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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양 중초사지 당간지주(中初寺址 幢竿支柱).경기 안양 본문

☆~당간지주/통일신라

안양 중초사지 당간지주(中初寺址 幢竿支柱).경기 안양

푸른새벽* 2008. 6. 21. 11:06









































































 중초사지 당간지주(中初寺址 幢竿支柱)

 

중초사지 당간지주는 원위치에 동서로 마주 서있다.두 지주 중 동쪽지주가 심하게 기울어져 2000년에 보수 공사가 실시되어 현재는 완연한 모습을 보인다.두 지주는 지면보다 약간 높게 단을 만들고 그 중심부에 세웠다.보수 당시 하부를 조사한 결과 대소형의 잡석과 흙을 혼합하여 견고하고 단단하게 기초를 다진 것으로 밝혀졌다.그리고 지주부 하부가 상당한 깊이까지 매몰된 것으로 확인되었다.이러한 조사 결과는 다른 당간지주의 시공 수법을 아는데 유용한 자료를 제공하였다.즉,당간지주를 세움에 있어서 모든 당간지주가 정연한 기단부를 마련한 것은 아니며 경우에 따라 지부 하부를 깊게 매몰하고 견고하게 세우기 위하여 돌과 흙을 활용하여 기초를 다진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점이다.특히 지주 하단부의 치석 수법에 따라 기단부를 어떤 식으로 마련하였는지 대략적으로 추정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해 주었다.


중초사지 당간지주는 두 지주를 견고하게 고정하기 위하여 간대석과 같은 높이로 지주 주변에 판석형(板石形) 석재를 여러 장 결구하였다.간대석은 긴 사각형 돌을 남북으로 놓았는데,상면에 길다란 정자국이 나있고 그 가운데에 원좌와 원공(지름 34cm,깊이 15cm)을 시공하였다.지주의 각 면은 전체적으로 거칠게 다듬었으며,높이에 비하여 너비와 폭이 작아 세장한 인상을 주고 있다.정상부는 완만한 경사로 치석되었다.그리고 외면 상부를 1단 낮게 깎아 당시 지주부의 장식 수법이 경주 지역에 건립된 당간지주로부터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게 한다.특히 서쪽지주 외면의 1단 낮은 바로 아래쪽에는 명문(銘文)을 음각하였다.


명문은 6행 총 123자로 해서체이며 글자 크기는 6~7cm이다.명문에 의하면 이곳이 중초사임과 동시에 당간지주가 826(흥덕왕 1) 8월 6일 채석하여 827년 2월 30일에 완공되었음을 알 수 있다.그리고 건립 책임자로 절주통 황룡사 항창화상(節州統 皇龍寺 恒昌和尙)을 비롯하여 10명의 승려가 후원하였음을 알 수 있다.이와 같이 중초사가 9세기 초반경에 널리 알려진 사찰이었으며 중앙에 있는 사찰과도 교류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명문은 당간지주의 절대연대와 두 지주를 건립하는데 소요된 기간이 어느 정도인지를 추산 할 수 있게 한다.


당간을 고정시켰던 간은 지주의 내면 꼭대기에 긴 사각형 간구를 마련하고 간공(지름 14cm)은 상하에 2개 시공하여 끼우도록 하였다.간공은 원형으로 관통되었다.


지주부는 전체적으로 정자국이 여기저기 남아있어 정교하게 다듬지는 않았다.그리고 지주의 외관이 세장(細長)한 인상을 주고 있다.그런데 간구와 간공을 마련한 수법,외면 상부를 1단 낮게 한 점 등은 통일신라시대 경주 지역을 중심으로 건립된 많은 당간지주에서 볼 수 있다.이것은 8세기에서 9세기까지 건립된 당간지주들의 일반적인 장식 수법이었다.특히 중초사지 당간지주는 치석과 장식 수법 등에서 안동 운흥동 당간지주와 강한 친연성을 보이고 있다.


한편 당간지주는 하부 조사 결과 동쪽과 서쪽지주의 토층 일부가 서로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고 기울어진 동쪽지주의 토층에서만 백자편이 출토되어 조선시대에 보수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엄기표 지음 '한국의 당간과 당간지주'중에서*



중초사터 당간지주(中初寺址 幢竿支柱)

 

보물 제4호

경기 안양시 만안구 석수동 212-1


화강암으로 조성된 당간지주의 높이는 3.64m,동서로 마주보고 있는 두 지주의 내.외면은 아무런 조식이나 장식없이 간결하다.바깥면의 윗부분에 약간의 층급을 둠으로써 옛모습을 이어오고 있으며 당간을 고정시키는 간(杆)은 상.중.하 세 곳에 간구를 마련했다.지주의 기단부는 바닥에 장대석의 기반석을 지주 사이와 바깥쪽으로 한 장씩 깔아 기단을 삼고 있는데,땅에 묻힌 부분보다 위쪽의 두 지주가 약간 틈이 벌어져 불안전하게 보인다.


이곳이 신라시대 중초사(中初寺)였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기록은 바로 이 당간지주에 새겨진 명문이다.서쪽 지주의 바깥면에 새겨진 명문은 모두 6행 123자인데,신라 흥덕왕 1년(826) 8월 6일에 채석하여 이듬해(827) 2월 30일에 조성되었고 조성 책임자인 절주통(節州統) 황룡사 항창화상(恒昌和尙)을 위해 10여 명의 법사가 이 일에 동참하였다는 내력을 소상히 밝혀주고 있다.


중초사터 당간의 명문은 조성년대를 확실히 밝힌,자기 가람의 족보를 기록한 당간지주로 국내에서 유일하다.또한 당간지주에 새긴 글자에는 속한문(俗漢文.한문체에 우리말의 요소가 가미된 이두문체의 초기 형태)을 혼용한 곳이 있어 고대 국어사 연구에도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전체적으로 간결하면서도 잘 다듬으려 애쓴 흔적이 보이는 중초사 당간지주는 보물 제 4호이다.
*한국문화유산답사회 지음 '답사여행의 길잡이'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