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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처럼 떠나다
남원 광한루원(廣寒樓苑).전북 남원 본문
광한루원(廣寒樓苑)
광한루가 있는 곳은 남원역에서 걸어서 약 15분 거리밖에 안되는 시내 복판에 위치한 광한루원이다
광한루원은 광한루와 연못,못 속에 있는 세 개의 섬(삼신산),오작교 등으로 꾸며진
누원 외에 춘향사.충혼각.남원국악원.완월정 등이 조성돼 있다
누원으로서보다 춘향과 이도령이 만난 무대로서 더 잘 알려져 있지만
사실 이곳은 우리나라 조경사에서 매우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조선왕조의 성립 이후 궁궐의 후원을 꾸미면서 우리 조경문화는
음양오행사상과 풍수지리사상의 토대 위에서 자연의 순리를 존중하는 성리학적 세계관이 결합되어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는데,
광한루원은 바로 조선 전기 궁궐에서 완성된 조경문화가 민간으로 확산되는 과정의 산물이며
천체와 우주를 상징하는 요소들로 가득 찬 독특한 누원이다
광한루의 역사는 1170년 무신의 난으로 벼슬을 버리고 남원으로 내려 온 황공유의 후손인
황감평이 지은 일재(逸齋)라는 조그만 서실에서부터 시작된다
그 뒤 그의 아들인 황희(黃喜.1363~1452)가 태종의 '양녕대군 폐위'를 반대하다가 남원에 유배되었을 때
누각을 짓고 광통루(廣痛樓)라 하였던 것을 세종 16년(1434)에 남원부사 민여공이 중수하고
이듬해 전라감사였던 정인지가 누에 올라 경관을 감상하다가
"달나라에 있는 광한청허부가 바로 이곳이 아니던가"하고 감탄하였다는 데서 광한루라는 이름이 유래되었다
이후 1461년 부사 장의국(張義國)이 광한루 앞을 흐르는 요천을 끌어다가 은하수를 상징하는 연못을 만들고
그 위에 은하수에 가로막힌 견우성과 직녀성의 칠월 칠석날 만남을 상징하는 오작교를 만들었다
그러나 당시의 건물은 정유재란으로 소실되었고
현재의 건물은 인조 16년(1638)에 남원부사인 신감이 복원한 것이다
광한루원 산책은 요천가에 세워진 정문인 남문('청허루'라는 현액이 걸려 있다)을 통해서 광한루원으로 들어서면서 시작된다
오른쪽의 산책길로 들어서면,그 길 끝에 춘향의 절개를 상징하는 듯 대나무숲에 둘러싸인 춘향사(春香祠)를 먼저 만난다
춘향사는 춘향의 영정을 모신 곳이다
산책길 중간에는 성이 같다고 해서 춘향의 아버지일지도 모른다고 추측하는
남원부사 성안의의 비석이 춘향사 옆의 선정비들과 별도로 세워져 있다
선정비들을 지나면 광한루에 이르고 그 앞쪽에 오작교가 드리워져 있는 연못이 있다
광한루는 연못가에 남향으로 자리잡고 있으며 막돌바른층쌓기로 된 낮은 기단 위에 막돌초석을 놓고 그 위에 사각의 돌기둥을 세워
마루 밑에 이르게 하고 나무기둥을 그 위에 세운 정면5칸 측면 4칸짜리 중층 팔작기와집이다
오른쪽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누(樓)가 덧붙여져 있다
2층 바닥은 원래 귀틀을 짜고 점판을 깐 우물마루였을 것으로 추측되나 지금은 장마루로 되어 있다
주위에 계자난간을 둘렀으며,기둥 사이에는 모두 분합문의 들창을 달아 시야가 시원하도록 하였다
밀양 영남루,삼척 죽서루,진주 촉석루 등이 들창이 없이 탁 트인 구조인 점에 견준다면 이는 광한루의 독특한 개성이라 하겠다
동쪽에 잇댄 익루(翼樓)는 삼면을 툇마루를 돌려 개방하고 그 안쪽으로 정면 2칸 측면 1칸의 온돌방을 두었다
따라서 익루의 1층은 온돌방 아랫부분이므로 벽체로 두르고 여기에 아궁이와 굴뚝을 들였다
광한루 뒤쪽으로는 누에 오르기 위해 만든 층단이 정면 1칸 측면 3칸의 회랑식으로 가설되었는데
이는 광한루의 본관이 차츰 북쪽으로 기울어지자
고종 14년(1877)에 부임한 남원부사 이용준이 수지면에 사는 대목 추씨의 아이디어를 받아들여 기울어짐을 방지하기 위해 설치한 것이다
이 북쪽 층단은 우리나라 건축사상 누각에 현관을 가설한 첫 시도이다.이로써 외관은 더욱 화려해졌다
광한루는 보물 제281호로 지정돼있으며,안에는 '호남제일루' '광한루' '계관' 같은 현액들이 걸려 있으며
강희맹.김시습.김종직.정철 등의 시문이 수두룩하다
광한루 앞의 연못은 1:2 비율을 갖는 장방형으로 축조되어 있으며
그 안에는 신선이 산다는 전설의 삼신산을 본떠 만든 세 개의 인공섬이 떠 있다
