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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산사 노주석(金山寺爐柱石).전북 김제 본문

☆~ 풍경소리/전 북

금산사 노주석(金山寺爐柱石).전북 김제

푸른새벽* 2007. 2. 16. 00:21

 

 

 

 


금산사 노주석(金山寺爐柱石)


보물 제 22호인 금산사 노주는 대적광전과 대장전의 중간쯤에 자리 잡고 있는데 실제로 무엇에 쓰이던 석물인지는 알 수 없다.위에 올려진 연봉형 보주를 뺀다면 방형 대좌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감로수 병을 받치던 것이라는 설도 있다.또 금산사에 전해지는 『금산사지』에 는 노주(露柱)란  탑 꼭대기의 찰주(刹柱)를 노반지주(露盤之柱)라 부르는 데서 생겨난 말이며 불전의 정면 두 귀퉁이에 세우는 두 개의 번간(幡竿)을 가르킨다는 내용과 이것이 원래 미륵전 앞마당에 놓여 미륵불에게 광명을 공양하던 석등롱이었으며 후에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는 기록이 있기도 하다
이것이 광명대의 역할을 하던 석등이었다면 그 위의 화사석이 없어진 것으로 볼 수 있겠지만 아직은 정설이 없으므로 못박아 말할 수는 없다


맨 아래 기단석 위에 하나의 돌로 된 방형 하대석을 놓았는데 각면의 중앙과 양모서리에는 기둥을 나타냈고 한 면마다 두 개의 안상을 세겼다
안상의 문양은 투박한 편이다.안에는 꽃문양을 조각했고 윗부분에는 복판 연꽃잎을 엎어 새겼다.중대석에는 아무 조각이 없고 각 면의 모서리에 선각으로 기둥을 표현했을 뿐이다.상대석 역시 방형이며 각면마다 세 개,그리고 모서리에 한 개씩 연화문을 조각했다


높이 2.3m로,상.하 대석의 안상이나 연판의 양식 수법 및 각부의 조성 기법으로 보아 고려 시대 초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문화유산답사회 지음 '답사여행의 길잡이'중에서*

 

금산사노주(金山寺露柱)


보물 제22호 
전북 김제시 금산면 금산리 39 


『금산사사적』에 의하면, 금산사는 600년대 창건되어 신라 혜공왕 2년(776)에 진표율사가 다시 고쳐 세우면서 큰 사찰로서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또한 고려 전기인 935년에 후백제의 신검이 아버지인 견훤을 유폐시켰던 장소로도 유명하다.


이 노주는 금산사 대적광전에서 서남쪽에 위치한 대장각으로 가는 길의 중간에 있는데, 그 이름을 노주(露柱)라고는 하였으나 실제로 무엇으로 사용한 것인지 그 용도를 알 수 없는 보기 드문 유물이다. 꼭대기에 놓인 꽃봉오리모양의 조각만 없으면 불상을 얹는 사각형의 대좌(臺座)처럼 보인다.


땅 위에 바닥돌을 놓고, 그 위에 아래·중간·위받침돌을 순서대로 얹어놓았다. 아래받침돌에는 네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을 새겨 면을 둘로 나눈 뒤 안상(眼象)을 조각하였다. 아래받침돌 윗면과 윗받침돌에는 아무런 꾸밈이 없는 중간받침돌을 사이에 두고 대칭되게 연꽃잎을 새겼는데, 아래받침돌의 연꽃잎이 넓고 짧은 반면, 윗받침돌의 연꽃잎은 좁고 길쭉하게 표현하였다. 꼭대기에는 석탑과 같은 머리장식이 남아있는데, 둥근 받침부분과 보주(寶珠)를 가늘고 긴 사잇기둥이 연결하는 형식이다.


절이 창건된 때가 통일신라시대라고는 하지만, 당간지주 외에는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으로 짐작되는 것이 거의 없다. 이 노주도 받침돌에 새겨진 조각의 양식이나 각 부분의 수법으로 보아 고려 전기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문화재청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