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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 용두사지철당간(龍頭寺址鐵幢竿).충북 청주 본문

☆~당간지주/고려

청주 용두사지철당간(龍頭寺址鐵幢竿).충북 청주

푸른새벽* 2009. 2. 5. 08:23



















































































 용두사지철당간(龍頭寺址鐵幢竿)


청주시 남문로2가는 지금 백화점,은행,극장 등이 빼곡이 들어선 번화가이다.그러나 고려시대에는 이곳에 용두사라는 큰 절이 있었고  그때의 유적으로 철당간 한 기가 지금도 높이 솟아 있다.


당간은 당을 다는 장대이다.당이란 절의 입구나 법당 앞에 내다거는 일종의 깃발로서 부처와 보살의 위덕을 나타내고부처가 모든 번뇌를 타파함을 드러내는 상징적 의미로 사용된 장엄구를 말한다.당간은 보통 돌로 된 지주를 맞세우고 그 사이에 끼워 세우며 재료로는 돌이나 쇠,나무 등이 사용되었다.신라와 고려시대를 통해 수많은 절이 건립되고 당간이 설치되었지만  지금은 대개 돌로 된 지주만 남아 있고 당간은 보기 드물다.
지금까지 남은 당간으로는 담양 읍내리의 석당간,나주 동문밖 석당간,계룡산 갑사 철당간,안성 칠장사 철당간,속리산 법주사 철당간 그리고 용두사터 철당간이 있다.그중에서도 용두사터 철당간은 건립연대를 알리는 명문이 있어 국보 제41호로 지정되었다.


용두사터 철당간은 널찍한 기단 위에서 화강암 지주 사이에 세워져 있다.지름이 40cm쯤 되고 높이가 63cm인 철제 원통 스무 개를 맞물려 쌓아 올려서 높이가 12.7m에 이른다.원래는 철통 서른 개가 중첩되어 높이가 60척이었는데  흥선대원군 시절에 경복궁 중건에 쓰느라고 열개를 헐어갔다는 말이 전해온다.


이 당간의 건립연대와 내력을 밝혀주는 명문은 아래에서 세번째 철통 둘레에 393자 가량의 해서로 양각되어 있다.내용은  청주의 호족인 김예종이라는 사람이 유행병에 걸리자 철당을 바쳐 절을 장엄할 것을 맹세하고 사촌형인 희일등과 함께 철통 30단을 주조하여 높이 60척의 철당을 세우게 했다는 것이다.조성연대는 준풍(峻豊) 3년,즉 고려 광종 13년(962) 임술 3월 29일이라 적혀 있다.


동서로 마주선 당간지주는 신라시대 이래의 전형적인 양식으로 아래쪽 폭이 넓고 위로 갈수록 좁아진 모양이다.꼭대기 바깥쪽은 둥글게 공글리면서 약간의 굴곡을 주었고 안쪽에는 당간을 끼우기 위한 빗장 형식이 마련되었다.지주 바깥면은 가장자리에 가느다란 선이 음각되었고 한가운데 굵은 새로선이 두드러져 있으며 앞뒷면에도 장식선이 돌려져 있다.


지금 철당간 주변에는 고양이 이마만한 '광장'이 비워져 있을 뿐이고 사방을 둘러 건물이 들어차 있다.그러나 손상되지 않은 원래의 높이였을 때,더구나 요즘 같은 고층건물도 없던 시절에 각색 비단 당을 달고 '구름 밖으로 치솟아 은하수를 꿰뚫는 듯' 높아보였을 이 당간은 불법의 위력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했을 것이다.용두사 철당간을 직접 언급한 것은 아니지만,'흥국사 마당에 구리당간이 있는데 아랫도리 지름이 3척이고 높이 10여 길이며...마디마디 쌓아 올렸다.표면에 황금색을 발랐고 꼭대기에 봉수(鳳首)를 달았으며 여기에 비단으로 당을 달았다'는  중국 사신 서긍의 『고려도경』 흥국사조의 한 대목은 절이 흥성하던 시기 당간의 모습을 상상하게 한다.


한편,청주는 지형이 무심천 위에 뜬 배(舟)의 형상이라 하여 오래전부터 주성(舟城)이라 불려왔다.이것이 용두사 철당간에 대한 신비감과 결합하여 몇 갈래의 전설을 낳았다.


