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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전(正殿).서울 종묘 본문

☆~ 바람소리/궁궐(宮闕)

정전(正殿).서울 종묘

푸른새벽* 2007. 2. 11. 23:19

 

정전(正殿)


선왕(先王)들에게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건립된 종묘는 토지와 곡식의 신에게 제사 지내는 사직단과 더불어 왕조에서 가장 중시하던 제례 장소였다.따라서 그 건축은 최고의 격식을 갖추었고,그 핵심이 바로 정전이다.종묘는 중국 후한(後漢)시대에 건립된 제도에 따라 동당이실(同堂異室), 즉 한 건물 안에 여러 방을 따로 구성하여 여러 신위(神位)를 함께 모시는 형식을 취하였는데 왕조가 지속되면서 모셔야 할 신위가 점점 늘어남에 따라 그 건물도 계속 증축되어야 했다.그 결과,종묘 정전은 다른 건물들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동일한 형태가 길게 이어지는 독특한 건축 형태를 이룸으로써 조선 왕조 500년의 장구한 역사를 웅변하고 있다


정전은 정면 19칸 측면 3칸의 익공계 구조의 맞배 지붕 건물이다.태조 4년(1395) 창건 당시는 모두 7칸 규모로,그 안에 석실(石室) 5칸과 좌우에 익실(翼室) 2칸이 있었다.『太祖實錄(태조실록)』에서는 창건된 종묘의 규모를 '태조의 대실은 7칸이며 동당이실로 하였다.안에 5칸의 석실을 만들고 좌우 익실은 각각 2칸이며,공신당이 5칸,신문이 3칸,동문이 3칸,서문이 1칸이다.빙 둘러 담장을 쌓고 담장 밖에는 신주가 7칸,향관청이 5칸,좌우 행랑 각각 5칸,남행랑이 9칸,재궁이 5칸이다'라고 서술하였다.종묘가 창건되던 해 윤 9월에 개성에 있던 태조의 4대조,즉 목조(穆祖).익조(翼祖).도조(度祖).환조(桓祖) 및 그 부인들의 신위를 이곳 정전에 옮겨 모셨다.이후,세종 때 정종이 승하하면서 신실(神室)이 부족해짐에 따라 별묘인 영녕전을 지어 이들 신위를 그곳으로 옮겼으나,.명종 때 이르러 중종과 인종의 부묘와 관련하여 다시 신실이 부족하게 되자 4칸을 증축함으로써 11칸으로 늘어났다.그러나,이때의 건물들은 임진왜란으로 불에 타버렸고 광해군이 즉위하던 해(1608)에 옛 규모대로 11칸을 복원하였다.그 뒤 영조 2년(1726)에 4칸을 증축하여 15칸이 되었다가,다시 헌종 2년(1836)에 4칸을 더 지어 19칸으로 되었다.따라서 현재의 19칸 규모는 헌종 때 증추간 규모 그대로이다.헌종 때 완성된 현재의 건물 구성은 정전 19칸이 남향으로 앉아 있고 좌우로 익실 2칸씩이 이어지며 익실에서 남북 방향으로 꺾여 동서 월랑이 각각 5칸씩 붙어있다


네모 반듯하게 담장으로 둘러싸인 정전의 묘정으로 들어가는 문은 세 곳에 나 있다.남문과 동문,그리고 서문이다.남문은 곧 신문(神門)이다.혼백이 드나드는 문인 것이다.신문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홑처마 맞배 지붕 건물이며,지붕 마루는 양성을 하여 용두를 장식했으나 잡상은 얹지 않았다.각 칸마다 판문 두 짝씩을 달았으며,상부에는 홍살을 구성하였다.문을 들어서면 3급 돌계단을 올라 하월대 가운데로 신로(神路)가 상월대로 오르는 가운데 돌계단,즉 태계(泰階)로까지 이어진다.사람이 다닐 수 없는 신의 길이다.정전 건물 동쪽에 나 있는 동문(東門)은 제례 때 헌관이 출입하는 문이다.동문 역시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이고 홑처마 맞배 지붕이다.지붕 마루는 양성을 하였다.동문 앞에는 어숙실 서쪽 협문에서 이어지는 어로(御路)가 직각으로 꺾이는 부분에 전하판위(殿下版位)와 어로를 비껴서 세자판위(世子版位)가 설치되어 있다.그리고,정전 건물의 서쪽에 나 있는 정면 1칸 측면 2칸의 자그마한 서문(西門)으로는 악공(樂工)등이 출입하였다.이 서문은 임진왜란 후 광해군 즉위년에 재건한 당시의 건물로 추정되며.위치도 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신문,동문과는 달리 기둥에 약간의 배흘림이 가미되어 있다.신문과 동문은 정전 건물이 증축될 때마다 동쪽 방향으로 옮겼었다


