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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 국청사(國淸寺).경기 광주 본문

☆~ 절집.절터/경 기

남한산 국청사(國淸寺).경기 광주

푸른새벽* 2010. 4. 28. 15:58

 

 





 





 





 





 





 





 





 





 





 

국청사(國淸寺)

 
경기 광주군 중부면 산성리 803

 
朝鮮 仁祖 3년에 覺性大師를 八道都總攝總節制中軍主將에 임명하여 八道의 僧軍을 동원하여 남한산성의 축성을 전담하게 하고,
그 당시 성내에는 사찰이 2개밖에 없었으나 7개를 새로 創建하여 僧軍의 宿食과 訓練 및 外敵侵入에 대비하고,
秘密리에 軍器와 火藥, 軍糧米 등을 비축하였는데 그 중 하나가 국청사이다.


그 후 乙巳條約 때 의병의 군기고로 쓰이다가 비밀이 누설되어 日軍에 의해 불타버린 것을 현 주지가 중건하였다.
현재 이 곳에는 成三問의 親筆이라고 전해지는 병풍 1점과 宋時烈의 親筆冊子 3권이 전해지고 있다.
*국립문화재연구소자료*

 

 

국청사(國淸寺)


경기 광주시 중부면 남한산성내


대한불교조계종 제24교구 선운사의 말사(末寺)이다. 1624년(인조 2) 벽암(碧巖) 각성(覺性)이 창건하였다. 각성은 당시 팔도도총섭(八

道都摠攝) 총절제중군주장(總節制中軍主將)에 임명되었는데, 팔도의 승병을 동원하여 남한산성을 쌓으면서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여 비

밀리에 무기와 화약·군량미 등을 비축해 두기 위해 국청사와 천주사·개원사·남단사·한흥사·장경사·동림사 등 7개 사찰을 세웠다

. 당시 남한산성 내에는 이들 7개 사찰 외에 신라 때 지은 망월사와 옥정사도 있었다.


구한말에는 의병의 무기창고로 이용되기도 하였으나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된 이후 비밀이 누설되어 일제에 의해 폭파되고 말았다.

그 뒤 오랫동안 절터만 남아 있다가 1968년 보운(普運)이 중창하여 오늘에 이른다. 조선 말기까지 있었던 9개 사찰 중 국청사와 망월

사·개원사·한흥사·장경사가 복구되었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웅전과 요사채가 있으며, 유물로는 성삼문(成三問: 1418∼1456)의 친필이 적힌 병풍과 송시열(宋時烈: 1607∼

1689)의 친필로 된 책자 3권이 전한다. 인근에 국청사정(國淸寺井)이라는 조그만 우물이 있는데, 전설에 따르면 이 우물에서 금닭이

홰를 치며 울었다고 한다. 또 이 약수로 아버지의 종기를 고쳤다는 효자에 관한 이야기도 전한다. 
*퍼온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