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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도 장연사지(長淵寺址).경북 청도 본문

☆~ 절집.절터/경 북

청도 장연사지(長淵寺址).경북 청도

푸른새벽* 2010. 10. 17. 13:57

 

 





 





 





 





 









 

 





 

청도 장연사지(長淵寺址)


경북 청도군 매전면 장연리 108


청도 어느마을 못지 않게 감나무가 들어선 매전면 장연동 장수골.그 마을 어귀 감나무밭 가운데 통일신라시대 삼층석탑 2기가 동서로 나란히 서있다.보물 제677호 장연사터 삼층쌍탑이다.


두 탑은 모양과 크기가 거의 같은 통일신라 일반형의 석탑으로 이중기단에 3층의 탑신을 세우고 그 위에 상륜부를 올려놓았다.다만 서탑은 일찍이 도괴되어 개천가에 버려져 있던 것을 1979년 복원했기 때문에 몸돌과 지붕돌 모서리에 크고 작은 손상이 있으며 하층기단은 대부분이 보충한 석재들로 이루어져 있다.지대석은 거의 땅 속에 묻혀 지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하층기단은 가운데 탱주가 하나,양 옆에 우주가 하나씩 도드라지도록 면석을 네모지게 짜맞추고,그 위에 상층기단을 받는 이중의 굄대가 새겨진 갑석을 덮었다.상층기단 역시 하나의 탱주,두 개의 우주가 드러나도록 네 면에 면석을 세우고,탑신을 받치는 이중의 굄대와 덧서까래를 새긴 갑석을 그 위에 얹었다.각각 하나의 돌을 다듬어 만든 몸돌고 지붕돌로 구성된 3층의 탑신은 몸돌에 네 개씩의 우주,지붕돌에 네 단의 층급받침이 눈에 들어올 뿐 별다른 장식은 없다.상륜부는 동탑에 복발,서탑에 노반과 복발이 남아 있을 뿐인데,그나마 서탑의 복발은 나중에 보충된 것이다.


1984년 동탑을 해체 보수할 때 1층 몸돌에서 사리장치가 발견되었다.특이하게도 사리병을 넣는 사리합이 나무로 만든 것이다.제기의 일종인 탕기에 뚜껑을 덮은 모양을 한 이 목합(木盒)은 뚜껑에 두 줄의 선이 그어진 것말고는 아무런 무늬가 없다.물레를 돌려 표면을 고르게 다듬고 전체에 금칠을 하였을 것으로 보이지만 칠은 거의 벗겨졌다.안을 좁고 깊게 파낸 뒤 거기에 유리로 만든 녹색 사리병을 장치했다.


두 탑은 하층기단의 탱주가 하나로 줄어들고 지붕돌의 층급받침이 모두 넷으로 적어진 것으로 보아 9세기에 만들어졌으리라 본다.전체 높이가 동탑은 4.6m,서탑은 4.84m로 크지도 작지도 않은 크기에 유달리 빼어나거나 특이한 점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특별히 못난 구석도 없는 무난하고 평범한 석탑이다.평범한 두 탑이 만들어내는 분위기 또한 평범하다. 그래서 우리를 편안하게 만든다.넉넉하게 여유를 두고 두른 낮은 보호 철책에 걸터앉거나 주위를 천천히 거닐며 두 탑과 감나무들을 바라보노라면 아무런 감정도 어떤 욕망도 일지 않고 그저 무심하고 범박해진다.


그래도 절기 따른 소박한 변화는 있다.감나무들이 잎을 모두 떨군 계절에는 탑과 나무들이 친구처럼 닮은 모습으로 함께 바람과 추위를 견디고,반짝이는 두꺼운 잎들로 무성한 때에는 감나무가 녹색의 성을 이루어 두 탑을 그 안에 감싸며,잎들이 성글어갈수록 주홍빛 열매가 차츰 또렷해지는 가을에는 그 많은 열매들이 하늘에 박힌 작은 무늬들로 바뀌어 두 탑의 배경이 되어준다.장연사터 석탑 한 쌍은 이렇게 감나무골 입새에서 감나무들과 더불어 해를 쌓아간다.


