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바람처럼 떠나다

보령 성주사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聖住寺郎慧和尙白月葆光塔碑).충남 보령 본문

☆~ 풍경소리/충 남

보령 성주사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聖住寺郎慧和尙白月葆光塔碑).충남 보령

푸른새벽* 2007. 11. 18. 20:26

 

 

 

 

 

 

 

 

 

 

 

 

낭혜화상부도비(聖住寺址朗慧和尙浮屠碑)


절터 서북쪽 석축 앞에 한 전각이 있는데
그 안에 성주산문의 개창조사인 무염국사(無染國師.801~888)의 부도비가 있다
국보 제8호인 이 부도비가 '대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郎慧和尙白月葆光塔碑)'이다


혜화상은 신라 하대의 고승이다
낭혜는 돌아간 뒤에 붙은 시호이며 탑호가 백월보광이다
태종 무열왕의 8세손으로 어려서부터 신동 소리를 들었는데 열 세살에 설악산 오색석사에서 출가하였다
처음에는 부석사에서 석징(釋澄)으로부터 화엄경을 배웠는데,
스물한 살 때인 헌덕왕 13년(821)에 당나라에 갔을 때 그곳에서는 선종이 한창 널리 퍼지고 있었으므로
선수행에 몰두하였다
그의 깨달음이 깊어 당시에 당나라의 여만선사는
"내가 많은 사람을 만나 보았지만 이와 같은 신라 사람은 아직 본 적이 없다
뒷날 중국이 선풍(禪風)을 잃어버리는 날에는 중국사람들이 신라고 가서 선법을 물어야 할 것이다"하면서
칭찬하였다 한다
깨침을 가지고 중국 곳곳을 다니며 가난한 사람들을 보살펴 '동방대보살(東方大菩薩)'이라 불렸다
마침내 당나라에 유학한 지 25년 만인 문성왕 7년(845)에 귀국하여
김양의 권고로 웅천 오합사(烏合寺)의 주지가 되었다


김양은 당시 웅천(지금의 보령)지방에 자리잡고 있던 호족이었고,
무염은 그 조부대까지는 진골이었으나 아버지대에 이르러서는 6두품으로 신분이 하강된 상태였으니
이 두사람은 당시 사회의 모순에 직면하고 있던 계층의 대표자이기도 했다
무염은 현실과 유리된 교리에 빠져 있던 교종을 비판하여 말을 매개로 하거나 이론에 의존하지 않고
곧바로 이심전심(以心傳心)하는 것이 올바른 길이라고 하는 '무설토론(無舌吐論)'을 주장하였다
무염의 혁신적인 사고방식은 많은 이들의 호응을 받았으니
무염이 성주사에 자리를 잡자 그를 따르는 제자는 2천 명에 이르러 선문 가운데 가장 번성하였고
이들이 뒷날 선종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인 성주산문을 이루었다


입적은 88세 때인 888년의 일이다
돌아간 지 두 해 뒤에 부도와 비를 세웠으니 이 비는 진성여왕 4년인 890년에 세워졌다
신라 명문장가인 고운 최치원(孤雲 崔致遠)이 글을 짓고 그의 사촌동생인 최인곤(崔仁滾)이 글씨를 썼다


이 비는 높이 4.55m.폭 1.57m.두께 42cm로 신라 부도비 중에서 가장 크다
거북의 얼굴 부분은 좀 상했지만 비신을 그대로 갖추고 있고 거의 완전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머리 위쪽에 뿔이 하나 솟고 눈이 불거졌으며 입은 약간 벌리고 있다
등에는 이중의 육각무늬가 선명하다


등 한가운데에 있는 비좌에는 안상이 새겨져 있는데
그 안에 꽃무늬와 구름무늬가 도드라져 있어 화려한 맛을 낸다
비신은 성주산이 그 주산지인 남포 오석으로 되어 있으며
비신 높이만도 2.63m이고 최치원이 지은 비문은 5천자에 이른다
비머리에는 연꽃받침 위에 구름과 용이 뒤엉켜 화려하게 조각되어 있으며
제액 윗부분에도 아래의 거북머리와 같은 방향으로 용머리가 하나 솟아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 비는 규모가 큰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조각이 화려하고 뚜렷한 점에서도 신라 하대 부도비 가운데에서 최고 수준을 보여 주다고 할 만하다
*한국문화유산답사회 지음 '답사여행의 길잡이'중에서*

 

 

 

 

 

 

성주사지 낭혜화상부도비(聖住寺址朗慧和尙浮屠碑).

