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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 신륵사 보제존자 석종비(驪州 神勒寺普濟尊者 石鐘碑).경기 여주 본문

☆~ 풍경소리/경 기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 석종비(驪州 神勒寺普濟尊者 石鐘碑).경기 여주

푸른새벽* 2007. 1. 7. 23:26

 

 

 

 

 

 

 

 

 

 

 

 

 

 

 

 

 

 

 

 

 

 

보제존자 석종비(普濟尊者 石鐘碑)


보제존자 석종부도의 바로 뒤편에 서 있다
석종부도를 조성하고 묘역을 가꾼 무렵인 고려 우왕 5년(1379)에 건립하였다
'여흥군 신륵사 보제사리 석종기'로 시작되는 비문은 당대의 문장가인 이색(李穡)이 짓고 서예가로 이름 높은 한수(韓脩)가 썼다


선교 양종의 통합에 힘쓰던 여말의 고승 나옹화상은 1376년 양주 회암사에서 밀양 형원사로 가던 도중 이곳 신륵사에서 입적하였다
비에는 보제존자가 살다 간 내력과 사상이 기록되어 있으나 파손이 심해 육안으로는 쉽게 읽기가 어렵다
전면 끝부분에 찬한이와 쓴이,각한이,이 비의 건립자 등의 이름이 있고
후면에는 진당시(眞堂詩)와 함께 200여 명의 문도와 추모자의 이름이 해서체로 씌어있다
대장각기 비와 함께 중요한 금석문 자료이다


보물 제 229호인 석종비의 전체 높이는 212cm,비신 높이 121cm, 너비 61cm이다
비의 구성은 지대석과 비신,비신을 감싸고 있는 대석,그 위에 지붕돌이 놓여 있다
귀부와 이수가 대석과 지붕돌로 대치되어 그 꾸밈새가 단조로우나 힘찬 편이다
변형기의 비지만 공력을 들인 흔적이 엿보이며 전체적으로 굳건한 느낌을 준다


지대석과 3단의 장방형 대석이 견고하다
상단의 대석에는 복련과 앙련을 둘러 새겼고 그 위에 비신을 얹었다
대리석 비신 양 옆으로는 화강암 기둥을 세워 튼실하게 보호하고 있는데 그 위에 얹힌 지붕돌이 눈에 띈다
공포와 기왓골을 마치 목조건물의 그것처럼 잘 조각해놓았다


신라시대 이래 귀부와 이수를 갖춘 석비형식이 일반화되었는데 고려 말기에 이르러 대석과 지붕돌로 변형되어간다
이 비가 바로 그 변형기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보제존자비는 양주 회암사터에도 있다
*한국문화유산답사회 지음'답사여행의 길잡이'중에서*

 

신륵사보제존자석종비(神勒寺普濟尊者石鐘碑)


보물 제229호 
경기 여주군 북내면 천송리 282 신륵사 


신륵사에 모셔진 보제존자 나옹의 탑비이다.


보제존자 나옹은 선종과 교종을 통합하여 불교를 다시 일으켜 세우려 하였던 승려로, 양주 회암사의 주지로 있다가 왕의 명을 받아 밀양으로 가던 도중 이곳 신륵사에서 입적하였다. 이후 그를 따르던 문도들이 절안에 터를 마련하여 사리를 안치한 석종과 석비를 세워두었다.


비는 3단의 받침 위에 비몸을 세우고, 지붕돌을 얹은 모습이다. 받침부분의 윗면에는 연꽃무늬를 새겨 두었다. 대리석으로 다듬은 비몸은 양옆에 화강암 기둥을 세웠으며, 지붕돌은 목조건물의 기와지붕처럼 막새기와와 기왓골이 표현되어 있다.


비의 앞면에는 끝부분에 글을 지은 사람과 쓴 사람의 직함 및 이름에 대해 적고 있는데 글의 맨 앞에 적지 않는 것은 드문 예이다.


고려 우왕 5년(1379)에 세워진 비로, 비문은 당대의 문장가인 이색이 짓고, 유명한 서예가인 한수가 글씨를 썼는데 부드러운 필치의 해서체이다. 전체적으로 고려 후기의 간략화된 형식을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다.
*문화재청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