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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 동문외 석당간(羅州東門外石幢竿).전남 나주 본문

☆~당간지주/고려

나주 동문외 석당간(羅州東門外石幢竿).전남 나주

푸른새벽* 2009. 2. 24. 13:16

 

 





 





 





 





 









 

 









 

 









 

 









 





 

 





 









 





 

 

나주 동문외 석당간(羅州東門外石幢竿)


석당간이 서있는 이곳은  원래 나주 읍성의 동문 밖 지역으로 동쪽으로는 내목성과 외목성 등의 목책이 있었다고 한다.


두 지주의 하단부는 깊게 매몰되어 있어 기단부는 확인할 수 없는 실정이며 현재 상태로 보아 특별한 시설없이 지하에 깊게 묻고 잡석 등을 이용하여 견고하게 고정시킨 것으로 보인다.두 지주는 동일한 치석 수법을 보이고 있으며 외면 외곽 모서리를 일정한 너비로 깎았다.그리고 지주 정상부는 평평하게 다듬었다.그래서 두 지주는 평면 사각형의 석주(石柱)를 세워놓은 듯한 인상을 주고 있다.석당간은 하단부를 매몰하여 세운 다음 두 지주 내면 꼭대기에 시공된 'U'형의 간구에 간을 연결하여 고정시켰다.간은 3조의 원형 철띠를 석당간에 두른 다음 간구로 연결하여 고정시켰다.간공은 확인되지 않는다.


석당간은 평면이 부등변 팔각형인 석주 5매를 연결하여 세웠다.석당간의 연결은 당간석 상하부를 각각 반절로 절단하여 상하부 연접부분에 각각 1개씩 2개의 원형 철띠를 두르고 그 사이에 2개의 둥근 구명을 관통시켜 그 구멍으로 고정쇠를 끼워 밀착한 후 고정쇠 끝부분에 쐐기를 박았다.이러한 방법으로 5개의 석당간을 지그재그가 아닌 같은 방향으로 연결하여 세웠는데 상단부로 올라갈수록 가늘어지게 하여 안정감을 주고 있다.석당간 꼭대기에는 보개석(寶蓋石)과 보주(寶珠)를 올렸는데 보개석은 1석의 팔각형 석재로 조성하였다.보개석은 처마선이 합각부에서 치켜 올라가고 있으며 반전(反轉)을 보이고 있어 고려시대 석조부도나 석등의 옥개석 수법과 친연성을 보이고 있다.보주는 원형에 가까운 사각형으로 각 면에 작은 안상(眼像)을 음조(陰彫)하고 그 안에 화형문(花形紋)을 장식하였다.


현재 나주 동문외 석당간이 서있는 일대에는 사찰이 있었는지 알 수 없는 실정이다.다만 나주 서문 석등과 나주 북문외 삼층석탑이 남아 있어 나주 시내에 사찰이 있었음은 분명하게 알 수 있다.그러나 이들 불교 관계 유물이 나주 동문외 석당간과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는지는 불분명하다.한편 이 석당간은 고려시대에 도참설이 성행하면서 나주의 지형이 배모양이기 때문에 고을의 안녕을 빌기 위해 지형에 맞춰 돛대 모양으로 건립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그러나 아직까지 석당간이 사찰에 활용된 것인지,원래부터 도참설과 관련되어 세워진 것인지는 확실하게 알 수 없다.다만 이 일대에 사찰의 흔적이 없는 점과 최초 건립시의 것으로 보이는 석당간의 꼭대기에 당을 걸기 위한 별도의 시설이 없는 점 등으로 보아 도참설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도 보인다.특히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당시 이것을 '석장(石墻)'이라 불렀고 나주의 지형이 행주(行舟)의 형세임을 표시하기 위한 것으로 나주가 처음으로 주(州)가 될 때 세운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다.그리고 문안에는 목장(木檣)이 있었다고 한다.만약에 이러한 기록이 사실이고 석당간이 사찰에 활용되지 않았다면  현재까지 알려진 당간지주 중에 유일하게 풍수지리에 의하여 세워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어쨌든 나주 동문외 석당간은 당간지주와 석당간이 원형대로 남아있는 귀중한 유물이다.그리고 지주부와 석당간의 치석과 결구 수법,석당간 꼭대기의 보개석와 그 치석 수법 등으로 보아 고려시대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나주시 성북동에 있으며 보물 제49호로 지정되어 있다.
*엄기표 지음 '한국의 당간과 당간지주'중에서*

 


나주 동문외 석당간(羅州東門外石幢竿)


광주 쪽에서 나주 시내로 들어오다가 만나게 되는 성북동에서 오른쪽으로 꺾어져 조금 들어간 길가에 있다


전체 높이는 11m에 이르고 기단과 당간지주,당간,지붕돌과 보주까지 모든 구성 부분이 원래대로 갖춰져 있다.높이 2m되는 지주는 아무런 조식도 없이 소박하고 튼튼하다.당간은 5개의 돌을 연결하여 올렸는데 거의 둥글게 보이지만 팔각으로 면이 다듬어져 있다.돌과 돌의 연결 부분은 두께의 절반씩을 깎아 내어 맞붙인 후 아래위에 둥근 구멍을 뚫어 쇠를 건너지르고 다시 그 바깥에 철테를 둘러 단단히 묶었다.당간을 지주 안쪽에 파인 홈에 고정시키도록 되어 있는 맨 아래 무쇠테가 퍽 든든하게 생겼다.팔각을 이룬 지붕돌은 모서리가 팔랑팔랑 들려서 고려 시대의 양식을 보인다.


원래 당간은 절에서 당(幢.종파를 표시한 깃발로 절 앞에 세움)을 거는데 쓰는 기둥이다.그러나 이 당간은 고려 초에 나주의 터를 정할 때 행주형(行舟形)지세를 가진 나주의 안정을 꾀하기 위해 돛대로서 세웠다고 한다.『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동문 밖에 있으며,전하는 말에 따르면 처음 고을을 설치할 때 이 석장(石檣)을 세워 행주의 형세를 표시하였다고 한다.문 안에도 역시 목장(木檣)이 있다" 고 기록되어 있다.지금은 돌당간만 남아 보물 제49호로 지정되어 있다.
*한국문화유산답사회 지음 '답사여행의 길잡이'중에서*

 



나주 동점문 밖 석당간(羅州 東漸門 밖 石幢竿)


보물 제49호
전남 나주시 성북동 229-9 


대개는 두 지주만 남아 있는데, 이것은 당간이 함께 남아 있어 중요한 유물이다. 당간은 5개 돌을 서로 맞물리게 하여 세웠는데, 아래는 굵고 올라갈수록 차츰 가늘어져 안정감 있다. 이러한 당간에 철띠를 두른 후 지주의 안쪽에 마련된 받침돌 윗면에 구멍을 파서 이를 고정시켜 놓았다. 당간 위에는 8각의 보개(寶蓋:지붕모양의 장식)와 보주(寶珠:연꽃봉오리모양의 장식)를 달아 놓았다.


본래 당간은 절 앞에 세워지는데, 이 곳에 절이 있었다는 역사기록은 없고 다만 풍수설과 결합하여 나주의 땅모양이 배모양이기 때문에 안정을 빌기 위하여 당간을 돛대로 세운 것이라는 말이 전해내려오고 있다.
*문화재청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