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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양 만안교(萬安橋).경기 안양 본문

☆~ 풍경소리/경 기

안양 만안교(萬安橋).경기 안양

푸른새벽* 2007. 2. 7. 22:38

 

 

 

 

 

 

만안교(萬安橋)


관악전철역을 곁에 둔 개천위에 홍예 모양으로 튼실하게 놓인 만안교(萬安橋)가 있다
정조의 융릉 참배행렬이 편히 건너 갈 수 있도록 축조한,조선 후기 양식을 따른 대표적인 홍예석교이다
정조 19년(1705)에 건축된 만안교는 홍예다리 중에서는 길이와 폭이 상당히 길고 큰 편이다


만안교는 길이 31.2m,폭 8m인데 특히 실용성이 돋보인다
다리 표면은 대청마루를 엇물려 짠 것처럼 화강암 판석과 장대석을 정교하게 깔았는데
약간의 곡선을 이루어 경직된 감을 덜고 있다
7개의 홍예는 하단부터 곡선을 그어 전체의 모양으로는 완전한 반원을 형성하고 다리 아랫부분은 모래에 묻혀있다
홍수가 져도 바닥이 패지 않도록 개천 바닥에 보도블록처럼 다듬은 판석을 바둑판처럼 깐 것도
정성을 들인 흔적이다


만안교는 원래 지금의 위치에서 남쪽으로 200m 정도 벗어난 지점에 있었던 것을 1980년 국도 확장과 함께 이곳으로 옮겼다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 38호이다
*한국문화유산답사회 지음 '답사여행의 길잡이'중에서*

 

안양 만안교(萬安橋)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38호 
경기 안양시 만안구 석수동 679 


조선 정조(正祖)의 현륭원(顯隆園) 참배 행차시 통행 편의를 위해 가설한 다리로 정조 19년(1795)에 건립하였다. 원래 서울에서 수원으로 가는 길은 용산에서 노량진으로 한강을 건너고 동작을 거쳐 과천으로 통하는 길이었다. 그러나 이 길에는 교량이 많고 남태령이라는 고갯길이 있어서 길을 닦고 행차하는 데 어려움이 많았으며, 또한 영조(英祖)를 부추겨서 사도세자(思悼世子)를 죽음에 이르도록 한 김상노(金尙魯)와 관계되는 묘를 지나게 되므로 정조가 이를 불쾌히 여겨 시흥길로 바꾸도록 하였다.


원래 왕의 행차로에는 나무다리를 가설했다가 왕의 행차가 있은 뒤에는 바로 철거하고 행차가 있을 때에 다시 가설하는 것이 상례였다. 시흥로가 개설된 것은 정조 18년(1794)으로 첫해에는 이처럼 임시로 나무다리를 놓아 사용하였는데 다리를 놓았다 헐었다 하는 번거로움과 평상시 다리를 이용할 수 없는 백성들의 고통이 많았으므로 항구적인 돌다리를 놓게 되었던 것이다.


다리의 규모는 원래 길이 15장(약 30m), 폭 4장(약 8m), 높이 3장(약 6m)이고 홍예수문(虹?水門)이 5개라 하였는데, 현재는 홍예가 7개인 것으로 보아 시공 당시에 변경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홍예는 정교하게 다듬은 장대석(長臺石)을 써서 반원형을 이루고 있으며, 그 위에는 장대석을 깔아 노면을 형성했다. 전체적으로 축조 양식이 매우 정교하여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홍예석교로 평가된다.


원래는 남쪽으로 약 200m 떨어진 만안로 입구에 있었는데, 1980년에 국도 확장 때 이 곳으로 옮겨 복원되었다. 다리 남쪽 측면에 축조 당시에 세운 비석이 있다. 
*문화재청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