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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 김제남신도비(金悌男神道碑).강원 원주 본문

☆~ 풍경소리/강 원

원주 김제남신도비(金悌男神道碑).강원 원주

푸른새벽* 2008. 2. 15. 23:12

 

 

 

 

 

 

 

 

 

김제남신도비(金悌男神道碑)


원주시 지정면 안창리 흥법사터 가는 길로 100m쯤 가면 수령 500년의 느티나무가 서 있고,
그 곁에 김제남 신도비(金悌男神道碑)가 있다
인조 2년(1624)에 세운 것으로 비신은 대리석을 썼는데,
훤칠한 키에 비신은 풍화에 얼룩이 지고 마모가 심해 내용을 알아보기 어렵다
키가 매우 큰 귀부와 이수는 썩 잘 된 편은 아니지만 조각이 생동감이 있다
특히 거북이 머리를 외로 돌려 자신이 받치고 있는 비신을 돌아보고 있는 게 사실적이다
이 비는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21호이다


조선시대에 많이 세워진 신도비는 이전의 부도비 양식에서 전승되었다
거북받침과 이무기지붕 형식,이것을 그대로 사대부의 신도비에 적용한 것이다
이는 사찰의 법당 앞 석등이 조선시대에 와서는 사대부 묘역의 장명등으로 발전한 예와 같다


김제남(金悌男.1562~1613)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연안.자는 공언,시호는 의민이다
1585년(선조 18)사마시에 합격하고 1594년의 의금부도사.공조좌랑을 거쳐 연청현감을 지내고,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했으며,1601년 이조좌랑이 되었다


1692년 김제남의 둘째 딸이 선조의 비로 뽑혀 인목대비가 되면서 김제남은 연흥부원군으로 봉해졌다
인목대비가 영창대군을 낳았으나 이미 공빈 김씨 소생인 광해군이 세자로 책봉되어 있었다


적통론(嫡統論)을 고집하며 정비 소생인 영창대군을 세자로 책봉하려던 유영경(柳永慶)은
선조가 급서하자 반대파인 대북정권에 몰락하고 만다
영창대군을 추대.옹립하려 했다는 이유로 무고를 받아 그의 아들 3형제와 함께 사약을 받고 처형되었다
이어 폐모론이 일어나면서 영창대군은 강화에 유폐되고,인목대비는 폐비가 되어 서궁에 유폐되었다
이제 겨우 여덟 살 된 유배지의 영창대군은
이듬해인 1614년,사람을 방에 가둔 채 불을 마구 때 죽이는 증살(蒸殺)을 당하고 만다


인조반정(1623)은 그 같은 패륜행위를 바로잡고자 일어났으며 인목왕후는 복호되어 인목대비가 되었다
김제남신도비는 제주도에 유배되었던 며느리 정씨와 손자 천석이 인조반정 후에 생환하고,
인조가 특명을 내려 그의 고향에 사당을 짓고 비를 세운 것이다
*한국문화유산답사회 지음 '답사여행의 길잡이'중에서*

 

김제남신도비(金悌男神道碑)


문화재자료 제21호(원주시) 
강원 원주시 지정면 안창리 산67-3 


신도비란 왕이나 고관 등의 평생업적을 기록하여 후세에 전하고자 그의 묘 가까이에 세워두는 것으로, 이 비는 조선시대 중기의 문신이자 선조임금의 장인이었던 김제남(1562∼1613) 선생을 기리고 있다.


선생은 선조 18년(1585) 사마시에 합격하여 관직활동을 시작하였고, 별시문과에 급제한 후에는 이조좌랑에까지 올랐다. 둘째 딸이 선조의 둘째 비인 인목왕후로 채택되자 연흥부원군에 봉하여졌다. 광해군 5년(1613)에는 인목왕후의 아들인 영창대군을 왕으로 추대하려 했다는 누명을 쓴 채 사약을 받고 세 아들과 함께 죽음을 당하게 되었다. 인조반정 후에야 명예가 회복되어 그를 위한 사당을 지었고, 이후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비는 거북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우고 머릿돌을 올린 구조이다. 받침돌의 거북머리가 비를 바라보듯 뒤를 향하고 있어 재미있는 모습이며, 머릿돌에는 구름 속을 헤치는 용의 모습이 가득 새겨 있다.


조선 인조 2년(1624)에 세운 비로, 왕의 명령으로 그의 사당을 지을 때 함께 세워두었다 한다. 
*문화재청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