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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 백암산 백양사(白巖山 白羊寺).전남 장성 본문

☆~ 절집.절터/전 남

장성 백암산 백양사(白巖山 白羊寺).전남 장성

푸른새벽* 2009. 4. 22. 16:40

 

 











 

 











 






 

 






 










 






 

 






 











 






 

 











 






 

 






 











 

 











 

 











 

 










 






 











 






 

 






 

 백암산 백양사(白巖山 白羊寺)

 

전북 장성군 북하면 약수리 26번지


내장산과 백암산,입암산이 들어선 전남북의 경계 부근은 노령산맥 핵심지대이다.백양사는 그 중 장성군 북하면 약수리에 앉은 해발 741m의 백암산 동쪽 기슭에 자리잡고 있다.백암산 일대는 조선 팔경의 하나로 꼽혔는데,1971년에 전북의 내장산과 묶여 내장산국립공원으로 지정된 후
각각 백양사 지구와 내장산 지구로 불린다.


백양사로 들어가는 길은 걱실걱실한 갈참나무와 여릿여릿한 단풍나무가 우거진 사이로 계곡을 끼고 걸어가는 기분 좋은 흙길이다.어느 곳보다 수량이 흡족한 계곡물을 왼편으로 끼고 절을 향해 들어가노라면 아담한 이층누각,쌍계루가 저 앞에 모습을 보인다.근래에 지은 건물이지만, 뒤편에 높이 치솟은 회백색 바위절벽과 계곡에 둑을 막아 만든 못물에 어른거리는 그림자와 더불은 쌍계루의 모습은  그대로 오려내어 그림엽서를 만들어도 될 만큼 아름답다.


쌍계루 양편으로 갈라져 내려오는 계곡 물 위에 놓인 다리를 건너면 오른쪽에 자그마한 부도밭이 있고 왼편으로 휘어들면 천왕문이다.천왕문은 송만암 선사가 한창 백양사를 중창하던 1900년대 초에 지어진 건물이다.정면 5칸에 측면 2칸의 익공식 맞배지붕 집이며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44호로 지정되어 있다.현판에 적힌 '대가람 백양사'라는 반듯한 해서체 글씨는 해강 김규진(海岡 金圭鎭,1868 ~1933)이 쓴 것이다.


천왕문을 들어서면 마당 가운데 보리수 한 그루가 서 있고 좌우로 스님들 공부하는 방과 요사채,그리고 고루와 종각이 늘어서 있다.곧장 앞으로 나아가면 2층 문루인 우화루,우화루를 지나 들어서면 오른쪽부터 돌아가며 대웅전,칠성각과 진영각,극락보전,명부전이 둘러서 있다.극락보전을 빼고는 대부분 송만암 선사가 1917년부터 절을 중창하면서 하나하나 세운 건물들이다.


백제 무왕 33년(632),이곳에 절을 연 여환(如幻)은 절 이름을 백암사라고 하였다.그후 고려 덕종 3년(1034)에 중연(中延)선사가 절을 크게 중창하여 대찰을 이루어 놓고 정토법문을 널리 펴기 위해 절 이름을 정토사라고 고쳤다.고려 충정왕 2년(1350)에는 당대의 명문 거족 출신이며 각진(覺眞)국사라는 시호를 받은 각엄(覺儼)존자가 그간 퇴락한 정토사를 다시 일으키고 송본 대장경을 사들여 소장하는 등 대대적인 중창 불사를 벌였다.


조선 시대로 들어와서는 고성 이씨들의 원찰로 또는 장성현의 자복사찰로 유지되다가 설파 상언(雪坡 尙彦,1707~1791)과 연담유일(蓮潭有一,1720~1799)이 이 정토사에서 주석하게 되면서 그들의 문손들이 대대로 이곳에서 주지를 맡게 되었다.설파와 연담은 서산(西山)대사 휴정(休靜.1520~1604)의 4대 법손으로서 영조 1년(1725)에 김제 금산사에서 화엄대법회를 열어 대성황을 이루었던 환성 지안(喚惺 志安,1664~1792) 대사의 법손들이다.


이후 1917년부터 절을 대대적으로 중창하여 지금의 백양사를 이룬 만암(曼庵)선사(1875!1957)에 이르기까지 이어져 오는 설파와 연담의 문손들 가운데 양악(羊岳).백파(白坡).한양(漢陽).설두(雪竇).금담(錦潭).환응(幻應)스님 들이 있다.이 가운데 백파 스님은 고창 선운사에서 출가했지만 백양사 운문암에서 강석을 베풀어 선풍을 드날리기도 했고 만년에 추사 김정희와 편지로 선에 관한 논쟁을 하며 교류한 것으로 유명하다.그 인연으로 추사는 백파 스님의 비명을 짓고 썼으며 백파 스님 문손들의 법호도 미리 써 주었다고 한다.위에 든 스님들의 법호 가운데 설두,환응,만암,그밖에 다륜(茶輪),석전(石顚)등이 모두 추사가 미리 지어 놓은 것으로 후에 합당한 사람에게 주어진 것이다.


한편 정토사라는 이름이 언제 백양사로 바뀌었는지에 대해서는 선조때라거니 숙종때라거니 하는 전설이 있지만 헌종 때나 철종 때의 기록에도 여전히 백암사 정토사라고 쓰인 것으로 보아 그리 오래 된 일은 아니라고 여겨진다.전해지기로는 설파 스님의 법손인 환양 팔원(喚羊 八元)선사가 약사암에 있으면서 늘 불경을 외웠는데 어느 날 뒷산 백학봉에서 흰 양 한마리가 내려와서 법화경 외우는 소리를 다 듣고 돌아갔다.그 뒤로 백암산 정토사를 백양산 백양사로 부르기 시작했으며 팔원선사의 법호도 환양(喚羊)으로 되었다는 것이다.백양사라는 이름이 크게 알려진 것은 고종 이후 만암선사가 절을 중흥시키면서의 일이다.


백양사 근처에서부터 절 뒤의 백학봉 서쪽 기슭까지는 사철 푸른 비자나무가 숲을 이루었다.이곳은 비자나무 분포 북한지대로서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흔히 내장사 부근의 단풍을 전국에서 제일가는 것으로 쳐서 봄에는 백양사요 가을에는 내장사라는 말을 한다.그러나 새파란 비자림으로 뒷받침된 백양사의 단풍도 만만치는 않아서 양으로 보면 내장사이지만 질로 보면 백양사라는 사람도 있다.


백양사 뒤 계곡을 따라 3.5Km 가량 올라간 곳에 자리잡은 운문암은 백양사 부도처 가운데 가장 전망이 좋은 곳에 터를 잡았다.뿐만 아니라 고려 때 각진국사가 창건했고 진묵대사의 행적이 얽혀 있으며 백파선사가 머물기도 하는 등 내력으로 보아도 백양사에 딸린 여러 암자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었다.그러나 한국전쟁 때 다른 여러 암자와 함께 완전히 타서 없어졌다.그후 1981년에 새로 암자 건물이 들어섰다.운문암의 상왕봉에 오르면 백암산과 연이은 내장산의 연봉,들쭉날쭉한 암봉의 장관,그리고 멀리 무등산까지를 한눈에 볼 수 있다.


일제 때 31본산의 하나였던 백양사는 지금은 조계종 18교구의 본사로서 26개소의 말사를 거느리고 있다.
*한국문화유산답사회 지음 '답사여행의 길잡이'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