한때는 두 탑이 뜰 가운데 서고 그 뒤로 금당이 들어서 정연한 쌍탑가람으로 빛났을 장연사는 지나온 내력고 사라진 연유도 가뭇없이 세월 속에 묻혀버리고 그 이름과 몇몇 석물들만을 지상에 남겨 놓았다.


두 탑이 서 있는 감나무밭에서 작은 개울 하나를 건넌 맞은편의 또 다른 감나무밭에는 허리 잘린 당간지주 한 쌍이 하체를 드러내고 있다.그 가운데 하부가 조금 길게 남은 지주에는 독특한 무늬가 새겨져 있다.조선시대의 반닫이나 삼층장 따위의 마구리에 덧댄 거멀쇠,또는 백통 장석의 변죽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무늬가 부드럽고 뚜렷한데,다른 당간지주에서 비슷한 예를 차기 어려운 점도 그렇거니와 신라시대의 당간지주에 수놓은 무늬가 조선시대 목가구의 장석무늬와 맥이 닿는 것도 흥미롭다.비록 한 짝이긴 하지만 부러져 나간 당간지주의 나머지 부분은 장수마을로 들어가면서 첫번째 만나는 집,어느 문중의 재실인 듯한 사원재(思遠齋)의 뜰 한옆에 있다.안쪽을 제외한 3면을 곱게 다듬고 바깥쪽에 세로로 길게 도드라진 줄무늬를 놓은 뒤,부드럽게 공굴려 마무리한 윗부분에는 아랫부분과 잘 어울리는 무늬를 마치 거멀쇠로 덮어 씌우듯 선명하게 양각했다.이것과 감나무밭에 남은 하부가 하나로 이어진 모습을 머릿속에 그려보면 어렵잖게 미려한 당간지주 한 쌍을 떠올릴 수 있다.


사원재에는 그밖에도 몇 가지 석물이 더 남아 있다.담 밑에는 언제나 파랗게 이끼 앉은 물을 반쯤 담고 있는 장방형 석조가 하나 자리잡고 있고,축대 위에는 팔각의 굄대가 이중으로 두드러지고 그 가운데 둥근 구멍이 깊게 파인,기둥을 받쳤는지 활주를 괴었는지 아니면 석등이라도 세웠는지 그 용도를 단정할 수 없는 돌 하나가 놓였으며,윗면이 평평하게 다듬어진 돌 두엇도 사원재 기둥을 받치고 있다.아마도 절터에 있던 석물들을 가져다 더러는 집을 짓는 데 쓰기도 하고 정원을 꾸미기도 했던 모양이다. 그렇게라도 보존해준 덕분에 옛 절의 모습을 그리는데 도움을 주고 있으니 고맙다고 해야 할는지?


장수골과 갈라지는 길에서 그대로 사오백 미터 더 들어가면 길명마을이다.이 마을로 접어드는 공터에 배례석이 하나 이정표처럼 옆으로 서 있다.틀림없이 장연사터에서 쓸려내려왔을 이 배례석은 동네사람들이 1994년 마을 앞을 흐르는 동창천에서 건져올려 지금처럼 세워놓은 것이다.오랫동안 물에 씻기고 냇돌에 부딪쳐 무늬들은 희미해지고 모서리는 크게 깨져 나갔다.온막리의 매전초등학교 교정에도 장연사터 뒤편의 산등성이에서 옮겨간 석불상이 하나 있다.그네.미끄럼틀 따위가 있는 운동장가에서 상체만을 시멘트 바닥 위로 드러낸 이 불상은 마모가 심하여 거의 표정을 읽기 어렵지만 그 얼굴에 어렴풋이 아이 같은 인상이 남아 있다.
*한국문화유산답사회지음 '답사여행의 길잡이'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