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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 흥덕당간지주(興德幢竿支柱).전북 고창 본문

☆~당간지주/고려

고창 흥덕당간지주(興德幢竿支柱).전북 고창

푸른새벽* 2009. 6. 4. 08:14

  

 

 

 

 

 

 

 

 

 

 

 

 

 

 

 

 

 

 

 

 

 

 

 

 

 

 

 

 

 

 

 

 

 

 

 

 

 

 

 

 

 

 

 

 

 

 

 

 

 

 

 

 

 

 

 

 

 

 

 

 

 

 

 

 

 

 

 

 

 

 

 

 

 

 

 

 

 

 

 

 

 

 

 

 

 

 

 

 

 

 

 

 

 

 

 

 

 

 

 

 

 

 

 

 

고창 흥덕당간지주(興德幢竿支柱)


고창군 유형문화재 제36호


흥덕당간지주는 고창군 흥덕면 교운리 마을 흥덕향교 입구에 서 있다.당간지주의 위치와 주변 지형으로 보아 향교와 교운리 마을 일대에 사찰이 있었을 것으로 보이지만 지금은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다만 당간지주는 고려시대에 이 일대에 있었다고 하는 갈공사(葛空寺)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그러나 갈공사와 관련된 기록이나 유적이 없어 구체적인 연혁은 알 수 없는 실정이다.


두 지주는 동서로 마주 서 있는데 기단이 남아있지 않아 원래부터 마련하지 않았는지 유실되었는지는 확인이 불가능한 상태이다.다만 지주 하단부의 치석 수법으로 보아 최초 건립 시부터 기단을 마련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즉,두 지주 하단부를 깊게 땅에 묻고 간대석을 마련하여 당간을 세웠던 것으로 추정된다.이와 같이 고려시대에는 기단부를 마련하지 않고 두 지주를 땅속에 깊이 묻어 건립한 경우가 많았다.


두 지주는 동일한 치석 수법을 보이고 있는데 남쪽지주는 7조각으로 파손된 것을 시멘트로 결구하여 놓은 상태이다.그리고 지주 내면 상단부에는 정자국이 여기저기 그대로 남아 있고 군데군데 파손 흔적이 많다.지주 외면 모서리는 모를 깎아 부드럽게 하였다.그리고 전후면과 외면은 외곽 에 이중의 윤곽대(너비 4cm)를 돌려 장식하였다.윤곽대의 장식 수법이 화려하기는 하지만 선조형(線條形)으로 낮게 돋을새김하여 형식화의 경향이 보인다.지주 정상부는 내면에서 평평하다가 약하게 호선을 그리며 외면으로 이어지고 있다.특히 이 지주에서 주목되는 것은 외면에 장식된 3엽의 연꽃잎이다.연화문은 지면에서 130cm되는 높이와 그 위로 42cm,48cm 간격을 두고 1엽씩 장식되었다.연화문은 자방(지름 11cm)이 유난히 크고 연꽃잎(지름 23cm)도 두툼하고 도드라지게 하여 풍만하면서도 부드러운 백제계 연화문 와당에 가까운 수법으로 조식되었다.또한 연화문은 통일신라와 고려시대 범종의 당좌(撞座)문양과도 친연성을 보이고 있다.당간을 고정시키는 간은 지주 내면 꼭대기 에 '∪'형으로 지주의 전체적인 규모에 비해 작게 간구(7x25cm,깊이 8cm)를 시공하여 끼우도록 하였다.그리고 간공은 시공하지 않았다


이와 같이 지주부에 연화문이 조식된 당간지주는 통일신라시대에 건립된 경주 보문동 당간지주와 고려시대에 건립된 미륵리절터 당간지주를 포함하여 총 3기(基)가 확인되고 있다.이들 당간지주의 연화문은 자방이 크고 연판이 작아 범종의 당좌와 동일한 수법을 보이고 있다.그런데 고창 흥덕 당간지주의 연화문은 연판이 정교하게 구획되지 않고 형식적인 장식 수법을 보이고 있어 간략화된 고려시대 연화문 수법이다.그리고 지주부는 너비와 폭이 전체 높이에 비하여 상대적을 커서 둔중한 인상을 주고 있다.또한 지주 내면에 작은 간구만을 시공하였다.이러한 수법은 일반적으로 고려시대 당간지주에서 많이 나타난다.


한편 당간지주가 서있는 지역에서 가까운 일대에는 많은 가마터가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었다.그래서 이 지역은 서해안과 가까운 곳으로  일찍부터 중국의 청자 제작 기술이 도입되었던 곳으로 짐작되고 있다.특히 아산면 용계리 가마터의 청자는 유색이 전형적인 고려청자의 비색과는 거리가 있고 기형(器形)이나 제작 기법 등이 초기의 모습을 보이는 것으로 밝혀졌다.또한 가마터에서 해무리굽이 다량으로 출토되어 청자 제작 기술이 도입된 직후 활용된 가마로 확인되었다.그리고 반암리 가마터도 용계리와 그 성격이 같은 것으로 조사되었다.이 외에도  대산면 회룡리와 성남리,고창읍 덕산리와 내동리,고수면 초내리,흥덕면 사천리,상하면 용정리 등지에서도 청자가 출토되어 가마터가 있었을 가능성을 높여주고 있다.또한 부안면 수동리에서는 이보다는 늦지만 15세기 후반에서 16세기에 걸쳐서 활용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분청사기 가마터가 조사되었다.


이러한 것으로 보아 고려시대에 당간지주가 서있는 사찰에서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많은 가마터가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이것은 이 지역이 통일신라시대와 고려시대에 서해를 통하여 대외 활동이 활발하였으며 선진문물들이 들어왔던 곳이었음을 짐작케한다.이와 같이 이 지역은 사람들의 왕래나 활동이 많았던 곳으로 일찍부터 사찰이 건립되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이러한 사찰들은 서해로 나가는 사람들에게 무사 항해를 비는 기원사찰로서 또는 가마터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기복(祈福) 또는 추복(追福)사찰로서 기능하였을 것이다.동시에 고려시대 많은 사찰들처럼 원의 기능도 수행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사실들로 미루어 고창 흥덕 당간지주가 서있는 사찰도 통일신라 말기나 늦어도 고려 전기에는 창건되었을 것으로 보인다.특히 흥덕 당간지주의 소속 사찰은 지리적인 위치로 보아 청자 가마가 활발하게 운영되던 고려시대에 이 지역의 중심 사찰이었을 가능성이 높다.따라서 당간지주는 늦어도 고려 전기에는 건립되었으며 치석 수법과 그 양식으로 보아 11세기 전반경에 건립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엄기표 지음 '한국의 당간과 당간지주'중에서*

 

 

고창 흥덕당간지주(興德幢竿支柱)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36호
전북 고창군 흥덕면 교운리 138-3 

 

흥덕향교 입구에 자리하고 있는 이 당간지주는 속해있던 사찰이 ‘갈공사’라는 것만 전할 뿐 구체적인 내용은 남아있지 않다.


현재 당간지주의 형태는 기단부(基壇部)와 당간받침이 모두 사라진 채 모서리끝을 둥글게 처리한 네모진 좌 ·우 두 기둥만 남아있다. 기둥 안쪽 맨 위에는 당간을 고정시키기 위한 구멍을 두었고, 바깥쪽에는 한면에 3구씩 연꽃무늬를 새기었다. 특히 이 연꽃무늬는 다른 당간지주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매우 희귀한 것이다.


원래 절단되어 있던 것을 1987년 복원 ·수리하였으며, 고려시대에 만든 작품으로 추측된다. 
*문화재청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