이 섬들은 1582년 정철(鄭澈)이 전라도관찰사로 부임하여 만든 것으로
오작교 곁에 있는 영주섬에는 연정(蓮亭)을,가운데 봉래섬에는 배롱나무를,그 옆의 방장섬에는 방장정을 세웠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 영주섬에는 1963년에 세운 육모정인 방장정이 있으며,
방장섬에는 1795년에 세운 영주각이 있다.영주각은 1965년 새로이 단장되었다
연못 위에 드리워진 오작교는 난간 없는 아름다운 네 개의 홍예로 구성되어 있다
길이 약 25m,너비 2.6m, 높이 4m에 이르며,노면은 크고 작은 장방형 돌로 모자이크하듯 리듬있게 구성돼 있다
1963년과 1990년 광한루원을 확장할 때 두 차례에 걸쳐 다리를 남쪽으로 연장하여 지금은 길이가 50m에 달한다
연못가 한 귀퉁이에 있는 길이 약 2.4m의 자라상은 삼신산이 조성될 때 만들어진 것으로 추측된다
이곳에 자라상을 놓은 이유는 분명치 않은데,신선사상에 연유해 자라로 보는 전설과 풍수지리상 천재지변을 몰고 오는
지리산의 동남풍을 제압하기 위한 거북으로 보는 두 가지 이야기가 전해온다
오작교 건너에 있는 완월정은 1969년 광한루원 확장시에 기존 연못을 확장하고
주변을 정화하면서 새로 지은 수중누각이다
광한루가 달나라의 궁전을 재현한 것이라면,완월정은 지상의 사람이 달나라를 줄긴다는 뜻으로 새워진 건물이다
정면 6칸 측면 2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된 누각으로 광한루원의 절경을 한층 돋보이게 하고 있다
본래 광한루원은 6천 여평이었으나,
여러차례에 걸친 확장공사 끝에 춘향을 떠올리게 하는 각종 장면에 재현된 춘향전기념관,
춘향과 이도령이 백년가약을 맺은 부용당,춘향의 어머니가 살았다는 월매집 등이 추가돼 1만 7천여 평에 이른다
*한국문화유산답사회 지음 '답사여행의 길잡이'중에서*
광한루원(廣寒樓苑)
명승 제33호
전북 남원시 천거동 78번지 등
신선의 세계관과 천상의 우주관을 표현한 우리나라 제일의 누원이다.
원래 이곳은 조선 세종 원년(1419)에 황희가 광통루라는 누각을 짓고, 산수를 즐기던 곳이었다. 1444년 전라도 관찰사 정인지가 광통루를 거닐다가 아름다운 경치에 취하여 이곳을 달나라 미인 항아가 사는 월궁속의 광한청허부(廣寒淸虛府)라 칭한 후 ‘광한루’라 이름을 부르게 되었다. 1461년 부사 장의국은 광한루를 보수하고, 요천의 맑은 물을 끌어다가 하늘나라 은하수를 상징하는 연못을 만들었다.
호수에는 지상의 낙원을 상징하는 연꽃을 심고, 견우와 직녀가 은하수에 가로막혀 만나지 못하다가 칠월칠석날 단 한번 만난다는 사랑의 다리 ‘오작교’를 연못 위에 설치하였다. 이 돌다리는 4개의 무지개 모양의 구멍이 있어 양쪽의 물이 통하게 되어 있으며, 한국 정원의 가장 대표적인 다리이다.
1582년 전라도 관찰사로 부임한 정철은 광한루를 크게 고쳐 짓고, 은하수 연못 가운데에 신선이 살고 있다는 전설의 삼신산을 상징하는 봉래·방장·영주섬을 만들어 봉래섬에는 백일홍, 방장섬에는 대나무를 심고, 영주섬에는 ‘영주각’이란 정자를 세웠다. 그러나 정유재란 때 왜구들의 방화로 모두 불타버렸다.
현재의 광한루는 1639년 남원부사 신감이 복원하였다. 1794년에는 영주각이 복원되고 1964년에 방장섬에 방장정이 세워졌다. 이 광한루원은 소설 『춘향전』에서 이도령과 춘향이 인연을 맺은 장소로도 유명하여, 1920년대에 경내에 춘향사를 건립하고 김은호 화백이 그린 춘향의 영정을 모셔 놓았다. 해마다 음력 5월 5일 단오절에는 춘향제가 열린다.
*문화재청자료*
*광한루
조선 초 황희가 남원으로 유배와 광통루라 이름하여 지은 건물이었으나
정유재란 때 소실된 후 인조 16년에 남원부사 신감이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광한루의 북쪽 층단
조선 말 광한루의 본관이 북쪽으로 차츰 기울어지자 고종 14년에 기울어짐을 방지하고
누각으로 올라가기 편하도록 설치한 층단이다
덕분에 외관이 더욱 화려해졌다
*오작교
은하수를 상징하는 연못을 건널 수 있도록 네 개의 홍예로 구성된 아름다운 돌다리다
*완월정
1969년 광한루원을 확장할 당시 새로 지은 수중누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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