정전 앞 드넓은 월대는 상하 2중으로 구성되었다.동서 월랑의 끝에서부터 남쪽 신문 앞까지를 가득 메우다시피 펼쳐 있는 하월대의 규모는 가로(동서)109m 세로(남북)69m 에 이른다.우리 나라에서 가장 넓은 월대이다.세벌대의 장대석을 쌓은 위에 다양한 크기,다양한 모양의 박석(薄石)들이 촘촘하게 깔려있고 곳곳에 차일 고리도 박혀 있다.신문에서 이어지는 신로와 동문에서 이어지는 어로 등은 전돌로 형성하였다.하월대는 제례 때 제관들이 대기하는 공간이다.정전 묘정의 월대는 지면으로부터 단을 높여 공간 성격을 달리함으로써 천장(天上)으로 이어짐을 추구한다.가운데를 가로지르는 신로와 접하는 동쪽 한 곳에 전돌을 깐 네모꼴 박갈판위(薄喝版位)를 두었고 동월랑 남쪽 아래 하월대에는 전하판위와 세자판위를 각각 배치하였다.하월대에서 상월대로 오르는 정면 돌계단은 모두 세 군데(東階.泰階.西階)설치되었는데 신로와 이어진 가운데 계단(泰階)으로는 사람이 오르내릴 수 없다.동서 익실 쪽으로 오르는 낮은 계단도 각각 배치하였으며 동문 쪽에서 하월대로 올라 다시 동익랑으로 오르는 돌계단도 세 군데 배치하였다.하월대에서 단을 높여 형성한 상월대 역시 박석을 촘촘히 깔았으며,동서 익실 앞부분은 단을 약간 낮추었다


정전 건물은 상월대 위에 장대석 기단 한 단을 바르게 쌓고 방형 대좌(臺座)에 둥글게 다듬은 초석을 놓아 두리기둥을 세웠다.약간의 배흘림을 둔 두리기둥 위에는 이익공 형태의 간결한 공포를 얹었다.홑처마 위로 지붕이 길게 이어지는데,지붕 마루는 양성을 하고 익실과 분절되는 곳에는 취두와 용두 및 잡상을 앉혔다.정전의 지붕은 특히 물매가 가팔라 더욱 웅장하다
정전 건물의 길이는 총 101m에 달하는데, 매 칸마다 신위를 모신 신실이 19칸,그 좌우에 이어진 익실로 각각 2칸,그리고 양 익실 끝에서 직각으로 꺾여 남쪽 방향으로 돌출해 있는 동서 월랑 5칸씩으로 구성되어 있다.신실 19칸의 길이는 70m이다
19칸을 구획하는 기둥은 그 간격이 일정하며,앞면 1칸이 개방되어 있기 때문에 열을 지어 늘어서 있는 20개의 기둥들이 장엄한 광경을 연출한다.정전 건축의 기본 단위인 신실은 1칸으로 구성되어 있다.평면의 제일 뒤에는 신위를 모신 감실(龕室)이 있고 그 앞에 제사 지낼 공간을 마련하였으며,그 끝에 판문을 설치하였다.판문 밖에는 1칸의 툇간을 구성하였는데 이는 제례에 필요한 최소한의 공간이다.두 짝의 판문은 안여닫이로 달았으며,중앙 칸에는 밖으로 빗장을 달았다.문 하방(門下枋)좌우에는 신방목(信枋木)이 있고, 그 머리에 삼태극(三太極)이 조각되어 있다.문 바깥쪽에는 발을 칠 수 있게 하여 제례 때는 판문을 열고 발을 내린다.판문 안쪽 좌우에는 의장(儀仗)을 벌려 세웠는데,서쪽으로는 용선(龍扇)과 용개(龍蓋),동쪽으로는 봉선(鳳扇)과 봉개(鳳蓋)를 세웠다.이들은 모두 황색이다


정전 내부에는 감실이 형성되어 있는 공간을 운궁(雲宮)이라고도 한다.모시고 있는 신위의 위쪽으로는 구름무늬 조각의 장식 판이 무지개 모양으로 걸려 있다.이는 감실이 천상에 있음을 상징한다.이와 관련하여,동월랑으로 오르는 돌계단의 소맷돌에도 구름 형상이 조각되어 있다.이러한 형태의 소맷돌 문양은 종묘 정전에서만 볼 수 있는 상징적 장식이다.각 감실 서쪽에는 왕의 신위가,동쪽에는 왕비의 신위가 봉안되어 있으며 그 앞쪽에는 제례 때 신위를 모시는 신탑(神榻)이 있다.정전 건물은 앞면에만 툇간을 구성하였고,나머지 세면은 모두 벽돌로 두껍게 벽체를 감쌌다.이는 내부를 어둠의 공간으로 형성함으로써 신성함을 더하고자 함이다.정전의 하월대 아래에는 동쪽으로 공신당이,서쪽으로 칠사당이 각각 자리를 잡고 있다.서북쪽 뒤에는 제례 후 축과 폐를 불사르는 감(坎)이 있는데,이를 망료위(望燎位)라고도 한다.또한 동문의 북쪽으로는 수복방(守僕房)이 배치되었다.현재 종묘 정전 신실의 순서는 서쪽을 상(上)으로 하여(以西爲上.이서위상),동쪽으로 배열되어 있다
*이덕수 지음 '新궁궐기행'중에서*

 

종묘정전(宗廟正殿)


국보 제227호 
서울 종로구 훈정동 1-2 종묘 


종묘는 조선왕조 역대 임금의 신위를 모신 곳으로, 정전은 종묘의 중심 건물로 영녕전과 구분하여 태묘(太廟)라 부르기도 한다.


