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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평 용문사 정지국사 부도와 부도비(正智國師浮屠.浮屠碑).경기 양평 본문

☆~ 풍경소리/경 기

양평 용문사 정지국사 부도와 부도비(正智國師浮屠.浮屠碑).경기 양평

푸른새벽* 2007. 1. 18. 00:36

 

 

 

 

 

 

 

 

 

정지국사 부도(正智國師浮屠)


입적에 든 지 3년 만인 1398년(태조 7)에 정지(正智)국사 부도와 부도비가 건립되었다


비교적 보존이 잘 된 편인 부도는
여러 장의 장대석으로 부도의 구역을 마련하고 그 중앙에 부도를 건립했다
지대석과 하대석은 방형이고 중대석은 원형이며,상대석과 몸돌.지붕돌은 8각으로 조성돼 있어
팔각원당형의 기본틀에서 많이 변형된 부도라는 점이 눈에 띈다


지대석은 장대한 판석을 둘러 넓게 자리잡았다
그 위에 하나의 돌로 마련된 하대석은 아랫단에 구형을 돌리고 각 모서리를 비롯해 4면에
잎을 아래로 내려뜨린 연꽃문을 돌렸으며,
하대석 윗면에는 낮고 높직한 2단의 굄대를 놓고 중대석을 받았다
중대석은 둥근 곡선을 유지하고 있을 뿐 장식은 없고, 8각 연꽃받침으로 된 상대석을 받치고 있다
그 위에 놓은 8각 몸돌은 각 면에 우주가 모각돼 있고,정면에만 문비(門扉)형 조각이 새겨져 있는데
역시 퇴화된 양식이다


몸돌 위로 3단의 각형 받침이 있는 지붕돌을 얹었다
처마 밑엔 낮은 부연이 표시돼 있고,모서리마다 각형 서까래가 조각돼 있으며
지붕돌 낙수면은 8각 우동(隅棟)이 두드러져 있다
전각부에는 귀꽃무늬가 장식돼 있으나 앞시대에 비해 형식만 남아 있는 소박한 모습이다
상륜부는 둥근 연꽃받침이 있으나 그 위로는 없어졌다
높이 215cm.보물 제 531호이다
*한국문화유산답사회 지음 '답사여행의 길잡이'중에서*

 

 

 

 

 

 

정지국사부도비(正智國師浮屠碑)


정지국사부도비는 부도에서 아래쪽으로 조금 내려가면
넓적한 바위면에 점판암(粘板岩)으로 다듬은 부도비가 척 꽂아 세워져 있다
이 부도비는 본래 지금의 자리 위쪽 바위면에 홈을 파고 비몸을 꽂았다 하는데
어찌 된 일인지 한 때 비좌에서 비신이 빠져나와 경내에 나뒹굴었다고 한다
이를 1970년 지금의 자리에 세웠다는데,시멘트로 붙인 게 흠이긴 하지만 자연석을 비좌로 삼아
본래의 모양새를 갖춘 것은 여간 다행한 일이 아니다
예전 그 모습을 가늠해볼 수 있고,비를 세운 이의 자유스런 경지도 짐작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비의 한 격식으로 여겨지던 이수도 없을 뿐더러,
비신 윗부분의 양 모서리를 사선으로 깎아내려 다듬은 것으로 손길을 접은 것은

파격적이고도 명랑한 일이다


비신 가장자리에서 약 3cm정도 안으로 가는 선을 빙 둘러 긋고 그 안에 비문을 음각했다
비신에 약간의 훼손은 있지만 대수롭진 않고 글씨도 선명하다
비문은 당대의 명신이며 학자인 권근이 국사의 행적을 더듬어 지었는데
비문의 글씨는 정갈스럽고 치밀한 구성으로 쓰여졌음이 확연하다
글자를 20행에 44자씩 썼고,뒷면에는 21행의 형식으로 당시 동참자의 명단을 새겨두었다
앞뒷면 모두 글씨에는 훼손이 없어 찬찬히 짚어보면 내용을 알 수 있다
부도비의 높이는 110cm이다
*한국문화유산답사회 지음 '답사여행의 길잡이'중에서*


정지국사(正智國師)는
고려 말의 승려로써 황해도 재령에서 태어나 열아홉 살에 장수산 현암(懸菴)에서 출가했다
처음부터 참선공부로 들어갔던 국사는 1353년(공민왕 2) 무학대사와 함께 중국 연경으로 건너가
법원사 지공(持空)화상과 대면한다
거기서 먼저 들어와 있던 나옹화상을 만나고,중국 여러 곳을 만행하며 수도하다
3년 만에 귀국한다
나옹과 무학대사의 명성은 높았으나 정지국사는 자취를 숨기고 수도에만 전념하다
천마산 적멸암에서 세수 72세로 입적했다


그런데 입적 후 사리 수습을 미루고 있었던 모양이다
제자 지수의 꿈에 사리를 거두라는 분부가 내렸다
바로 그해 제자 조안(祖眼)은 용문사를 중창하고 있었기에 수습된 사리를 용문사로 모셔와
부도와 부도비를 건립했고, 태조는 정지국사로 추증했다.

 

용문사정지국사부도및비(龍門寺正智國師浮屠및碑)


보물 제531호 
경기 양평군  용문면 신점리 산99-1 용문사 


용문사에서 약 300m 떨어진 동쪽에 자리하고 있으며, 정지국사(1324∼1395)의 행적 등을 기록한 것이다. 정지국사는 고려 후기의 승려로 황해도 재령 출신이며 중국 연경에서 수학하였다. 조선 태조 4년에 입적하였는데 찬연한 사리가 많이 나와 태조가 이를 듣고 ‘정지국사’라는 시호를 내렸다.


부도와 비는 80m정도의 거리를 두고 위치하고 있다. 부도는 조안(祖眼) 등이 세운 것이며 바닥돌과 아래받침돌이 4각이고 윗받침돌과 탑몸이 8각으로 되어 있어 전체적인 모습이 8각을 이루고 있다. 아래받침돌과 윗받침돌에는 연꽃을 새기고, 북 모양의 가운데받침돌에는 장식없이 부드러운 곡선만 보인다. 탑몸에는 한쪽 면에만 형식적인 문짝 모양이 조각되었다. 지붕돌은 아래에 3단 받침이 있고, 처마 밑에는 모서리마다 서까래를 새겼다. 지붕돌 윗면에는 크게 두드러진 8각의 지붕선이 있고, 끝부분에는 꽃장식이 있는데 종래의 형태와는 달리 퇴화된 것이다. 꼭대기에는 연꽃 모양의 장식이 놓여 있다.


비는 작은 규모의 석비로 윗부분은 모서리를 양쪽 모두 접듯이 깎은 상태이고, 문자가 새겨진 주위에는 가는 선이 그어져 있다. 비문은 당시의 유명한 학자인 권근(權近)이 지었다. 처음에는 정지국사부도에서 20m 아래 자연석 바위에 세워 놓았는데, 빠져 나와 경내에 뒹굴고 있던 것을 1970년경 지금의 위치에 세웠다. 
*문화재청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