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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 가지산 보림사(迦智山 寶林寺).전남 장흥 본문

☆~ 절집.절터/전 남

장흥 가지산 보림사(迦智山 寶林寺).전남 장흥

푸른새벽* 2009. 4. 14. 14:55

 






 

 











 






 






 






 






 

 











 

 






 






 











 

 






 











 






 

 






 






 

 




 






 






 











 






 

 






 











 






 






 






 






 

 











 






 

 






 

 가지산 보림사(迦智山 寶林寺)

 

전남 장흥군 유치면 봉덕리 45


보림사는 통일신라 구산선문 가운데 가지산문의 종찰이다.보조선사 체징((普照禪師 體澄.804~880)이 현안왕4년(860)에 이곳으로 옮겨온 이래
보림사는 초조 도의선사와 2조 염거화상에 이어 보조선사를 제3조로 삼는 가지산문의 중심도량이 되었고 수행자가 구름처럼 모여들어 큰절이 되었다.보림사 가지산문의 선맥은 고려 말까지 어어져서,『삼국유사』를 지은 일연 스님도 가지산문에 속했다.


이곳에 처음 절을 지은 것은 보조선사보다 100년 전쯤 사람인 원표대덕(元表大德)이었다.그때의 절 이름은 가지산사였는데 보조선사가 입적한 후 헌강왕이 보림사라는 절 이름을 내려 주었다.중국 남종선의 초조(初祖)인 육조대사 혜능이 주석하던 소주(韶州) 조계산 보림사의 이름을 
이절에 내려 준 것은 이곳이 우리나라 선종의 본산임을 인정하는 것이었다.보림사라는 절은 중국뿐만 아니라 인도에도 있는데 우리 나라 보림사와 함께 삼보림이라 일컬어졌다고 한다.


애초에 가지산사를 지은 원표대덕은 당나라 천보연간(天寶年間.742~756)에 당나라를 거쳐 인도까지 가서 불교의 성지를 두루 순례한 후
신라로 돌아와 헌강왕 18년(759)에 가지산사를 지었다고 전해 온다.그는 신실한 화엄종 승려였으며 "법력으로 경덕왕의 정사에 도움을 주었으므로 경덕왕 18년에 왕이 특별히 명하여 가지산상 장생표주(長生標株)를 세우도록 했는데 그 표주가 지금까지 남아 있다"라는 기록이 지금 보림사 안에 있는 보조선사부도비에 적혀 있다.이처럼 원표대덕에 의해 화엄종 사찰로 출발한 가지산사는 보조선사가 와서 주석한 이래 선종 사찰 보림사로 바뀐 것이다.


현재 남아 있는 보림사 사지는 대부분 조선 후기인 숙종.영조.정조 때에 간행된 것들이지만 미국 하버드 대학 연경도서관에서 발견된 『신라국 무주 가지산 보림사 사적기』는 조선 초기인 세조 3년(1457)에서 10년(1464) 사이에 발간된 것으로 보림사와 관련된 가장 오래 된 기록이다.


통일신라 때 화순 쌍봉사,곡성 태안사와 더불어 손꼽히는 큰 절이었고 그후 여러 차례 중창과 중수를 거치며 어느 절에도 뒤지지 않을 만큼 웅장한 규모를 지녔던 보림사가 지금처럼 한산해진 것은 한국전쟁 이후 부터이다.


1950년 가을,전남 지역의 공산군 유격대가 가지산에 집결하여 보림사에서 한 겨울을 났다.다음해 봄에 이곳으로 밀고 들어온 군경토벌대는 '공비들의 본거지'라고 불을 질러 버렸다고 한다.보림사에서 그 난리를 면한 것은  일주문과 천왕문 뿐,나머지 20여 동은 모두 불타 버렸다.


천년 대가람이 재로 변한 후, 한동안 보림사는 폐사될 지경에 처하기도 했다.그후 조금씩 복구되어 지금은 건물로는 일주문과 사천왕문,1968년에 다시 지어진 대적광전 그리고 근래에 복원된 대웅전,새로 지은 종루와 요사채 등이 절터를 채우고 있으며 담장도 말끔히 둘렀다.
그러나 최근 들어 활발해진 보림사 증축 불사에 대해,본격적인 발굴을 통해 제대로 된 복원계획부터 세워야 한다는 걱정의 소리도 한편에서 들린다.


보림사를 살피는 길,맨 처음 눈에 들어오는 일주문의 인상이 만만치 않다.포작이 여러 겹 중첩되어 화려하고 장중한 일주문 정면에는 '가지산 보림사'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데 그 안쪽에 걸린 '선종대가람'이라 적힌 현판은 보림사의 역사적 위상을 한마디로 대변해 준다.'선종대가람' 현판 구석에는 옹정(雍正)4년, 즉 영조 2년(1726)이라는 연대가 적혀 있다.일주문 또한 그 무렵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절 천왕문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집이며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85호로 지정되어 있다.중종 34년(1539)에 처음 조성된 뒤로 현종 9년(1668)과 정조 1년(1777)에 중수되었는데 좌우 칸에 대단히 큰 사천왕상 4구와 금강역사상 2구가 모셔져 있고 가운데 칸은 출입구로 쓰인다.
사천왕상은 중종 34년(1539)에 처음 조성되었고 정조 4년(1780)에 중수된 것으로 우리 나라 목각 사천왕상 가운데 가장 오래 된 것이다.


일주문과 사천왕문을 지나면 오른편에 최근 지어진 종루가 있고 정면에 동서 쌍탑과 석등을 앞세운 대적광전이 있다.쌍탑과 석등,대적광전 안에 앉아 계신 철조비로자나불상이 모두 신라 때의 것으로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일주문에서 사천왕문을 지나 대적광전으로 이어지는 남북 중심축과 직각을 이루는 동쪽에는 대웅전이 있다.보림사의 주공간을 대적광전 앞 마당이라 할 때 대웅전 쪽은 후대의 필요에 따라 증축되었을 것이라 한다.한국전쟁 때 불타 버린 원래의 대웅전은 조선 초기에 지어진 2층 법당으로서 국보 제204호로 지정되어 있었다.


지금의 대웅전은 옛 주춧돌 위에 예전의 모습을 복원한 것인데 정면 5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집이며 겉보기에는 2층이지만 내부는 모두 틔어 있고 중앙에 석가여래상과 그 좌우에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모시고 있다.


근래에 절을 정돈하면서 옮겨져 온 듯,보조선사 부도 옆에는 머리가 없는 석불 한기가 있다.거기서 뒤편으로 비스듬히 돌아 조금 떨어진 곳에 보조선사 체징의 부도와 부도비가 있다.
*한국문화유산답사회 지음 '답사여행의 길잡이'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