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바람처럼 떠나다

창녕직교리당간지주(昌寧 直橋里幢竿支柱).경남 창녕 본문

☆~당간지주/고려

창녕직교리당간지주(昌寧 直橋里幢竿支柱).경남 창녕

푸른새벽* 2010. 7. 5. 14:11

 

 





 









 

 









 





 

 









 





 

 









 

 





 





 





 

창녕직교리당간지주(昌寧 直橋里幢竿支柱)


창녕군 문화재자료 제17호
경남 창녕군 창녕읍 직교리


직교리당간지주는 창녕읍 직교리 마을 담 사이 좁은 공간에 세워져 있다.


오래전부터 마을 사람들은 명절이나 제사 후에 음식을 바치는 등 당간지주를 민간신앙의 대상으로 인식하고 있다.아직까지 당간지주가 어느 사찰에 소속되었는지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그런데 창녕읍을 중심으로 진흥왕 척경비.창녕 고분군,술정리 동.서 삼층석탑,화왕산 일대를 중심으로 많은 불적(佛蹟)들이 밀집 분포하고 있다.또한 당간지주는 창녕읍의 중심권역에 위치하고 있다.이러한 것으로 보아 당간지주는 이 지역에서 중요한 사찰에 소속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특히 당간지주는 창녕읍을 관통하여 흐르는 개울을 건너 건립되어 있는 술정리 서 삼층석탑과 비교적 가까운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따라서 당간지주는 술정리 서삼층석탑과 관련되어 있거나 같은 사찰에 소속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두 지주는 현재 마을을 관통하는 작은 도로 옆 낮은 축대 위에 위치하고 있다.지주 하부가 매몰되어 있으며,두 지주 사이에 간대석으로 보이는 작은 사각형 대석이 놓여 있는데 원좌나 원공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두 지주는 기단부와 같은 특별한 시설을 하지 않고 깊게 땅에 묻어 세우고 간단한 간대석을 마련하여 당간을 고정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두 지주는 남북으로 마주보고 있는데 다른 당간지주처럼 정연하게 치석되어 곧게 솟은 형태는 아니다.지주부는 전체적으로 치석 수법이 조잡하고,가로로 정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다.


그리고 북쪽지주 상단부는 원통형(높이 43cm)으로 깎았는데 후대에 다른 용도로 사용하기 위하여 치석한 것으로 보인다.남쪽지주 내면에는 상하에 원형으로 간공(상부간공 지름:7cm/깊이:17cm,하부간공 지름:9cm/깊이:19cm)을 마련하여 당간을 고정하는 간(杆)을 끼우도록 하였으며 간공은 101cm 간격을 두고 시공되었다.북쪽지주 내면에도 99cm 간격을 두고 상하에 간공(상부간공 지름:9cm/깊이:16cm,하부간공 지름:10cm/깊이:17cm)을 시공하였다.


이와 같이 직교리 당간지주는 전체적으로 치석 수법이 조잡하고 곧은 형태가 아니며 지주의 너비와 폭이 다른 지주에 비하여 작은 편이고 일률적이지 못하다.즉,조선후기에 대대적으로 성행한 괘불지주와 유사한 치석 수법을 보이고 있다.한편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있는 창녕 술정리 서삼층석탑과 같은 사찰에 소속되었던 당간지주로는 추정되지만 그 건립 시기는 석탑보다 상당히 떨어질 것으로 보인다.석탑은 기단부와 탑신부 등 각 부의 치석 수법이 통일신라시대 이래 건립된 전형적인 양식을 보이고 있다.따라서 당간지주가 석탑과 같은 사찰에 소속되었다면 사찰이 창건된 이후 고려시대에 들어와 전국적으로 당간과 당간지주가 성행하자 그 필요성이 대두되어 건립되었을 것으로 보인다.창녕 직교리 당간지주는 치석 수법과 그 양식으로 보아 고려 중기 이후에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또한 평지에 세워진 사찰의 당간지주로서 사찰의 경계나 표식(標式)기능에 상당한 비중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엄기표 지음 '한국의 당간과 당간지주'중에서*

 

 

직교리당간지주(直橋里幢竿支柱)

 

문화재자료 제17호(창녕군)
경남 창녕군 창녕읍 직교리 64-11


이 당간지주에서 멀지 않은 곳에 술정리동삼층석탑(국보 제34호)·서삼층석탑(보물 제520호)이 있어, 이 일대에 큰 절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되나 절의 이름은 알 수 없다. 마주보는 두 기둥의 안쪽면에는 당간을 고정시키기 위한 구멍이 두 개씩 있는데, 한쪽 기둥의 윗부분에 작은 기둥을 깍아 놓아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모습이다. 
*문화재청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