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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 객사문(江陵客舍門).강원 강릉 본문

☆~ 풍경소리/강 원

강릉 객사문(江陵客舍門).강원 강릉

푸른새벽* 2008. 6. 6. 20:51

 

 

 

 

 

 

 

 

 

 

 

 

 

 

강릉객사문(江陵客舍門)


강릉시청,우체국 등 관공서가 몰려 있는 강릉시 용강동에 역시 고려 시대 관청 건물의 일부였던
'객사문'이 남아 있다
객사문에서 걸어서 채 몇분도 안되는 가까운 거리에 조선 시대 관아였던 칠사당도 남아 있어
용강동 일대가 오래도록 행정의 중심지로 이어져왔음을 눈치 챌 수 있다


객사는 중앙에서 파견된 사신들이 이용하던 숙박 시설이다
객사 본전에는 국왕을 상징하는 전패('殿'이나 '闕'같은 글자나 용을 비롯한 상징적인 그림)를 모시고
관리들이 각종 의식과 더불어 유흥을 즐기기도 하였다


이러한 기능 때문에 객사는 통치 건물인 관아 건축과 주택 건축의 결합형이기 마련이었고
중앙에서 오는 사신과 관리를 위한 건물이었기에 해당 지방에서 제일 경치 좋은 곳에 세워졌다


강릉 객사의 일부인 객사문은 규모는 작으나 고려 주심포 건축의 정수로서
정연하고 아름다운 비례와 구조를 지니고 있어 한국 건축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일컬어진다
국보 제51호로 지정돼 있다


강릉 객사는 고려 태조 19년(936) 임영관이라는 이름으로 총 83칸이 건설되었다
'임영관(臨瀛館)'이라는 지금의 현판 글씨는
공민왕 15년(1366) 공민왕이 낙산사 가는 길에 들러 남긴 친필이다
이후 여러 차례 중수되어 오다가 1929년 일제강점기 때 강릉공립보통학교 시설로 이용되면서 헐리고
지금은 객사문만 남아 있다(2998년 5월의 객사문은 임영관과 부속건물을 새로지어 마무리 작업이 한창이었다)


객사문을 도로 쪽에서 바라보면 기단은 비교적 높고,
정면에 돌계단이 있으며 옆과 앞면은 잡석으로 석축을 만들었다
원래는 지금과 같은 석축 기단이 없었는데,일제강점기 때 객사문 앞쪽으로 도로를 내면서
언덕을 깎아 내림으로써 층이 생겼다


정면 3칸 측면2칸의 단순하면서도 강렬한 단층 맞배지붕 집이며
화려하면서도 날카로운 첨차 구성이 뛰어나다
주두와 소로에 굽받침이 있으며 공포에는 살미형 첨차를 두드러지게 사용하였고
단장혀로 외목도리를 받게 하였다


초석은 일률적인 형태를 갖지 않고 몇 가지 형태로 된 것을 다양하게 이용했다
기둥은 가운데 기둥에 3칸 판문을 달고 앞뒤로 기둥을 또 세웠는데
앞 뒤 줄 기둥에는 배흘림을 이용하고,판문이 달린 가운데 줄은 민흘림의 사각 기둥을 이용하였다
독립된 앞뒤의 기둥에 강한 배흘림을 주어 시각적으로 안정감을 주는 효과를 내고 있다
기둥 높이의 3분의 1 되는 지점이 가장 굵고 여기서 위아래 방향으로 차츰 줄어들어
위쪽에서 가장 가늘게 되는 배흘림 기두의 모습이 매우 두드러진다


고려 시대의 건축 양식을 살펴보면 대개 백제의 땅이었던 곳에는 백제다운 건축이,
신라 터전에는 신라다운 것이,
고구려 옛터에는 고구려계의 건축물이 세워졌음을 알 수 있는데
이 객사문도 그런 법식에 다분히 들어맞으므로 고구려계 건축이라 할 수 있다
봉정사 극락전,수덕사 대웅전,부석사 무량수전 등이 고려 시대의 건축물로 남아 있지만
절집이 아닌 목조 건축물로는 이 객사문이 가장 오래 되었다
*한국문화유산답사회 지음 '답사여행의 길잡이'중에서*

 

강릉객사문(江陵客舍門).강릉 임영관삼문(江陵 臨瀛館三門)


국보 제51호 
강원 강릉시 용강동 58-1 


고려시대에 지은 강릉 객사의 정문으로, 현재 객사 건물은 없어지고 이 문만 남아 있다. 객사란 고려와 조선시대 때 각 고을에 두었던 지방관아의 하나로 왕을 상징하는 나무패를 모셔두고 초하루와 보름에 궁궐을 향해 절을 하는 망궐례를 행하였으며, 왕이 파견한 중앙관리나 사신들이 묵기도 하였다.


이 객사는 고려 태조 19년(936)에 총 83칸의 건물을 짓고 임영관이라 하였는데, 문루에 걸려 있는 ‘임영관’이란 현판은 공민왕이 직접 쓴 것이라고 한다. 몇 차례의 보수가 있었고, 일제시대에는 학교 건물로 이용하기도 하였다. 학교가 헐린 뒤 1967년에 강릉 경찰서가 들어서게 되고 현재는 마당에 객사문만 남아 있다. 남산의 오성정·금산의 월화정·경포의 방해정은 객사의 일부를 옮겨 지은 것이다.


문은 앞면 3칸·옆면 2칸 크기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으로 간결한 형태로 꾸몄다. 앞면 3칸에는 커다란 널판문을 달았으며, 기둥은 가운데 부분이 볼록한 형태이다.


간결하고 소박하지만 세부건축 재료에서 보이는 세련된 조각 솜씨는 고려시대 건축양식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문화재청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