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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 신복사터석불좌상(神福寺址石佛坐像).강원 강릉 본문

☆~ 풍경소리/강 원

강릉 신복사터석불좌상(神福寺址石佛坐像).강원 강릉

푸른새벽* 2008. 5. 28. 10:34

 

 

 

 

 

 

 

 

 

 

 

 

 

 

 

 

 

 


신복사터석불좌상(神福寺址石佛坐像)


삼층석탑 앞의 석불좌상은 탑을 향해 공양하는 모습으로 왼쪽 무릎을 세운 채 꿇어앉아 있다
왼팔을 무릎 위에 올리고 두 손을 모아 쥔 채 가슴에 꼭 붙이고 있는데,
손에 쥐고 있던 물건을 고정시킨 철기 등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


부드럽고 복스러운 얼굴은 웃음을 머금었고,입은 안으로 꼭 다물어 얇은 입술선만 남아 있다
눈썹은 초생달 같은 곡선을 이루고,어깨까지 내려오는 긴 귀 양끝에는 구멍이 뚫려 있다
귀걸이를 단 흔적이다
이마의 중앙에는 백호가 선명하게 찍혀 있다
목에는 삼도가 부드럽게 층을 이루며 선명히 새겨져 있다


원통형 관을 약간 뒤쪽으로 젖혀 쓰고,그 위에 다시 팔각 지붕돌을 이고 있다
이 석불좌상이 쓰고 있는 관의 높이가 월정사나 한송사터 석불좌상의 그것보다 약간 낮은 이유도
바로 이 지붕돌 때문에 생기는 높이를 감안했기 때문이다
원통형 관 정면에는 중앙에 하나,좌우에 각각 세 개의 구멍이 있고,
뒷면에는 중앙에 위아래로 하나씩,좌우에 대칭되게 두 개씩 모두 여섯개의 구멍이 있다
양쪽 옆면에도 여러 개의 구멍이 있는데 모두 장식을 달았던 구멍으로 여겨진다


그 밖에 관 밑에서 꼬여진 머리카락이 어깨너머로 길게 늘어져 있고
보관의 가장자리에도 스카프를 맨 듯 장식이 달려 있다
몸에도 목걸이,팔찌,숄처럼 두른 천의,그리고 천의를 묶은 세 줄의 띠가 장식되어 있다
신체에 표현된 천의의 휘늘어진 주름이 매우 아름답다


두 다리 사이의 옷자락에는 직경 약4cm의 금속제 기둥 같은 것이 두개 서 있는데,
지금은 구부러져 그 원형을 파악할 수 없다
석불좌상에는 원형의 대좌받침이 있어 이것을 안이 움푹한 연화대좌에 끼워 넣게 되어 있는데,
현재는 대좌받침과 연화대좌를 연결하는 역할을 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석불좌상이 앉아 있는 연화대좌는,
폭이 좁은 중대석 아래위로 각각 복련과 칭련이 조각된 모습이다


그러나 신복사터 석불좌상의 가장 큰 특징은 원통형 관 위에 이고 있는 팔각의 지붕돌이다
눈이나 비로부터 불상을 보호하기 위해 불상 위에 지붕돌을 씌우는 것은
고려 시대에 들어와 옥외에 불보살상을 조성하면서 유행했던 것이다
논산 관촉사나 부여 대조사의 석조보살이 각각 사각의 지붕돌을 이고 있으나,
팔각의 지붕돌을 이고 있는 예는 흔치 않다


지붕돌 안쪽에는 각 모서리마다 세 개의 구멍이 나란히 뚫려 있는데,
모두 장식을 달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원통형 관과 맞닿는 지붕돌의 원주위에는 연꽃잎이 둘러져 있어,
이 천개가 다른 석물의 지붕돌을 잘못 올려놓은 것이 아니냐는 의혹을 명쾌히 풀어주고 있다
높이는 1.81m이며,보물 제84호로 지정돼 있다
*한국문화유산답사회 지음 '답사여행의 길잡이'중에서*

 

신복사지석불좌상(神福寺址石佛坐像)


보물 제84호 
강원 강릉시 내곡동 403-2 


강원도 강릉시에 있는 신복사는 통일신라 문성왕 12년(850년)에 범일국사가 처음 세웠다. 신복사지 삼층석탑을 향하여 공양하고 있는 모습의 보살상을 표현하였는데, 왼쪽 다리를 세우고 오른쪽 다리를 꿇어 앉은 자세를 하고 있으며 두 손은 가슴에 모아 무엇인가를 잡고 있는 모습이다.


원통형의 높다란 관(冠)을 쓰고 있는 얼굴은 풍만한데다가 만면에 웃음을 띠고 있어 복스럽게 보인다. 관 밑으로 드러난 머리카락은 어깨너머로 길게 늘어져 있으며, 양 어깨에서부터 걸쳐 내져진 옷자락은 몸의 굴곡을 따라 자연스럽게 표현되어 보살상의 사실성을 더해준다. 팔찌, 목걸이, 옷주름은 굵은 띠처럼 묘사되었으며 전체적으로 둥글고 둔중한 조각수법을 보인다. 이러한 자세나 조각 솜씨는 월정사 팔각구층석탑앞의 공양보살상과 유사한 것으로 같은 지방 계열의 특징으로 여겨진다.


보살이 앉아있는 대좌는 윗면을 둥글게 하여 보살이 들어앉을 수 있도록 하였으며, 바깥쪽에는 큼직큼직하게 2겹의 연꽃잎을 조각하였다.


규칙적인 간격의 옷주름과 단순해진 장신구, 대좌의 조각수법 등에서 화려한 신라적 요소가 사라지고 고려 초기의 둔화된 표현 양식이 나타나고 있다.
*문화재청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