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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순 영구산 운주사 1 (靈龜山 雲住寺).전남 화순 본문

☆~ 절집.절터/전 남

화순 영구산 운주사 1 (靈龜山 雲住寺).전남 화순

푸른새벽* 2008. 3. 5. 16:42

 











 






 

 











 






 

 






 











 






 






 

 











 






 

 











 






 

 











 






 

 

 









 

 











 






 

 

 영구산 운주사(靈龜山雲住寺)

 

전남 화순군 도암면 대초리 20번지


운주사에는 천왕문이 없다.사천왕상도 없다.일반적인 절집의 형식 같은 것은 아예 찾아 볼 수가 없다.울타리도 문도 없는 천불산 다탑봉 아래 남북으로 뻗은 완만한 골짜기 안에는 탑과 돌부처만이 즐비하다.


흔히 '운주사 천불천탑'이라 하여 유명한 곳이지만 지금은 석탑 12기와 석불 70여 기만이 남아 있다.1942년까지만 해도 석탑은 30기,석불은 213기가 있었다고 한다.그보다 훨씬 앞서 조선 성종 12년(1481)에 처음 편찬되고 중종 25년(1530)에 증보된 『동국여지승람』의 능성현(綾城縣)조에는"운주사는 천불산에 있다.절의 좌우 산마루에 석불과 석탑이 각각 1000개 있고,또 석실이 있는데 두 석불이 서로 등을 대고 앉아 있다"라는 기록이 있다.


오랜 세월 동안 부근에 사는 사람들은 별 생각 없이 이곳의 탑이나 불상을 헐어다가 묘지 상석을 만들기도 하고 주춧돌,섬돌로 쓰거나 축대를 쌓는데 썼고,때로는 통째로 다른 곳으로 옮겨가기도 했다고 한다.


입구의 구층석탑에서 골짜기 안쪽의 항아리탑에 이르기까지,크기도 모양도 다양한 탑들은 골짜기 한가운데 줄지어 서 있고 양쪽 산등성이를 따라서도 드문드문 서 있다.크고 작고,서거나 앉은 불상들은 골짜기 바닥에 앉기도 하고 양쪽으로 이어진 바위벽에 무리무리 기대어 있거나 산등성이 곳곳에 흩어져 이끼를 입고 있다 .때로는 머리만 남거나 몸통만 남기도 했으며,대웅전 뒤편 구석에서 무릎 아래 자잘한 자갈탑들을 거느리고 있기도 하다.골짜기 가운데쯤에 있는 돌집 안에는 불상 두기가 등을 맞대고 앉아 있고,대웅전 오른편 산등성이에는 거대한 불상 두 기가 나란히 누워 있다.이 운주사 '와불'들은 실제로는 와불이 아니라 미처 일으켜 세우지 못한 부처들이다.손의 모양으로 보아 각각 비로자나불상과 석가여래불입상이다.이들이 일어나는 날 세상이 바뀐다는 설화가 후대에 생기기도 했는데,애초의 의도대로 이 거대한 불상들을 세웠더라면 단연 운주사의 중심불이 되었을 것이다.


운주사의 탑과 불상들의 모습은 그 위치만큼이나 매우 특이하다.정림사탑이나 석가탑 등 균제된 형식을 갖춘 석탑,원만하거나 위엄이 가득한 상호와 몸매를 가진 불상만을 보아 온 사람들은 운주사의 탑과 불상 앞에서 아연함에 가까운 충격을 느끼게 된다.대부분 자연적인 바위를 기단으로 삼아 세워진 탑들은 3층,5층,7층,9층 등 층수도 다양하고 모양도 완전히 정형을 벗어나 원반이나 항아리 모양의 돌을 쌓아 올린 것도 있다.


12m에 이르는 커다란 것에서부터 수십 cm정도의 작은 것에 이르는 불상들은 대체로 기름한 콧날만이 조금 도드라졌을 뿐 눈과 입이 선에 가깝게 표현된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다.몸 전체가 납작한 돌기둥 모양이고 팔다리의 비례가 제대로 맞지 않으며,두 어깨에서 흘러내린 옷주름도 도식화되어 규칙적인 선으로 표현되었다.얼굴이나 몸매에서 부처의 위엄 같은 것은 찾아볼 수가 없다.손은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이나 소맷자락에 두 손을 마주 넣은 듯한 모습도 있지만 대체로 지권인(智拳印)을 표현한 듯한 모습을 하고 있다.


공사바위 아래의 마애불이나 산등성이에 누워 있는 두 부처,돌집 안에 있는 부처들 처럼 각기 독자적인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불상들은 미미하게나마 정형성의 요소를 지녔다.그러나 전체적으로 볼 때 불상 하나하나의 개성은 무시해도 좋을 정도이다.


