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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 보현사낭원대사오진탑비(普賢寺朗圓大師悟眞塔碑).강원 강릉 본문

☆~ 풍경소리/강 원

강릉 보현사낭원대사오진탑비(普賢寺朗圓大師悟眞塔碑).강원 강릉

푸른새벽* 2008. 6. 3. 07:25

 

 

 

 

 

 

 

 

 

 

 

 

 
보현사 낭원대사 부도비(普賢寺 朗圓大師悟眞塔碑)


사각의 지대석 위에 용머리 형상의 거북이를 얹고 그 위에 높은 비신을 세웠으며
용 네마리가 여의주를 놓고 다투는 모습을 실감나게 투각(透刻)한 이수를 얹은 전형적인 부도비의 모습이다


주목할 만한 것은 이수 중앙에 올려놓은 보주이다
탑의 상륜부에 해당하는 복발과 보륜 위에 화염에 싸인 보주를 얹었는데
마치 용 네마리가 이 보주를 여의주로 여기고 서로 차지하기 위해 다투는 형상이다


높이가 약 2m에 달하는 부도비의 꼭대기를 이렇듯 자세히 볼 수 있는 것은
이 부도비가 위치한 독특한 지형 때문이다
부도비 주위로 높은 석축이 있어서,석축 위에 올라가면 부도비를 내려다볼 수 있다
경내의 각 건물들은 이 석축 위에 조성돼 있다


비신에는 보현사를 창건한 낭원대사의 일대기를 적어 놓았다
낭원대사는 고려 태조 13년(930) 96세로 입적하였는데
태조가 이때 내린 시호가 '낭원(朗圓)이며,탑명을 '오진(悟眞)'이라 하였다
이 비는 낭원대사가 세상을 떠난지 10년 뒤인 태조 23년(940) 7월 30일에 세워졌으며
비문은 구족달(仇足達)이 썼다
*한국문화유산답사회 지음 '답사여행의 길잡이'중에서*

 

보현사낭원대사오진탑비(普賢寺朗圓大師悟眞塔碑)


보물 제192호
강원 강릉시 성산면 보광리 1171 보현사 


보현사에 남아 있는 낭원대사(834∼930)의 탑비로, 대사의 출생에서부터 경애왕이 대사의 덕을 기려 국사로 예우한 사실 및 입적하기까지의 그의 행적이 실려 있다. 대사가 96세로 입적하자 왕은 ‘낭원’이라는 시호와 '오진’이라는 탑이름을 내리었다.


비는 거북받침돌 위로 비몸을 세우고 머릿돌을 올린 모습이다. 용의 머리를 갖춘 거북받침돌은 등에 6각의 벌집 모양이 채워져 있고, 중앙에는 구름무늬로 장식한 높은 비좌(碑座)가 마련되어 있다. 머릿돌은 밑면에 연꽃을 새기고 그 위로 여의주를 다투는 두 마리의 용을 힘차게 조각해 놓았다. 꼭대기에는 석탑에서처럼 복발(覆鉢)과 1단의 보륜(寶輪)을 갖추고, 화염에 싸인 보주(寶珠)를 얹고 있어 특이한 모습이다.


대사가 입적한 지 10년 뒤인 고려 태조 23년(940) 세워진 비로, 비문은 당대의 문장가인 최언위가 짓고, 서예가인 구족달(仇足達)이 글씨를 썼다. 
*문화재청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