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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청 단속사지(斷俗寺址).경남 산청 본문

☆~ 절집.절터/경 남

산청 단속사지(斷俗寺址).경남 산청

푸른새벽* 2009. 2. 16. 08:18

 





 

 









 

 





 





 





 





 









 

 





 









 

 









 

 





 





 









 

 









 

  

 단속사터(斷俗寺址)

 

경남 산청군 단성면 운리 333번지


지리산 줄기가 긴 팔을 늘여 둥그렇게 만든 품 속에 포근히 안긴 산청군 단성면 운리.그 아늑한 마을의 한복판에 단속사(斷俗寺)터가 있다.
절이름에서부터 절다운 초연한 아름다움이 풍기는 단속사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일연의 『삼국유사』 「신충괘관(信忠掛冠)」에 나오는 두 가지 창건설이다.하나는 어진 선비 신충이 경덕왕 22년(763) 두 벗과 지리산에 들어가 중이되었다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경덕왕 7년(748) 이준(또는 이순)이라는 사람이 작은 절을 고쳐 큰 절로 삼고 단속사라 하였다는 이야기다.


김일손의 『속두류록(續頭流錄.1489년)』에 의하면 신충이 그린 경덕왕의 초상이 단속사에 있었다고 하며『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솔거가 그린 유마상(維摩像)이 있었다고도 하는데 지금은 그 자취를 알 길 없다.


신충이 임금의 초상화를 금당에 모셔두었다 함은,단속사라는 이름에서도 유추되는 바대로 단속사가 속세와의 인연을 끊으려 했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왕과 왕실의 안녕을 빌어주고자 창건된 절이라 보는 것이 옳지 싶다.이는 이준의 창건설을 따르더라도 마찬가지다.왕이 음주가무에 취해 정사를 돌보지 않을 때 이준이 나서서 간하였고 마음을 돌린 왕은 이준에게 요청하여 불교 교리와 정치를 강설하게 했다고 한다.


솔거가 그린 유마상이 있었다는 부분에 대해서는 솔거가 6세기 인물이고 단속사의 창건이 8세기이니 유마상은 솔거가 직접 단속사에 그린 그림이 아니라 이미 있었던 솔거의 그림을 창건 후에 옮겼을 것으로 짐작된다.


한편 우리나라 금석문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신행(信行.704~779)의 부도비 그리고 대감국사 탄연(坦然.1070~1159)의 비 등도 이곳 단속사에 있었다.


신행은 통일신라시대에 처음으로 북종선(北宗禪)을 전래한 인물이다.우리나라에 선이 처음 전해진 것은 7세기 무렵 법랑(法郞)에 의해서였다.법랑은 선덕여왕(632~646재위)때 당나라로 들어가 중국 선종의 제4조인 도신(道信)으로부터 선법(달마선이 남북으로 갈라지기 전의 선법)을 전수받고 귀국하여 선을 정착시키고자 하였으나 여의치 않았다.법랑의 법맥은 제자인 신행에게로 이어졌으며 법랑 밑에서 3년을 수행한 신행은 법랑이 입적하자 당나라로 건너가 북종선의 태두가 된 신수(信秀)의 제자 지공(志空)으로부터 3년간 공부한 뒤 귀국하여 북종선 전파에 힘을 썼다.


비록 당시 신행의 교화 폭이 넓지는 않았지만 북종선을 처음으로 통일신라에 전파하였다는 점에서 볼 때 신행과 단속사의 불교사적 궤적은 과소 평가할 일이 아니다.이후 신행의 법맥은 점점이 이어져 후일 구산선문의 하나인 희양산문을 세운 도헌(道憲)에게도 이른다.


신행이 입적한 지 35년 만인 헌덕왕(813) 그의 부도비가 세워졌으며 조선 중기까지 전하였으나 분실되었고,현재는 일부 비편만이 동국대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다행히도 종 28행,각 행 63자씩이 새겨진 옛 탁본첩이 전해 오고 있다.


역시 『속두류록』에 따르면 탄연의 비는 편액이 걸린 문 앞에 서 있었고 신행의 비보다 두어 자쯤 더 컸다고 한다.탄연은 고려 최고 의 명필로 경남 밀양에서 태어나 8세 때부터 글과 시에 능했으며 13세에 이미 육경(六經)을 통달했다.인종 10년(1132)에 최고의 지위인 대선사에 올랐으며,인종 24년(1146)에 단속사로 들어와 의종 13년(1159) 나이 아흔에 입적하였다.서거정이 "동국의 필법에 김생이 제일이요,요국일.영업.탄연이 다음간다" 고 할 정도로 탄연의 필법은 뛰어났으며 글씨는 왕희지의 체를 본받고 있다.그는 춘천 청평사의 문수원 중수비,예천 복룡사비,삼각산 승가굴 중수비 등이 비문을 썼다.그의 부도비는 명종 2년(1172)에 만들어졌으며,현재 비편의 일부가 숙명여자대학교박물관에 보존돼 있다.


신라의 이름난 고찰로서 고승들이 속출했던 내력 깊은 단속사는 선조 즉위년(1567)에 지방의 유생들에 의해 불상.경판 등이 파괴되었으며
정유재란 뒤 한때 재건된 적도 있었다고 한다.지금은 폐허가 되어 부러진 당간지주와 동서로 우뚝 선 동서 삼층석탑뿐이니 폐찰의 까닭이 무엇이었는지 궁금하고 안타까운 마음이 더해진다.게다가 단속사터는 가람의 중심이 되는 금당터에 들어선 민가 때문에 절터의 제 모습이 크게 훼손되어 있다.


당간지주는 높이 3.5m,지름 50cm의 규모이다.당간지주 앞에 서면 마을 뒤쪽의 단속산을 큰 배경으로 솔숲 사이로는 보물로 지정된 삼층석탑이 살짝 보이고 동서 삼층석탑의 뒤쪽으로 600세가 넘었다는 고고한 아름드리 매화나무가 서 있는 모습이 구도가 잘 짜여진 한 폭의 풍경화 같다.
*한국문화유산답사회 지음 '답사여행의 길잡이'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