이러한 불상과 탑들은 그 양식으로 보아 대체로 12~13세기 고려 시대에 제작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고려 시대에는 불상에 있어서 운주사 불상들과 유사한 형태의 지방화된 양식들이 대거 출현했으며 또 탑에 있어서도 기존의 틀을 벗어나 육각이나 팔각 또는 원형탑들이 건립되었다.


이 골짜기에 돌부처를 무리로 세워 자신들의 기원을 새겨 넣은 것은 어느 때 누구였을까.그리고 그 기원의 내용은 무엇이었을까.운주사을 둘러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품게 되는 의문이다.


가장 널리 펴져 있는 것은 도선국사와 관련되 풍수비보설이다.도선이 우리 나라의 지형을 배의 형상으로 보고,배가 안정되기 위해서는 선복(船腹)에 무게가 실려야 하므로 선복에 해당하는 이곳에 천불천탑을 세웠다는 것이다.또는 영남 쪽에 산이 많고 호남에는 적으므로 배가 동쪽으로 기울어 땅의 정기가 일본으로 흘러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도술을 써서 하루만에 천불천탑을 세웠다고도 한다.그러나 운주사 유적들이 12~13세기의 양식을 보이는 데 비해 도선국사는 훨씬 전인 9세기에 살던 인물이니만큼 연대가 맞지 않는다.이는 풍수설이 민간에까지 유행하던 후대에 덧붙여진 설일 것이다.


풍수비보설 못지 않게 널리 펴져 있는 설은 미륵신앙과 관련된 것이다.주로 운주사 부처들의 파격적이고 민중적인 이미지에서 뒷받침을 얻은 것들로,이곳을 반란을 일으킨 노비와 천민들이 미륵이 도래하는 융화세계를 기원하며 신분해방운동을 일으켰던 일종의 해방구로 추정하고 그들의 염원으로 천불천탑이 이루어졌다고 보는 것이다.


운주사와 미륵사상이 융합된 것은 창건 시기보다 훨씬 후대인 조선 후기,즉 미륵신앙이 광범위하게 유포되었던 때로 보아야 할 것이다.
더구나 천불천탑 불사에는 상당한 재력이 필요했을 것이니 천민들만의 힘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은 객관적 조건을 무시한 추정일 것이다.
천민들만의 힘에 의한 미륵도량설은 특히 변혁에의 열망이 컸던 80년대에 여러 경로를 통해 널리 퍼졌다.궁금함이 클 때 사람들은 전설이나 나름의 근거를 담은 해석을 만들어 내지만,그 과정에서 이렇게 객관적 사실을 떠나 설명하는 사람 자신의 시대가 투영되기도 한다.


어떤 이는 운주사에서 밀교적 색채를 읽어 내기도 한다.운주사에서 출토된 수막새 기와에 '옴마니반메훔'이라는 진언이 범어로 양각되어 있는 것,돌집 안에 있는 두 부처를 밀교적인 음양불로 볼 수 있다는 것,돌부처들이 대부분 지권인을 하고 있는 것,또 일천불을 조성하여 모시는 천불신앙이 밀교에서 널리 믿어졌다는 것 등이 그 근거이다.


또 하나,천불천탑이 몽고 침략기에 조성되었다는 설이 있다.13세기 고려 고종 연간은 최씨 무신정권이 절정에 달했던 시기이면서 몽고의 침략에 시달리던 때였다.당시 고려는 매일이다시피 각종 기도 도량을 베풀고 몽고군이 불태워 버린 대장경을 다시 간행하는 등 불교를 중심으로  민심을 모아 몽고군을 물리치려 했다.고종 25년(1238),몽고군은 고려인들의 저항의식을 무너뜨리기 위해 신라 이래 호국과 퇴병멸적(退兵滅敵)을 기원하는 인왕백고(仁王百高)도량 이었던 황룡사을 대신할 인왕도량을 급히 만들었으니 이것이 운주사라는 것이다.


이렇게 단기간에 많은 부처를 조성할 수 있었던 것은 이 부근의 암반이  켜켜로 떨어져 나오는 성질을 가졌기 때문이다.석불들이 모두 앞뒤가 납작한 것이 이를 반영하며, '와불' 바로 옆에는 그 아래 비탈에서 서 있는 머슴부처를 따낸 자국이 또렷이 있다.또 근처 산비탈 바위에 돌을 따낸 자국이나,따내기 위해 구멍을 뚫어 놓은 것을 볼 수 있다.


