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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령 성주사터 삼층석탑 3기(聖住寺址三層石塔三幾).충남 보령 본문

☆~ 풍경소리/충 남

보령 성주사터 삼층석탑 3기(聖住寺址三層石塔三幾).충남 보령

푸른새벽* 2007. 11. 17. 21:54

 

 

 

 

 

 

 

 

 

 
성주사터 삼층석탑 3기(聖住寺址三層石塔三幾)


대개 주요 전각 앞에 탑이 하나씩 있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 절터에는 특이하게도 탑이 넷이나 있다
오층석탑 뒤쪽에 마치 경호라도 하듯이 버티고 서 있는 삼층석탑들은 크기도 그만그만 하고
생김새도 비슷하다


2층 기단에 3층 몸돌을 이루고 있어서 신라 하대 전형적인 삼층석탑의 형식을 간직하고 있으나
전체적으로는 꽤 왜소해진 편이다
그리고 앞의 오층석탑처럼,기단 갑석과 1층 몸돌 사이에 몸돌 굄대로 보이는 돌 한장을 끼워 넣은 것이
일반적인 형식에서 벗어난다
또 세 탑이 모두 1층 몸돌 남쪽 면에 문틀과 문비를 새겨 넣었는데 가운데 삼층석탑의 조각이 가장 화려하다

 

 

성주사지중앙삼층석탑(聖住寺址中央三層石塔)

보물 제20호 

성주사는『삼국사기』에 나오는 백제 법왕 때 창건한 오합사(烏合寺)가 이 절이었다고 하며, 통일신라 문성왕대에 당나라에서 돌아온 낭혜화상이 이 절의 주지가 되어 번창시키니 왕이 ‘성주사’라는 이름을 내려주었다 한다. 임진왜란 때 불에 타서 현재는 절터만 남아 있다.


성주사의 옛터에서 금당터로 추측되는 건물터 뒷편에 나란히 서있는 3개의 석탑 중에서 가운데에 자리잡고 있는 탑이다.


이 탑은 함께 나란히 서 있는 탑들과 마찬가지로, 상·하 2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리고 있다. 기단은 각 층의 4면 마다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의 조각을 새겨 놓았다. 그 위로는 1층의 탑몸돌을 괴기 위한 돌을 따로 끼워두었다. 탑신부의 1층의 몸돌은 2·3층에 비해 훨씬 커 보이며, 한쪽 모서리가 크게 떨어져 나갔다. 남쪽의 한 면에는 문짝 모양을 조각하였고, 자물쇠 모양을 그 가운데에, 자물쇠 아래로 짐승 얼굴 모양의 문고리 한 쌍을 배치하였으며, 나머지 공간을 못머리 모양의 둥근 조각으로 채웠다. 지붕돌은 몸돌에 비해 넓어 보이며, 밑면에 4단의 받침을 두었고, 네 귀퉁이 끝이 살짝 위로 젖혀져 있는데 그 모습이 가뿐하다.


1층 탑몸돌을 괴는 돌의 형식이라든가, 지붕돌 받침이 4단으로 된 점 등이 통일신라 후기의 모습을 하고 있어 이 때에 만들어진 작품으로 여겨진다. 절터 안에 있는 다른 탑들에 비해 화려함과 경쾌함을 지니고 있으나, 가장 많은 손상을 입어 보는 이로 하여금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문화재청자료*


성주사지서삼층석탑(聖住寺址西三層石塔)

보물 제47호 

성주사지에서 금당터로 보이는 곳의 뒤쪽으로 나란히 서 있는 3기의 탑 중 가장 서쪽에 있는 석탑이다. 성주사는 구체적 유래는 전하고 있지 않지만 백제 땅에 세워진 통일신라시대의 사찰로, 그 배치구조가 특이하며 이외에도 또 다른 3기의 탑과 석비, 귀부, 석축, 초석 등 많은 석조유물이 남아 있다.


