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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 미륵사지(彌勒寺址).전북 익산 본문

☆~ 절집.절터/전 북

익산 미륵사지(彌勒寺址).전북 익산

푸른새벽* 2007. 2. 8. 23:29

 

 






 






 






 











 






 






 

 






 






 











 

 






 






 











 






 






 






 

 






 






 











 






 

 











 

 






 











 

 

미륵사터(彌勒寺址)

 

사적 제 150호

전북 익산시 금마면 기양리


백제 무왕(武王.600~641)부부의 설화가 얽혀 있는 미륵사터는 익산 용화산 아래 동서 260m,남북 640m, 약 5만여 평의 넓은 평지에 펼쳐져 있다.
미륵사가 자리한 인근 금마(金馬) 지역은 무왕의 출신 성장지이자,일대에 왕궁리(王宮里)절터와 제석사(帝釋寺)터,오금산성(五金山城)등 국가적 역량을 쏟은 유적지들이 산재해 있는 곳이다.이런 까닭에 무왕이 자신의 근거지인 이 지역으로 도읍을 옮기려 했다는 설이 있고 최소한 익산 지역이 백제의 또 다른 예비 수도였다는 별도설(別都說)도 제기되고 있다.


백제 사찰로는 이례적으로 『三國遺事』에 미륵사 창건 설화가 전한다.무왕 부부가 사자사(師子寺)에 가던 도중 용화산 밑의 연못에서 미륵삼존(彌勒三尊)이 나타났는데 왕비의 부탁에 따라 이 연못을 메우고 세 곳에 탑과 금당,회랑을 세웠다고 한다.이 설화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은,우선 미륵사가 백제의 국력을 모은 국가적 가람이었고,습지를 매립하여 평지를 조성하였으며,용화삼회설(龍華三會說)에 따른 가람배치를 구현했다는 점이다.이들 사항은 발굴조사를 통해 대부분 사실로 드러났다.사찰의 창건 연대는 무왕 재위기인 7세기 초이고,임진왜란을 전후하여 폐사 된 것으로 추정한다.


미륵사가 창건되던 7세기 초는 삼국의 영토 경쟁이 최고조에 달한 초긴장기 였다.각국은 모든 수단을ㅇ 동원해 국력 신장에 힘을 쏟는 한편,불교의 힘을 이용하여 대내적 국론 통일을 꾀하였다.바로 이러한 국가적 경쟁에서 나타난 산물이 각국에 조영된 대규모 국찰(國刹)들이다.시기의 차이는 약간 있지만,고구려의 금강사나 정릉사,백제의 미륵사,신라의 황룡사 창건은 불교 진흥책뿐 아니라 대내외적으로도 정치적 목적이 내재된 사건들이다.이들 사찰은 공통적으로 넓은 대지 위에 대규모 전각들을 화려하게 조성하였고 중심에는 매우 높은 초고층 목탑들을 건립하였다.


미륵사는 중문 - 탑 - 금당이 일직선상에 배열된,이른바 백제식 1탑 1금당 형식의 가람 세 동을 나란히 병렬시켜 특이한 구조를 이루고 있다.
물론 양쪽의 동원(東院)과 서원(西院)보다는 가운데 중원(中院)이 면적과 금당 및 탑의 규모가 커 중심을 형성하였다.이는 미륵불(彌勒佛)이 장래 이 세상에 내려와 세 번의 설법(說法)을 통해 중생을 구제한다는 이른바 '용화삼회'를 건축적으로 상징했다고 추정된다.또 습지를 메워 대규모 대지를 조성했다는 점은 미륵신앙과 밀접하게 관계되는 용신(龍神)신앙을 포함한 것으로 볼 수 있다.미륵사는 국가적 필요와 미륵신앙이라는 불교적 상징이 일체되어 조영된 가람이다.


3개 원(院)이 나란히 배열된 중심곽의 앞쪽은 3면에 회랑을 둘러 동서로 긴 마당을 이루고 있다.이곳에는 한 쌍의 동서 당간지주를 제외하고는 다른 구조물의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다.경주 황룡사에서도 중심곽 앞 부분에 빈 마당이 넓게 조성되었는데,고려 예불의 관습상 일반 신도들이 집회용이나 대기 장소로 사용했으리라 추정된다.


동중서(東中西) 3개 원은 각기 긴 회랑으로 구획되어 독립된 공간을 이루지만 북쪽으로는 1동의 큰 강당터로 연결된다.즉 예불공간은 3개 원으로 분화되었지만 강당은 하나로 전체를 통합하는 역할을 한다.강당과 연결된 북.동.서 회랑터에는 후대에 승방(僧房)으로 사용된 흔적도 발견되었다.


이처럼 정형적인 중심곽을 벗어나 서쪽에는 신라와 고려시대에 운영된 것으로 보이는 기왓가마가 여섯 군데 발견되었고,북쪽으로는 조선시대 건물터가 발굴되어 사자사터가 아닌가 추정된다.뒤쪽 용화산에서 발원한 물길은 가람의 네 면에 걸쳐 인공 물길로 정리되었고 가람의 남족 정면에 큰 연못을 조성했던 흔적도 나타났다.또한 강당 북쪽에는 두 개의 다리가 있어서 인공 물길을 건너 뒤편의 후원(後園)지역으로 연결되었다.
원래 습지였던 곳이어서 각별히 치밀하게 배수 처리를 한 점과 아울러 각 원의 금당도 특별한 구조로 습기를 예방하였다.금당 바닥에는 지대석(地臺石)을 깔고 그 의에 1m정도 높이의 주춧돌을 마름모꼴로 놓았으며 초석 위에 귀틀목을 걸친 흔적이 있다.따라서 금당 바닥에 빈 공간을 만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중원의 탑은 목탑으로 추정되지만,동원과 서원에는 석탑이 조성되었다.서원의 석탑이 반파된 채 남아 있고,동원에는 서탑을 본보기 삼아 구층석탑을 추정 복원하였다.미륵사 서원의 석탑은 현존하는 석탑 가운데 가장 오래되고 가장 큰 규모로 유명하다.현재 6층에 높이 14.2m까지 남아 있으며,창방(昌枋),평방(平枋) 등 목탑에 사용되었던 부재들을 돌로 변용하여 조립하였는데 한국 석탑의 시원(始源)양식으로 목탑에서 석탑으로 전이하는 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미륵사터는 사적 제 150호로 지정되어 있다.
*김봉렬 지음 '불교 건축'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