비가 그것이다
조선의 억불정책 속에서도 지리적인 여건과 뛰어난 풍광 덕에 신륵사는 문장가나 묵객들의 발길이 잦았다
대장각 짓기를 발원한 이가 이곡(李穀)이었고,그 원을 성취한 이가 이곡의 아들 목은 이색(李穡)이다
나옹선사가 석종비보다 4년 늦은 1383년에 세워진 대장각기비 비문은 이숭인(李崇仁)이 짓고
권주(權鑄)가 해서로 썼다


이 비는 보제존자 석종비와는 또 다른 맛을 주는데 신라시대 이래 건립되었던 비의 형식과 차이가 많다
장방형의 지대석 위에 대석을 놓고 비좌를 마련했으며,여기에 장방형의 홈을 파서 비신을 꽂아 앉히고
그 위에 지붕돌을 얹었다
애당초 귀부와 이수의 형태가 생략된 상태에서 복련대석으로 귀부를,
지붕돌로 이수를 대신하고 있을 만큼 대폭 간소화 된 형태가 주목을 끈다
종래의 화려한 비들과는 달리 판이하게 다른 투박함 그대로다
이는 고려 말에 보이는 새로운 형식으로,조선시대 석비 양식에 영향을 미치게 되어 더욱 주목하게 된다


키 133cm,너비 88cm인 대리석 비신은 역시 화강암을 양쪽에 세워 보호하고 있으나
손상이 많아 잘려나간 부분이 적지 않다
대리석의 약한 석질이 훼손을 가속화했는지도 모른다
비를 세운 연대까지도 손상되어 우왕 9년(1383)으로 추정하고 있는데
뒷면에는 시주한 신도들과 사부대중으로서 비구.비구니.우바새.우바이(남녀신도)를 구분하여
그 이름을 밝히고 있다


대장각기비는 현재 동쪽 언덕에 위치해 있으나,

원래 신륵사에는 극락보전 서쪽 언덕에 대장각이 있었다고 전한다
아마도 지금의 명부전 부근이 아닐까 하는데
그렇다면 지금 서 있는 이곳의 비도 원위치가 아닐 수 있다
이색과 나옹선사 문하생들이 발원하여 우왕 6년(1380) 2월부터 대장각을 지었으며
경률론(經律論) 3장을 인출하고 수장했었다고 한다
보물 제 230호이다
*한국문화유산답사회 지음 '답사여행의 길잡이'중에서*

 

신륵사대장각기비(神勒寺大藏閣記碑)


보물 제230호
경기 여주군 북내면 천송리 282 신륵사 


신륵사에 세워져 있는 비로, 극락보전 서쪽 언덕에 있었던 대장각(불경을 만들어 보관하던 곳)의 조성에 관한 여러 가지 기록을 적고 있다.


길쭉한 사각형의 바닥돌 위에 받침돌을 놓고, 그 위로 비몸을 세운 후 지붕돌을 얹은 모습으로, 비몸 양 옆에 돌기둥을 세워 비몸을 단단히 지탱하도록 하고 있다. 이렇듯 비몸 양 옆에 돌기둥을 세우는 형식은 고려 후기에 이르러 보이는 현상으로 주목되는 부분이다.


권주(權鑄 )의 글씨로 새긴 비문은 비몸이 크게 파손되어 전체의 내용을 파악할 수는 없다. 비문의 뒷면에는 불경(경률론)을 만들고 비석을 세우는데 참여한 사람들의 이름을 열거하고 있다.


비를 세운 시기는 고려 우왕 9년(1383)이다. 거북 모양의 비받침, 용의 머리가 새겨진 비머리가 고려 후기로 오면서 사각형 받침과 지붕 모양의 머릿돌로 간략화되는데, 이 비도 그러한 예이다. 
*문화재청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