 

부도비가 모셔진 전각 옆에는 연화대석과 부도의 지붕돌 조각들이 짝이 맞지 않은 채로 놓여 있다
생김새로 보아 부도 조각임이 분명한데 1968년에 인근 마을 사람의 집에서 찾은 것들이다
팔각원당형을 이루고 연꽃 조각이 두툼한 것으로 보아
나말여초 부도의 형식을 갖추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숭암산 성주사 사적』에 따르면
"대낭혜화상백월보광탑은 서쪽 기슭(西麓)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으므로
부도조각이 있던 자리와 사적기의 내용이 맞아떨어지기는 한다
그러나 이 부도 조각의 추정 복원 높이가 2.5m 쯤 되는데,
4.5m가 넘는 비에 견주어 그 반도 안되기 때문에 짝이 어울리는가 하는 견해도 있으므로
이것이 낭혜화상 부도의 부분인지 또는 다른 부도의 조각인지는 확정할 수 없다
*한국문화유산답사회 지음 '답사여행의 길잡이'중에서*

 

성주사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聖住寺郎慧和尙白月光塔碑)


국보 제8호 
충남 보령시 성주면 성주리 80-2 


성주사터에 남아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승려 낭혜화상 무염(無染)의 탑비이다. 낭혜화상은 무열왕의 8세손으로, 애장왕 2년(801)에 태어나 열세 살 되던 해에 출가하였다. 헌덕왕 13년(821)에 당나라로 유학하여 수도를 통해 깨달음을 얻게 되었고 문성왕 7년(845)에 귀국하여 당시 웅천(지금의 보령)에 있던 오합사(烏合寺)의 주지가 되었다. 이 절에서 선(禪)을 널리 알리어 절이 점점 크게 번성하게 되자, 왕은 ‘성주사’라는 절 이름을 내려주었으며, 진성여왕 2년(888) 89세로 이 절에서 입적하니 왕은 시호를 ‘낭혜’라 하고, 탑 이름을 ‘백월보광’이라 내리었다.


절터 서북쪽에 세워진 이 비는 거북 모습의 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우고 그 위로 머릿돌을 얹은 모습으로, 받침돌이 심하게 부서진 채 흙에 묻혀 있던 것을 1974년에 해체·보수하였다.


얼굴의 일부분이 깨져 있는 거북은 머리 위쪽에 둥근 뿔이 나 있고, 뒤로 째진 눈에는 눈썹이 휘말려 있으며, 입은 마치 불을 내뿜으려는 기세이다. 등에는 선명한 이중의 육각무늬를 새기고, 중앙에는 제법 굵직한 구름무늬가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구름무늬 위로는 비몸을 꽂아두는 네모난 홈을 높게 마련하여 각 면을 장식하였다. 길다란 비몸은 앞면에만 비문을 새기고, 위쪽 양 모서리를 둥글게 깎아 놓았다. 맨 위에 올려진 머릿돌은 밑면에 연꽃을 두르고, 그 위로 구름과 용이 서로 뒤엉킨 장면을 입체적으로 조각하였는데, 힘찬 용틀임과 웅장한 기상이 잘 나타나 있다. 앞면에는 받침돌의 거북머리와 같은 방향으로 용머리가 툭 불거져 나와 있어 흥미를 자아낸다.


비문에는 낭혜화상의 업적이 자세히 적혀 있는데, 진골이던 낭혜화상의 가문이 아버지 대에 이르러 6두품의 신분으로 낮아지는 대목도 나타나 있어 당시 신라골품제도의 연구자료로서도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최치원이 글을 짓고 그의 사촌인 최인곤이 글씨를 썼으며, 비를 세운 시기는 적혀 있지 않으나, 낭혜화상이 입적한 지 2년 후인 진성여왕 4년(890)에 그의 사리탑을 세웠다는 기록이 있어 이 때 비도 함께 세웠을 것으로 본다.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탑비 중에서 가장 거대한 풍채를 자랑하며, 화려하고 아름다운 조각솜씨가 작품속에서 유감없이 발휘되어 통일신라시대 최고의 수준을 보여주고 있다.
*문화재청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