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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창성사지 진각국사탑비 ( 彰聖寺址 眞覺國師塔碑) .경기 수원 본문

☆~ 풍경소리/경 기

수원 창성사지 진각국사탑비 ( 彰聖寺址 眞覺國師塔碑) .경기 수원

푸른새벽* 2007. 3. 25. 21:59

 

 

 

 

 

 

 

수원 창성사지 진각국사탑비 (水原 彰聖寺址 眞覺國師塔碑)


수원화성 연무대를 둘러보고 아래로 내려오면 진각국사 부도비가 있다
광교산 중턱의 창성사터에서 옮겨온 것으로 보물 제 14호이다


수원 광교산 골짜기에는 고려 초기까지만 해도 89개의 암자가 세워져 고승들을 배출했다고 전한다
고려 시대 화엄종 사찰이던 창성사는 광교산에 있었으나 언제 창건되고 폐사가 되었는지 알 수가 없고
지금 창성사터에는 법성사가 세워져 여린 기운을 이어가고 있다


다만 『신증동국여지승람』「수원도호부 불우조」에
"광교산에 창성사가 있다 .이색이 지은 고려 승 천희(千熙)의 비명(碑銘)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고
1799년에 제작된 『범우고』에"예전에 폐사가 된 것을 이제 수리한다"는 내용이 전하고 있다
무슨 이유였는지 스러졌던 절이 잠시 회복기에 들었다가 다시 흔적 없이 폐사가 되었음을 짐작할 뿐이다


'창성사터'표지판이 서 있는 광교산엔 지금도 장대석과 주춧돌,계단석 등의 석편들이 나뒹굴고 있다
인근 마을까지 창성사터에 속할 만큼 퍽 너른 절이었다고 하는데
진각국사 부도비가 언제 어떻게 지금의 매향동으로 내려왔는지는 알 수 없다
이 부도비와 가까이 있었을 부도는 아직도 간 곳을 모른다


부도비의 주인은 진각국사 천희스님이다
비문 내용을 살펴보면 스님은 고려 충렬왕 33년(1307) 흥해(지금의 포항시 흥해읍)에서 태어나

13세에 화엄종 반룡사 주지 일비(一非)대사를 은사로 출가한다

덕천사.부인사.개태사 등에 머물며 수행에 힘쓰다가 쉰이 넘은 늦은 나이로 중국 유학을 떠났다

2년 뒤인 1366년 원나라 성안사 만봉스님에게서 가사와 선봉(禪棒)을 물려받는다

예로부터 가사와 선봉의 전수는 심법(心法)을 내리물림한다는 징표로 전해오고 있다

 

 고려에 돌아온 천희스님이 치악산에 머물 때인 1347년,

공민왕은 사신을 보내 '국사대화엄종사 선교도총섭(國師大華嚴宗師禪敎都總攝)'에 봉하고 인장과 법의를 내렸다

국사 자리에 오른 천희스님은 선승과 학승의 면모를 두루 갖춘 분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 수원시 매향동에 있는 진각국사 부도비는 장방형의 지대석 위에 비좌를 마련,장방형의 홈을 파고 비신을 얹었다

그 위에 지붕돌을 얹은 일반적인 형식인데,별다른 조식 없이 소박한 비로 남아 있다

비좌는 1단의 굄뿐이고 지붕돌의 낙수면은 경사가 완만하다

부도비는 수님 입적 다음해인 1386ㄴ녀(우왕 12)에 세웠다

천희스님의 이력에 비해 매우 단조롭고 소박하다

 

비문은 이색(李穡)이 짓고,각은 승려 혜잠(惠岑)이 하였으나 글씨를 쓴 사람은 마모가 심해 판독이 안된다

서체는 구양순체에 근거를 두기는 하였으나 붓의 힘이 굳세기 못하고 금석문의 풍모가 거의 사라진 투박한 면을 보이고 있다

*한국문화유산답사회 지음 '답사여행의 길잡이'중에서*

 

수원 창성사지 진각국사탑비 (水原 彰聖寺址 眞覺國師塔碑)

보물 제14호 
경기 수원시 팔달구 매향동 13-1 


진각국사의 행적을 알리는 탑비로 창성사터에 있다. 직사각형의 비받침 위에 비몸돌을 세운 다음 지붕돌을 올려놓았다. 비문을 새긴 비몸돌은 마멸이 심하고 오른쪽 모서리가 떨어져 나갔으며, 지붕돌은 경사면이 완만하다.


비문에는 진각국사가 13세에 입문한 뒤 여러 절을 다니며 수행하고 부석사(浮石寺)를 중수하는 등 소백산에서 76세에 입적하기까지의 행적이 실려있다. 입적한 다음 해인 우왕 12년(1386) 광교산 창성사 경내에 이 비가 세워졌다.


간략화된 고려 후기 석비의 형식을 보이고 있으며, 선봉사대각국사비(보물 제251호)와 신륵사보제존자석종비(보물 제229호), 신륵사대장각기비(보물 제230호) 등과 비교할 만 하다. 글씨는 고려 전기의 힘있는 풍모가 사라진 투박한 것으로, 고려 후기의 글씨가 퇴보하였음을 보여준다. 비문은 이색이 짓고 승려인 혜잠이 글씨를 새겼다.
*문화재청자료*

 

(수원화성을 돌아보는 길에 만날 수 있었는데...

작은 보호각에 갇혀 있어서 제대로 살펴보질 못했던 것은 보호각의 창살이 카메라렌즈도 들이밀지 못할정도로 촘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