정전은 조선시대 초 태조 이성계의 4대조(목조, 익조, 탁조, 환조) 신위를 모셨으나, 그 후 당시 재위하던 왕의 4대조(고조, 증조, 조부, 부)와 조선시대 역대 왕 가운데 공덕이 있는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시고 제사하는 곳이 되었다. 종묘는 토지와 곡식의 신에게 제사지내는 사직단과 함께 국가에서 가장 중요시한 제례 공간으로, 그 건축 양식은 최고의 격식을 갖춘다.


현재 정전에는 서쪽 제1실에서부터 19분 왕과 왕비의 신주를 각 칸을 1실로 하여 모두 19개의 방에 모시고 있다. 이 건물은 칸마다 아무런 장식을 하지 않은 매우 단순한 구조이지만, 19칸이 옆으로 길게 이어져 우리나라 단일건물로는 가장 긴 건물이다. 홑처마에 지붕은 사람 인(人)자 모양의 맞배지붕 건물이며, 기둥은 가운데 부분이 볼록한 배흘림 형태의 둥근 기둥이고, 정남쪽에 3칸의 정문이 있다.


종묘 정전은 선왕에게 제사지내는 최고의 격식과 검소함을 건축공간으로 구현한, 조선시대 건축가들의 뛰어난 공간창조 예술성을 찾아볼 수 있는 건물이다. 
*문화재청자료*

 

 

 

 

 *제례 때 헌관이 출입하던 동문

즉,임금이 출입하던 문이다.사진 왼쪽에 보이는 건물은 수복방이다

 

 

 

 

 *정전

500년 조선 왕조의 역사를 웅변하듯 웅장하고 장엄하다.신실 10칸,좌우 익실 4칸,동서 월랑 각각 5칸으로 구성된 정전 건물의 길이는 101m이다

 

 

 

 

 *동문 앞 전하관위(오른쪽)와 세자관위

전하관위와 세자관위는 동월랑쪽 하월대에도 배치되어 있다

 

 

 

 

 *드넓은 월대에 촘촘히 박혀 있는 박석과 차일고리

 

 

 

 

 

 *정면 1칸으로 단촐한 서문

광해군 즉위년 중건 당시의 건물로 추정된다

 

 

 

 

 *상월대로 오르는 가운데 계단

신로(神路)와 이어진 신의 계단이다

 

 

 

 

 *동문에서 동월랑으로 오르는 가운데 계단

소맷돌의 구름 문양이 천상으로 오름을 상징한다

 

 

 

 

 *상월대 위에 한 단의 기단을 놓고 정전 건물을 앉혔다

 

 

 

 

 *남신문에서 이어져 태계에 이르는 신로(神路)

하월대의 한 가운데를 가로 지른다

 

 

 

 

 *상월대를 형성하여 받치는 돌 쌓음

비정형의 조화가 오히려 자연스럽다

 

 

 

 

 *정전 건물의 공포

단순한 이익공 형태이다

 

 

 

 

 *네모꼴 대좌와 둥글게 다듬은 초석

그 위에 약간의 배흘림을 둔 두리기둥을 세웠다

 

 

 

 

 *열을 지어 늘어선 기둥

장엄한 의식이 연상된다

 

 

 

 

 *동월랑

서월랑과는 달리 트인 공간으로 형성하였다

 

 

 

 

 *서월랑 5칸은 벽으로 둘러막아 가운데 칸에만 두 짝 판문을 달았다

 

 

 

 

 *정전 건물 구성의 기본 단위인 신실(神室)

두 짝의 판문을 안여닫이로 달았으며,문하방 좌우의 신방목 머리에는 삼태극을 조각하였다.또한,발을 칠 수 있게 하여 제례 때는 판문을 열고 발을 내린다

 

 

 

 

 *정전 뒷면

맞배지붕의 풍판과 화방벽으로 쌓은 간결한 벽체가 엄숙한 조화를 이룬다

 

 

 

 

 *지대석 위에 네모꼴 사괴석을 높이 쌓고 기와로 지붕을 얹은 정전 동쪽 담장

멀리 보이는 건물은 동문이다

 

 

 

 

 *정전 건물 지붕 위의 취두와 용두와 잡상

 

 

 

 

 *정전 건물 뒤에 돌로 쌓아 화계처럼 형성한 단과 북쪽 담장

담장 밖은 울창한 숲이다.그리고 건물 뒤 서북쪽 방향에는 제례 후 축과 폐를 불사르는 감,즉 망료위가 있다

 

 

 

 

 *정전 북쪽 담장과 동쪽 담장이 모서리로 연결되는 부분

 

 

 

 

 *정전 하월대의 빗물을 모아 흘러내리게 하는 배수 시설

이러한 시설은 창덕궁 내전 일곽에서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