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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화문(弘化門).서울 창경궁 본문

☆~ 바람소리/궁궐(宮闕)

홍화문(弘化門).서울 창경궁

푸른새벽* 2007. 1. 26. 23:07

 

 

 

 

 

홍화문(弘化門)


창경궁의 정문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중층 우진각 지붕 건물로 동향이다.창경궁 창건 당시인 성종 15년(1484)에 처음 지어졌고,1592년에 임진왜란으로 불에 탄 뒤 광해군 8년(1616)에 재건되었다.현재의 홍화문은 이때 지어진 것이며 여러 차례의 보수를 거쳤다.『東闕圖(동궐도)』에 의하면,문의 좌우로 남북 십자각(十字閣)까지 행각이 연결 되어 있었으나 지금은 궁장(宮墻)이 이어져 있다.홍화문을 들어서면 남북 양쪽 행각이 십자각에서 꺾여 서쪽으로 명정문 좌우 행각까지 이어짐으로써 사각형 모양의 뜰을 형성 하였다.옥천교 좌우의 이 남북 행각 가운데쯤에는 수각(水閣)을 설치하여 명당수 물길을 터 놓았다.일제 강점기 때 훼멸되었던 남북 행각은 1986년에 복원되었다.「동궐도」에 의하면,북쪽 행각에는 평대문 형식의 광덕문(光德門)과 숭지문(崇智門)이 있었다


홍화문 건물은 장대석 기단 위에 둥근 초석으로 놓고 12개의 두리기둥을 세웠는데 아래층 기둥의 길이는 14척,위층 기둥은 8척이라고 기록되어 있다.앞뒤 기둥 네 개씩은 평주이고 가운데 기둥은 위층까지 올라간 고주이다.공포는 다포계로 외이출목 내삼출목이다.쇠서의 조각 형태가 날카로워 조선 초.중기의 건축 양식적 특징을 보여준다.아래층 가운데 기둥 사이에 두 짝 문을 세 곳에 달았고,문짝 위로 홍살(紅箭)을 베풀었으며 그 위쪽 천장은 반자로 막아 우물천장을 형성하였다.문 안 왼쪽에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설치하였다.위층은 네 면 모두 판장문을 달아 여닫을 수 있게 하였으며,바닥에는 마루를 깔았다.천장은 서까래를 노출시킨 연등천장이다.공포는 아래층과 같은 형태이나 기둥 사이가 좁아져 공포의 수를 줄였다.공포 위로는 도리를 얹고 다시 부연(附椽)을 내단 겹처마로 받쳤으며 추녀의 사래 끝에는 토수를 끼웠다.지붕 마루는 높이 양성을 하였으며,취두와 용두,잡상을 배열하였다.편액의 글씨는 인조 때 수곡(壽谷)이지한(李之翰)이 쓴 것으로 전해온다


역사적으로 이곳 홍화문에서는 영조가 재위 26년에 오부(五部)의 사족(士族)과 방민(坊民)을 불러

'균역법(均役法)'의 시행 여부를 직접 물어보았다고 한다.또한 정조는 재위 19년(1795),모후 혜경궁 홍씨의 환갑을 기념하여 이곳에 친림하여 백성들에게 쌀을 나누어 주었다.그 모습은 「弘化門賜米圖(홍화문사미도)」로 그려져 전해온다
*이덕수 지음 '新궁궐기행'중에서*

 

홍화문(弘化門)


보물 제384호 
서울 종로구 와룡동 창경궁 


홍화문은 창경궁의 정문으로 조선 성종 15년(1484)에 지은 건물이다. 임진왜란(1592) 때 불에 타, 광해군 8년(1616)에 다시 지었고 지금 있는 건물은 그 뒤로도 여러 차례 수리하였다.


규모는 앞면 3칸·옆면 2칸의 2층 건물로 동쪽을 향하고 있는 점이 특징이며, 지붕은 앞쪽에서 볼 때 사다리꼴을 한 우진각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꾸몄다. 아래층은 기둥 사이마다 2짝씩 문짝을 달아 사람이 드나들게 하였으며 위층은 마루를 깔고 앞뒤 벽면에 조그만 널문들을 달아 여닫을 수 있게 만들었다. 지붕 꼭대기 양끝의 조각과 부드럽게 굽어 내린 내림마루 부분의 조각상이 건물의 위엄을 한층 더 돋구고 있다.


여러 차례의 수리와 단청으로 고유의 아름다움을 잃었지만, 창경궁·창덕궁과 같은 건물과 함께 17세기 초반 목조건축의 연구자료로서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건물이다. 
*문화재청자료*

 

 

 

 

 *홍화문의 정면

홍화문은 둥근 초석을 놓고 두리기둥을 세워 다포 양식의 공포를 짜 올렸다.어칸 사이로 명정문과 명정전이 보이지만 일직선상에서 다소 틀어져 있다.홍화문은 창덕궁 돈화문보다 10년 남짓 뒤에 중건 되었다.현존하는 궁궐 정문들 중에서 가장 날렵하고 경쾌한 느낌을 준다

 

 

 

 

 *홍화문의 천장

우물 천장으로 마감하였다

 

 

 

 

 *홍화문의 고색창연한 공포와 처마

공포의 끝이 날카로운 앙서가 조선시대 초.중기의 건축적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십자각(十字閣)

홍화문 좌우로 연결되었던 행각이 남북 십자각에서 꺾여 명당수가 흐르는 어구를 지나 명정문 좌우 행각과 만나게 된다.남북 십자각은 홍화문과 더불어 옛 건물 그대로이다

 

 

 

 

 *명당수가 흐르는 어구(御構)

창경궁의 명당수는 홍화문의 서북쪽 방향 춘당지에서 흘러들어 남쪽 방향으로 흘러나간다.「東闕圖(동궐도)」에는 사진 왼쪽 부분에 해당하는 행각에 주자소(鑄字所)가 표기되어 있다

 

 

 

 

 *선인문

홍화문에서 남십자각을 지나 이어진 동남쪽 담장에 있는 궁문이다.임진왜란 때 불에 탔다가 광해군 8년에 중건했으나,철종 8년에 다시 소실되었고 고종 14년에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중종 반정으로 폐위된 연산군이 이 문을 지나 유배지로 떠났으며 『한중록』에서는 사도세자를 가두었던 뒤주를 선인문 밖 가까운 어영청 동영 것을 들여왔다고 하였다.또한 갑신정변 때는 이 문으로 청나라 군대가 진입해 창덕궁 관물헌에 있던 개화당 정부를 공격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