고려 초 혜원이라는 스님이 전국의 이름난 절과 경승지를 순례하던 중 청주 고을 율량에서 쉬어가게 되었다.보름달이 떠 있었는데 한밤중에 갑자기 먹장구름이 몰려와 세찬 비가 내리고 천둥번개가 치므로 혜원은 합장하고 부처께 빌었다.얼마 후 비가 멎고 서쪽 하늘에 무지개가 서더니 부처님이 나타나 "곧 용두사에 가서 배가 떠내려가지 않도록 돛대를 세우라" 고 하였다.혜원은 날이 밝자 용두사로 갔는데 용두사 주지도 간밤에 같은 소리를 들었다고 했다.두 스님이 사흘 동안 고심했지만 부처의 말뜻을 알 수가 없었다.나흘째 되는 날 한 초립동이 절 마당에서 "소금배가 들어올 텐데 돛대가 없구나" 하고 중얼거리는 소리를 듣고 달려나가 자초지종을 물으니 "목암산(지금의 우암산)에 올라 사방을 살피면 알 수 있다"고 대답했다.목암산에 올라가 가만히 보니 청주 고을이 천천히 북쪽으로 떠가고 있었다.이것을 본 두 스님은 용두사에 돛대를 상징하는 철당간을 세웠으며 그후로 청주를 주성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다른 전설로는 청주는 예로부터 수재를 자주 입었는데 어떤 술자(術者)가  큰 돛대를 세우면 배의 형상이 되어 수재를 면한다고 해서 여기에 돛대를 세웠다고 한다.


철당간의 규모로 미루어 용두사는 청주지역의 중심 사찰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그러나 창건과 폐사의 연원을 알 만한 기록이 없고 절터는 도심지로 변하여 흔적도 찾을 수 없다.당간의 건립연대로 보아 용두사는 적어도 광종 13년 이전에 개창되었을 것으로 보이며 청주지방의 호족세력과 고려 초의 숭불정책에섣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여겨진다.『청주구읍지』 고려조에는 '청주사람이 땅을 파다가 고종(古鐘)을 얻었는데 거기에 대안(大安) 6년 용두사 금구라 적혀 있었다...그 소리가 몇 리 밖까지 들린다'는 기록이 있다.대안 6년은 고려 고종 원년(1213)이다.그때까지 용두사가 있어서 금구 불사를 했음을 알 수 있다.


또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용두사는 이미 폐사되었고 높이 10여 장되는 돛대만 남았다.사람들이 말하기를 처음 청주가 생길 때 술자들이 이것을 세워 행주지세(行舟之勢)를 나타냈다고 한다'는 내용이 있어 조선 성종(1457~1494)이전에 폐사되었음을 말해준다.고려 말 공민왕 때는 절 자리가 이미 청주 감영이 되어 있었으므로 용두사는 그전에 거란과 몽고의 침입이 거듭될 때 폐사되었으리라 짐작된다.
*한국문화유산답사회 지음 '답사여행의 길잡이'중에서*

 


청주 용두사지 철당간(淸州 龍頭寺址 鐵幢竿)


국보 제41호 
충북 청주시 상당구 남문로2가 48-19 
 

당간이 서 있는 청주시 상당구 남문로는 예전에 용두사라는 절이 자리잡고 있던 곳이다. 용두사는 고려 광종 13년(962)에 창건되었으나 고려말의 잦은 전쟁과 난으로 인해 폐허가 되었고, 절이 있던 터는 청주시내의 가장 번화한 거리로 변하였다.


이 당간은 밑받침돌과 이를 버티고 있는 두 기둥이 온전히 남아 예전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다. 두 기둥은 바깥면 중앙에 세로로 도드라지게 선을 새겨 단조로운 표면에 변화를 주었다. 그 사이로 원통 모양의 철통 20개를 아래위가 서로 맞물리도록 쌓아 당간을 이루게 하였고, 돌기둥의 맨 위쪽에는 빗장과 같은 고정장치를 두어 당간을 단단히 잡아매고 있다. 특히 세 번째 철통 표면에는 철당간을 세우게 된 동기와 과정 등이 기록되어 있는데, 원래는 30개의 철통으로 구성되어 있었다고 한다.


당간을 세운 시기는 절의 창건과 때를 같이 하는 고려 광종 13년(962)으로, 연대를 확실하게 알 수 있어 소중한 가치를 지닌다. 또한 당간이 남아 있는 경우가 드문 우리 문화재 현실에 비추어 볼 때, 이곳과 함께 공주 갑사, 안성 칠장사의 세 곳에서만 철당간을 접할 수 있어 보기 드문 작품이다.


현재 청주에는 이 유물과 관련된 일화가 다음과 같이 전해지고 있다. 예로부터 청주에는 홍수에 의한 재난으로 백성들의 피해가 많았는데, 어느 점술가가 이르기를 큰 돛대를 세워 놓으면 이 지역이 배의 형상이 되어 재난을 면할 수 있을 것이라 하였다. 결국 이곳에 돛대 구실을 하는 당간을 세워 놓으니 재난을 피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청주를 주성(舟城)이라 이름하였다 한다. 
*문화재청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