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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 문수원정원(文殊院庭園).강원 춘천 본문

☆~ 풍경소리/강 원

춘천 문수원정원(文殊院庭園).강원 춘천

푸른새벽* 2008. 3. 30. 23:56

 

 

 

 

 

 

 

 

문수원정원(文殊院庭園)


청평사에서 눈여겨보아야 할 부분이고 새삼 신선한 감동을 주는 문화유산이청평사의 고려정원(高麗庭園)이다.사찰문화와 자연정원이 만나 도량의 면모를 새롭게 가꾸고 변모시키는 예로 청평사가 보여주는 특별 보너스다.


청평사의 고려정원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정원으로 이자현이 문수원에 머문 1089~1125년 사이에 만든 것이다.아지현은 이곳에서 머물면서 입적할 때까지 약 37년 동안 불도를 닦는 틈틈이 절을 고치고 여러 전각과 정자를 새로 지었으며 견성암.선동암.식암 등 여덟 암자를 세워 사찰 경내를 거의 완벽하게 확장하였다.


이자현은 다음으로 문수원이 들어앉은 오봉산 자락 전체를 사찰 경내로 삼아 눈길을 돌린다.그리하여 청평사 들목의 구성폭포에서 오봉산 정상 바로 아래 식암(息庵)언저리까지 3km에 이르는 방대한 지역의 계곡 구석구석으로 이어지는 고려 선찰의 '계획된'정원이 펼쳐진다.


지금은 거의 자연에 묻혀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 곳이 얼마 안되지만 방대한 규모의 문수원 정원은 조사 연구한 바에 따라 동서남북의 네구획으로 나뉜다.저 아래 구성폭포 일대의 적석(積石)과 연못.인공석실.정자터로 꾸며진 서쪽 냇가의 중원(中苑),복회암과 연못.동굴석실.좌선대(座禪臺) 2기,항상 물이 가득 담긴다는 수만식(水滿式)돌정원 주변이 남원(南苑),동쪽의 작은 계곡을 중심으로 정자와 소규모의 적석군(積石群)이 동원으로 구성되었다.


북원(北苑)은 청평사 왼쪽 계곡을 타고 위쪽으로 올라 지금의 해탈문을 지나 만나는 가파른 선동(仙洞)과 인공 석산(石山),오봉산 정상아래 지금 적멸보궁이라 부르는 아스라한 인공 석실(石室)과 그 왼편 바위에 이자현이 새긴 각자 '淸平息庵',그 주변의 좌선대와 돌계단 등가히 선경(仙景)을 이루는 이 일대를 말한다.이자현은 웬만한 사람들은 올라와보지도 못하는 이곳 높은 북원에서 주로 선도(禪道)를 닦았다.


이자현은 그렇게 자연경관을 최대한 살려 계곡에 수로를 만들고,물길을 끌어들여 정원 안에 영지를 만들어 오봉산이 비치게 했으며 물레방아를 돌렸다.오봉산 정상으로 올라가면서는 높고 가파른 돌로 쌓고 다듬어 선도량과 암자의 수도 분위기에 걸맞게 도량 전체를 하나의 자연숲으로 절묘하게 가꾸었던 것이다.특히 청평사 문수원은 일본 교토(京都)에 있는 사이호사(西芳寺)의 고산수식(枯山水式)정원보다 200년이나 앞선 것으로 밝혀져 주목을 받는다 .


고려시대엔 송나라 산수원림(山水圓林)의 영향을 받아 궁원(宮苑)을 비롯해 민간에서도 종종 정원을 꾸몄다고 하나 남아 있는 구체적인 기록은 없다.다만 당대의 권력 귀족층이었던 김치양.이공승(李公升).최충헌.최우 등이 화려한 정원을 꾸미고 지냈다는 기록이 있다.그중에서도 기록상으로 보면 김치양의 정원이 가장 빠른 시대의 것인데,현재 흔적이 남아 있지 않아 이곳 문수원 정원이 당시의 형태를 알 수 있는 가장 오래된 정원으로 꼽힌다.


현재 이자현의 부도 오른쪽에 있는 영지(影池.南池)를 1981년 조사단이 지표발굴과 측량조사 했는데 이 연못은 "원형 그대로 보존돼 있는 전형적인 고려시대 연못인 영지"라고 밝혔다.영지 밑바닥에서 고려시대 백자편이 발견됐으며,못의 규모는 남북 19.5m,북쪽 호수 안이 16m,남쪽 호수 안이 11.7m로 뒤쪽이 약간 넓은 사다리꼴이다.이는 감상자의 시각을 배려한 것으로 추측되며,연못 속에 큰 돌 셋을 놓아둔 것은삼산의 봉우리를 상징한다.또 연못을 영지라 함은 물이 맑고 깨끗하여 아름다운 오봉산 부용봉(芙蓉峰)이 비치기 때문이다.여기서 400m쯤 떨어진 청평사 계곡 하류에서는 정원 조성용 암석과 석축이 발견되었다.


이자현은 청평사를 중건하고 정원을 만들면서 이 영지를 중심으로 대규모의 정원을 꾸몄던 것이다.누석식(壘石式)정원을 중심으로 영지와 정자,청각적 효과를 위한 수구식(水溝式)정원까지 도원,평지의 정원(平庭)과 계곡에 자리한 정원(溪庭),산속의 정원(山庭)등지형에 따라 다양한 형태의 정원을 마련해 수도하는 선원의 특색에 걸맞도록 꾸몄다.문수원 정원에 관한 이같은 기록들은 「청평사문수원기비(淸平寺文殊院記碑)」에서 밝혀진 것들이다.


문수원 정원으로 이름났던 이곳엔 당시 시인묵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으니 조선시대 학자 우담 정시한(愚潭 丁時翰)은 이곳 선동식암에서 여러 날을 묵으며 청평사의 모습을 감상하고 진락공 이자현의 유적을 두루 찾아 고풍을 추모했다고 그의 저서 『산중일기(山中日記)』에서 토로하고 있다.


이자현은 베옷 입고 나물밥 먹으면서 선(禪)을 하였고,『문수원기(文殊院記)』에서 "능엄경은 마음의 본 바탕을 밝히는 지름길"이라 기록할 정도로 『능엄경』을 독파해 불도를 깨달았다.예종은 종종 그를 서울로 청하였으나 한번도 응하지 않았으며,평생 수도생활로 일관하다가 청평사에서 생을 마감한다.
*한국문화유산답사회 지음 '답사여행의 길잡이'중에서*

 

 

 *청평사 초입에 있는 이자현의 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