탑을 받치고 있는 기단(基壇)은 2단으로 되어 있으며, 기단 맨윗돌에 1층 탑몸돌을 괴기 위한 별도의 받침돌을 두어 고려석탑으로 이어지는 새로운 양식을 보여준다. 3층을 이루는 탑신(塔身)의 1층 몸돌 남쪽 면에는 짐승얼굴모양의 고리 1쌍을 조각하였다. 지붕돌은 밑면에 4단씩의 받침이 있으며 네 귀퉁이는 경쾌하게 약간 치켜올라갔다. 꼭대기에는 탑의 머리장식이 남아 있지 않고, 장식을 받쳐주던 네모난 받침돌(노반)만 놓여 있다.


1971년 해체 ·수리 당시 1층 몸돌에서 네모난 사리공을 발견하였으나 그 안에 향나무 썩은 가루와 먼지만 남아 있었다고 한다. 함께 위치한 다른 두 탑에 비해 너비가 넓어 장중한 느낌이 드는 탑으로, 기단이나 지붕돌의 양식으로 보아 통일신라 후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문화재청자료*

 

성주사지동삼층석탑(聖住寺址東三層石塔)

시도유형문화재 제26호(보령시) 

성주사터에 남아 있는 4기의 석탑 중 하나이다. 금당터 뒤에 나란히 서 있는 3기의 석탑 중 가장 동쪽에 있는 것으로, 2층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형태이다.


탑의 토대가 되는 바닥돌은 4매의 석재로 이루어져 있다. 아래 ·위층 기단은 각각 네 모서리와 면의 가운데에 기둥모양의 조각을 두었다. 위층 기단의 맨 윗돌과 탑신의 1층 몸돌사이에는 별도의 돌을 끼웠으며, 탑신의 몸돌과 지붕돌은 각각 하나의 돌로 쌓아 올렸다. 각 층의 몸돌은 모서리마다 기둥모양을 새겼고 1층 몸돌의 남 ·북면에는 자물쇠모양과 한 쌍의 고리모양을 도드라지게 조각했다.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이 각 4단이며, 처마는 수평을 이루다 네 귀퉁이에서 살짝 위로 들려 있다.


통일신라 후기 절을 새단장했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이 탑 역시 이 시기에 세운 것으로 여겨진다. 
*문화재청자료*

 

 

 


이처럼 세 쌍둥이 탑이 있는 것은 달리 알려진 바가 없으니 몹시 신비한 느낌을 갖게 된다
이 세 탑의 성격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얘기되었다
낭혜화상의 비문은 있으나 정작 그 부도가 발견되지 않았는데 반면에 다른 비의 파편 두 종류가 발견되어
어떤 사람들은 이 삼층석탑이 탑의 형태로 지어진 부도가 아니겠는가 하기도 했다
그러나 부도밭이 법당 뒤편에 나란히 줄 선 보기가 없고 정작 부도비와는 멀리 떨어져 있으니
이런 생각은 널리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또 근처에서 발견된 다른 부도비 조각은,
낭혜화상비에 적힌'金立之撰 聖住寺址' 곧 성주사를 중창할 때에 세운 사적비로 추정되기도 한다
도 1974년에 밝혀진 『숭암산 성주사 사적』에는
이 세 탑이 정광(定光),약사(藥師),가섭(迦葉) 세 여래의 사리탑이라고 적혀 있다


서탑과 가운데 탑은 각각 보물 제 47호와 제 20호이고 동탑은 무슨 연유에서인지 모르지만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 26호로 지정되었다
모습은 다 엇비슷하지만 높이는 조금씩 달라서 서탑이 4m.가운데 탑이 3.7m이고 동탑이 4.6m로 가장 크다
*한국문화유산답사회 지음 '답사여행의 길잡이'중에서*

 

 

 

 

 

성주사절터 동쪽 한켠에는 하반신의 일부가 땅에 묻히고 얼굴도 깨져

시멘트로 땜질해버려 본래의 모습을 알 수 없는 석불입상이 있다

시멘트 땜질 덕분에 전체적인 인상이 일그러져 보이지만

석불을 자세히 살펴보면

목에는 삼도가 뚜렷하고 법의가 어깨에서 배까지 U자로 부드럽게 흘러내리고 있다

오른손은 내리고 왼손을 배에 대고 있는데 손의 일부도 깨져 있다

지금은 마을 사람들이 미륵으로 모시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