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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 용주사(華城龍珠寺).경기 화성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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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 용주사(華城龍珠寺).경기 화성

푸른새벽* 2010. 8. 15. 20:11

 

 





 





 





 





 





 





 





 





 





 





 





 





 





 





 





 





 





 





 





 





 





 





 





 





 





 





 

화성 용주사(華城龍珠寺)


경기 화성시 송산동 188


화성시 송산동 188번지 화산의 나지막한 언덕에 자리한 용주사(龍珠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이다.


용주사에 이르는 길은 두 갈래가 있다. 먼저 수원역에서 화성 방면으로 가다보면 왼쪽으로 수원대학에 이르는 길이 나타난다. 이 길에 들어서 약 십분 정도면 융건릉(隆健陵)을 지나 도로 왼쪽의 용주사에 다다른다. 다른 경로는 수원시내를 지나 오산 방면으로 십여 분 가다보면 병점이 나오고 여기서 서쪽길 입구에 용주사·융건릉·수원대학 입구라는 푯말이 세워져 있다. 이 길로 들어서 채 십분이 되기 전에 길 오른쪽의 용주사에 도착하게 된다.

 

용주사는 조선 제22대 임금인 정조(正祖)가 부친 사도세자(1735∼1762)의 능인 현륭원(顯隆園)의 능사(陵寺)로서 1790년에 건립하였다.


절이 세워진 자리는 원래 신라 때 창건된 갈양사(葛陽寺)의 옛터였다. 정조가 처음 절을 짓고자 장소를 물색하였는데 당시의 신하들이 이 갈양사터가 천하제일의 복지(福地)라고 하였다. 이에 이곳에 절을 새우고 비명에 숨진 아버지 사도세자의 명복을 빌게 하니, 비로소 용주사는 효심의 본찰로서 불심과 효심이 한데 어우러지게 된다. 절이 건립된 갈양사터는 천여 년 전인 신라시대 때 이미 부처님의 복전(福田)이 가꾸어졌던 곳이다.


그러나 갈양사의 창건에 관해서는 정확한 역사적 사실을 알 수 있는 자료가 없다. 다만 신라 말 가지산문(迦智山門)의 제2세였던 염거화상(廉巨, 또는 廉居, ?∼844)이 창건했던 것만은 분명하다. 고려시대에 들어와서는 신라 말 고려 초라는 격변의 시기를 살면서 선승으로서 커다란 발자욱을 남겼던 혜거국사(惠居國師, 899∼974)가 머물기도 하였다. 국사에 대해서는 최근에 그의 비인 〈고려국수주부화산갈양사변지무애원명묘각흥복우세혜거국사법휘지광시 홍제존자보광지탑비명병서 (高麗國水州府花山葛陽寺辯智無碍圓明妙覺興福祐世惠居國師法諱智光諡 弘濟尊者寶光之塔碑銘幷序)가 알려지면서 자세한 행장을 알게 되었고, 갈양사의 모습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다. 즉 스님은 갈양사를 고려왕실의 원찰로 삼을 것을 왕에게 아뢰기도 하였고, 말년에는 이곳에 혜거헌(惠居軒)이라는 승방을 두어 하산소(下山所)로 삼아 지냈었다고 한다.


혜거국사 이후 국가의 지원과 보호에 의해 법등(法燈)이 끊이지 않고, 적지 않은 고승대덕이 배출되었을 것이 분명하나 안타깝게도 갈양사는 역사 속에서 자취를 감춰버린다. 아마도 잦은 병난의 과정에서 절 자체가 소실되었을 것이라고 막연히 추측할 수 있을 따름이다.


그후 갈양사는 1790년 정조의 효성스런 손길이 이르러 용주사로 환생할 때까지 긴 역사 속에서 윤회의 수레바퀴 속에 숨게 된다. 용주사의 창건은 불교가 정치적 사회적으로 억압을 당하고 있던 당시에 국가적 관심을 기울여 세워졌다는 점이 우선 사찰로서의 역사적 의미를 갖는다. 사회적 여건이 좋지 못하던 시대에 거대한 왕실의 원찰이 세워지게 되었던 연유는 정조 임금의 지극한 효성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이었다. 억울한 죽음을 당한 부친에 대한 그칠 줄 모르는 효성은 당시의 사회적 여건이 문제가 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창건된 용주사는 사도세자의 무덤인 현륭원을 수호하고 그의 명복을 비는 것이 가장 중요한 기능 중의 하나였다. 용주사는 조선왕조가 창건한 일련의 능사 중의 하나로 조선후기에 세워진 사찰이다. 특히 정조의 지극한 효성에서 비롯되어 국가적 관심을 기울여 창건되었기 때문에 다른 능사에 비하여 더욱 정성을 기울이고 격식을 갖춘 사찰로 지어졌다.

*대한불교진흥원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