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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 신륵사 다층전탑(多層塼塔).경기 여주 본문

☆~ 풍경소리/경 기

여주 신륵사 다층전탑(多層塼塔).경기 여주

푸른새벽* 2007. 1. 9. 00:45

 

 

 

 

 

 

 

 

 

 

신륵사 다층전탑(多層塼塔)


신륵사는 고려 때부터 벽절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린다
경내의 동남쪽에 위치한 ,탑 전체를 벽돌(塼)로 쌓아올린 다층전탑에서 연유한 것이다
이 탑은 강가에 솟은 넓은 바위면 위에 세워져 한가로이 강물을 굽어보고 저 건너 너른 평야를 조망하며 서 있다


완성된 형태로 남아 있는 유일한 전탑이다


탑은 보통 경내 중심부에, 그 중에도 금당의 본존불 가까이 안치하는 게 상례이다
탑 역시 중요한 예배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전탑은 금당의 본존불과는 무관한 듯 멀리 외곽으로 뚝 떨어져 나앉았다


우리나라 탑의 변천과정은 불교가 전래된 초기부터 200여 년간은 목탑,이를 본받은 전탑,
그 두 양식을 참고한 석탑 양식으로 발전해왔다
신륵사 전탑은 벽돌 모양으로 보아 신라시대 양식을 이은 고려시대의 유일한 전탑으로 추정하고 있다


기단부는 화강석을 이용했고,탑신부는 모두 벽돌로 밀착하여 쌓았다
이중기단 위에 다시 3단의 석단(石壇)을 얹고,그 위에 탑신을 안치했다
탑신은 전체 6층인데 그 위에 한 층이 애매한 구성을 보이고 있어 7층으로 여겨질 정도이다
층급받침은 층단이 좁고 불균형해 기이하게 보인다
지붕 부분이 매우 약화되어 있다


탑신부는 기단부와 달리 약간의 체감률을 보이다가 맨 위 한 층의 높이가 급격히 얕아지면서
너비의 체감률도 크게 줄어들어 고준한 맛을 보이면서도 불안정하다
그러나 전체적으로는 견고하게 고착된 듯한 기단에 완만한 감축도의 탑신부가 경쾌한 느낌을 준다
벽돌에는 두 면에 반원을 그리고  그 안에 당초문을 놓았으나 일정하지는 않다


이 전탑의 건립연대는 알 수 없다
탑 북쪽에 수리비(修理鼻碑)가 있는데 '숭정기원지제내우중추일입'(崇禎紀元之再內牛仲秋日立)이라는 기록이
조선 영조 2년(1726)에 세워졌음을 일러준다
이때 탑을 수리하고 비를 세웠을 가능성이 있다
보물 제 226호이다
*한국문화유산답사회 지음 '답사여행의 길잡이'중에서*

 

신륵사다층전탑(神勒寺多層塼塔)


보물 제226호 
경기 여주군 북내면 천송리 282 신륵사 


아래로 한강이 굽어보이고 강 건너 멀리 평야를 마주하고 있는 경치좋은 바위 위에 이 전탑이 세워져 있다. 전탑(塼塔)이란 흙으로 구운 벽돌로 쌓은 탑을 이르며, 우리나라에서는 경기도와 경상북도 안동지역에서 몇 기가 남아 있다.


탑은 기단(基壇)을 2단으로 마련하고, 다시 3단의 계단을 쌓은 후 여러 층의 탑신(塔身)을 올렸다. 기단과 계단은 화강암으로 만들었으며, 탑신부는 흙벽돌로 6층까지 쌓아 올렸는데, 그 위에 다시 몸돌 하나를 올려놓고 있어 7층같아 보이기도 하는 애매한 구조이다.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전탑과 달리 몸돌에 비하여 지붕돌이 매우 얇아 전체가 주는 인상이 사뭇 독특하다. 지붕돌 밑면의 받침은 1∼3층이 2단, 4층 이상은 1단이며, 지붕돌 위로도 1층은 4단, 2층 이상은 2단씩의 받침을 두었는데 이 또한 특이한 형태이다. 꼭대기에 머리장식이 있기는 하나 얇다.


탑의 북쪽으로는 수리할 때 세운 비가 전해오는데, 거기서 ‘숭정기원지재병오중추일립(崇情紀元之再丙午仲秋日立)’이라는 연대가 있다. 조선 영조 2년(1726)을 뜻하지만 이 때 다시 세워진 것이므로, 지금 탑의 형태는 만들 당시의 원래 모습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벽돌에 새겨진 무늬로 보아도 고려 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는 것이 옳을 듯하다. 처음 세워진 이후 여러 차례 수리되는 과정에서 벽돌의 반원 무늬 배열상태가 어지럽혀지고, 전체 형태가 다소 변형된 것으로 보여진다. 
*문화재청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