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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처럼 떠나다

화순 벽나리 민불(대리석불입상大里石佛立像).전남 화순 본문

☆~ 풍경소리/전 남

화순 벽나리 민불(대리석불입상大里石佛立像).전남 화순

푸른새벽* 2008. 3. 5. 10:27

 

 

 

 

 

 

 

 

 

 

 

 

화순 벽나리 민불(대리석불입상大里石佛立像)


벽나리민불은
찻길에서 보면 뒷모습이 마치 선돌처럼 생겼다
앞으로 돌아가 그 얼굴에 눈을 주는 순간,
보는 사람의 마음에는 천진한 아이를 보는 듯한 편안함이 자리잡는다
동그란 맨머리에 눈시울이 길고 편안한 눈,몽실한 코,부드러운 뺨과 턱,순하게 웃는 작은 입,
부드럽고 도톰한 귓바퀴가 전체적으로 수줍어하는 듯하면서도 은근한 호의를 드러내고 있다
경외감을 자아내거나 위엄을 갖춘 것이 아니라 친근하고 해맑은 인상을 지녔다


몸에는 두 어깨를 감싼 긴 옷을 입고 있으며 두 손으로 연꽃 줄기를 들고 있다
얼굴 부분은 얕게 돋을새김되었고 어깨 아래에는 옷주름과 연꽃을 든 두 손이 선각되었다
이 모든 것은 앞면에만 새겨져 있고 뒤나 옆에서 보면 위쪽이 둥글게 마무리된 돌기둥으로 보인다
삼도나 백호가 표현되어 있지 않고 돌기둥과 같은 느낌을 주기 때문에 장승으로 생각되기도 하는데
마을 사람들은 이것을 미륵이라고 부른다


이 같은 신앙조형물이 만들어진 것은 대체로 조선 후기의 일이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같은 격동을 겪은 후
전반적인 생산력 발달로 인해 점차 변화의 조짐을 배태하던 이 시기에 민중의 마음을 끌어 안은 것은
이니 유교 도덕도 아니었고 어려운 경전을 설하는 산중불교도 아니었다
그들은 바로 자기들의 삶의 터에 마음을 의탁할 신앙물을 만들어 세웠다
이것은 법당 연화대좌에 근엄하게 앉아 있던 부처를 자기들이 사는 곳으로 이끌어 오고
또 아득한 시절부터
자기들 속에 이어져 오던 여러 가지 신앙과 생활을 거기에 가미하고 통합하는 과정의 결과였다
그러니 이러한 신앙물이 불상인지 장승인지를 애써 가릴 필요는 없을 듯하다


민불(돌미륵)의 규모는 높이4m에 폭이85cm,두께가 45cm 가량된다
이만한 것을 세우자면 상당한 체력과 인력이 필요했을 터이다
그것을 감당할 만큼 절실한 요구가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민불이 선 곳과,
민불에서 100m쯤 떨어진 느티나무 한 그루가 서 있는 곳에서 예전에는 동제를 지냈다고 한다
지금은 철도를 사이에 두고 마을과 민불이 서로 갈린 채,동제를 지내던 것은 아득한 옛일이 되었다


민불의 해맑은 얼굴은 비가오나 바람이 부나 변함이 없고,
근처 논에서 일하던 마을 사람들은 이곳에 와서 쉬거나 참을 먹는다
반질반질하게 손때 묻은 만만한 걸상처럼,이제 이곳은 마을 사람들의 몸과 마음을 달래는 쉼터가 되고 있다
*한국문화유산답사회 지음 '답사여행의 길잡이'중에서*

 

화순대리석불입상(和順大里石佛立像)


문화재자료 제243호(화순군)
전남 화순군 화순읍 대리 335 


이 석불은 돌기둥에 가까운 자연석을 사각형으로 대충 다듬은 뒤 앞쪽에 얼굴부분만 돋을새김을 하고 나머지 턱 밑으로 내려온 동체부분은 선각으로 처리하였다. 주변의 지형을 살펴보면 절터로 추정할 만한 건물지 또는 이와 유사한 유구를 발견할 수 없다. 다만 동쪽으로 약 500m 떨어진 평지에 이 고장 출신인 진각국사(송광사 16국사중 제2세) 탄생설화와 관련된 학서정이 있다.


석불의 상호는 사각형에 가까우며 육계는 나타나지 않았고 삼도(三道)도 없다. 예리한 눈썹과 눈, 장승에서나 볼 수 있는 넓적한 코, 입은 호형을 그린 일자형을 하고 있다. 턱과 목이 구분되지 않고, 또 목부분이 바로 어깨로 연결되는데 이러한 기법은 조선시대 후기 석장승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양식이다.


옷 주름은 매우 형식화 되었으며 오른손은 가슴 앞에 대고 왼손은 배 아래로 내려 연꽃을 들고 있다. 이 석불의 도상적 특징을 보면 보살상이다. 두 손에 연꽃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보아 관세음보살로 볼 수도 있겠으나 보관이 없어 분명치 않다. 머리 윗부분에 육계를 생략하고 민머리로 처리한 것을 보면 지장보살일 가능성도 있다.


그리고 이 석불이 위치한 장소가 옛날 보성과 화순을 지나는 길목으로 통행인이 빈번한 곳으로서 사찰에서만 볼 수 있는 불상을 길거리에서도 쉽게 대함으로써 개인의 기복과 동리의 안녕을 비는 불상 즉, 민불(民佛)로 불리어진다는 데 의의가 있다. 이는 조선시대 후기 불교와 민간신앙이 습합된 예라 할 것이다.


화순 대리 석불입상은 민간신앙과 관련된 조선후기(18∼19세기) 석불로서 불교문화와 신앙, 민간신앙과의 습합 등의 측면에서 볼 때 학술적·역사적 가치가 있다. 
*문화재청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