운주사에 대한 발굴조사 등 실제적인 연구는 상당히 늦게서야 이루어졌다.1984년부터 네 차례에 걸친 전남대박물관의 발굴조사에서 운주사 본래의 절터는 현재 대웅전이 있는 곳이 아니라 훨씬 아래쪽,지금 주차장이 있는 곳 위의 밭 근처였음이 밝혀졌다.10~11세기의 것으로 �어되는 해무리굽 청자조각과 순청자 접시조각,금동여래입상 등이 출토됨으로써 운주사 창건 시기가 고려 초기까지 소급되게 되었고,고려 중기의 상감청자조각과 14~15세기의 청자조각이 상당히 많이 발굴됨으로써 고려 시대 전반에 걸쳐 매우 번창했음을 알 수 있다.


또 '운주사 환은천조,홍치 8년(雲住寺 丸恩天造 弘治八年)'이라고 적힌 암막새 기와가 나와서,원래 절 이름이 運舟寺가 아니라 雲住寺라는 것과 연산군 1년(1495)에 중창된 적이 있음이 밝혀졌다.1632년에 간행된 『능주목지(綾州牧誌)』에 "운주사는 지금 폐찰되었다"라고 한 것을 보면, 임진왜란 때 절이 소실된 것으로 추정된다.한편 1989년 조사에서는 석탑들 가운데 두 기에서 사리공이 발견 되었다.


임진왜란으로 폐찰된 후 논밭으로 변했던 운주사터에,1918년에 인근 사람들의 시주로 허름한 건물이 중건되었고 근래에 번듯한 대웅전이 새로 지어졌다.절 주변이 사적 제312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입구 쪽에 있는 구층석탑과 중심부의 석불감쌍배불좌상,그 뒤에 있는 원형다층석탑이 각각 보물 제796.797.798호로 지정되어 있다.
*한국문화유산답사회 지음 '답사여행의 길잡이'중에서*



 

 *운주사 전경

절 뒤편의 공사바위에 오르면 운주사 일대가 한눈에 들어온다

 

 *운주사 구층석탑

운주사 입구에 서 있다

높이 10.7m로 운주사 석탑 가운데 가장 높으며 커다란 암반으로 지대석을 대신했고

새겨진 무늬가 특이하다

조성 수법으로 보아 고려 후기 작품으로 추정된다

보물 제796호이다

 

*광배가 있는 돌부처

불꽃무늬가 가득 새겨진 광배를 두른 부처로,운주사에서 보기 드문 모습이다

 

*운주사 마애여래좌상

공사바위 아래 암벽에는 이목구비가 비교적 반듯하고 불꽃무늬 광배가 있는 등

어느 정도 격식을 갖춘 불상이 새겨져 있다

운주사의 수많은 불상 중 유일한 마애불이다

(사진솜씨 시원찮은 탓에 마애불의 모습이 희미하게 보인다)

 

*운주사 입구의 불상들

구층석탑 옆 양지바른 곳에서 해바라기라도 하는 듯 다정한 모습으로 서 있는 돌부처 가족들

 

*석불감쌍배불좌상

골짜기 중심부에는 팔작지붕에 용마루와 처마가 모각된 돌집 안에 석불 두 기가 등을 맞대고 앉아 있다

남향한 불상은 결가부좌하고 오른손을 배에 댔고 북향한

북향한 불상은 옷 속에서 두 손을 모아 지권인을 취한 것으로 여겨진다

고려 시대의 지방화된 불상양식을 보이는 것으로 보물 제797호로 지정되어 있다

 

*운주사 원형다층석탑

석불감쌍배불좌상 북쪽에 있는 높이 5.71m의 탑이다

십각의 기단면석을 제외하면 모든 부재가 원형이다

갑석에 16엽 앙련을 새겼고 1층 지붕돌 아래에 두 줄,2층 이상에는 한 줄의 선을 새겨 놓았다

도넛탑,호떡탑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

 

*운주사와불

흔히 와불이라 불리지만 미처 일으켜 세우지 못한 불상이다

이 와불이 일어서면 세상이 바뀐다는 설화가 후대에 만들어지기도 했다

 

*눈이 많이 내리는 날 다시 가보리라 작정하고 있는 운주사

하지만

지금까지 작정만 하고 있다

2년 전 여름 운주사를 찾았었고 그 때 운주사를 다 돌아보지 못했었기에 아쉬움 그득한 절집이다

대충 메모만 해 두었던 운주사에 대한 기록을 오늘 다시 정리해보았다

이 엄동설한에 내 수첩에서 만나는 운주사는 푸르고 밝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