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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처럼 떠나다

전남 구례 돌아보기 1. 본문

답사.여행 후기

전남 구례 돌아보기 1.

푸른새벽* 2011. 4. 29. 09:53

마음이 간질간질해지는 계절.남쪽에서 아련히 전해지는 바람 때문일까 불현듯 몸살을 앓았다.

떠나야지 떠나야한다.그렇게하지 않으면 이 몸살을 이겨낼 재간이 없다.

 

혹독했던 겨울이 지나고 새로운 봄을 맞이하며 겪어낸 두 번의 이별을 거뜬히 이겨낸 줄 알았는데 오랫동안 미열은 끊이지 않고 나를 괴롭혔다.사람을 무기력하게 만드는 미열에 시달리면서 문득 이 계절 남도의 바람이 만나고 싶었다.남도의 바람을 만나면 이 지긋지긋한 미열을 떨쳐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전남 구례.

지금까지 연곡사를 비롯하여 화엄사 ,천은사를 세 번쯤 다녀오긴 했었어도 그 세 번의 구례행에서 연곡사와 화엄사. 천은사만 돌아보았을 뿐 구례 곳곳의 옛님은 찾아보질 못했었다.무엇보다 세 번씩이나 다녀온 화엄사에서 당간지주를 제대로 만나지 못했기에 두번 생각할 것 없이 이 좋은 계절의 바람을 만나려 1박2일의 일정으로 구례를 돌아보기로 작정했다.

 

2011년 4월 19일 아침 일곱시 집을 나섰다.

 

  

애초의 내 답사목록에는 없었던 옛님을 만나러 온 곳.

구례에서의 첫 답사처인 구례군 산동면 탑정리.

 

구례로 답사처를 정해놓고 자료를 정리하던 중 우연하게 알게된 탑정리탑.지리산온천단지 입구 못미쳐 오른쪽 탑정마을에 진입하여 마을회관앞의 작은 매실나무 아래에 있다는 정보만 믿고 왔는데 이렇게 큰 길가에 있는 탑동마을의 표지석을 왜 지나가면서도 보지 못했는지.지리산 관광안내소까지 가서 탑동마을 마을회관이 어디쯤이냐 물었더니 왔던 길을 되돌아 조금 나가면 약수탕이라는 온천건물이 있는데 그 곳이 탑동마을이고 회관은 마을안으로 조금만 들어가면 있다고 했다.

 

안내소의 젊은이가 세세하게 알려준 것 같은데 자동차로 한참을 돌아봐도 약수탕은 보이지 않았다.이리저리 자동차로 한참이나 돌다가 아무대고 사람이 보이는 곳으로 가서 물어보니 바로 아래쪽으로 돌아가면 탑이 있다고 알려줬다.비슷하게 근처까지는 온 모양이다.찻길 옆에 자동차를 세우고 옆을 보니... 약수탕이 있었다.그리고 탑동마을의 표지석도 보였다.

 

마을표지석이 있는 곳에서 잘 생긴 老巨樹 옆으로 들어서니 장독 조르르 늘어선 우리콩체험관이 있고 조금 더 올라가니 마을회관이 있었다.

 

 

마을회관 앞에 자동차를 세우고 사방을 돌아보았다.

분명 마을회관 건너편 매실나무 아래에 탑이 있다고 했는데 마을회관 건너편에도 마을회관 앞쪽의 밭에도 마을회관을 빙 돌아봐도 탑은 보이지 않았다.오늘 이시간에 탑동마을의 탑은 아직 인연이 아닌가하고 돌아서려는데 마침 지나가는 트럭이 있었다.염치불구하고 트럭을 세우고 물어보았다.

"요 아래 콩체험관 바로 건너편에 있어요."  이그~ 콩체험관도 지나왔는데 왜 안보였을꼬~~

 

 

 

 

 

지정되지 않았고 잘 알려지지도 않은 탑이라서 그렇게 큰 기대는 하지 않았는데 이렇게라도 탑의 모양새를 갖추고 있어 다행이었다.

 

구례 탑정리 탑동마을석탑.

 

작은매실나무아래에 있다던 내 정보와는 달리 탑은 산수유나무곁에 얌전히 자리잡고 있었다.온전치는 않지만 당당하고 꽉 차보이는 탑이다.

 

탑이 있어 마을이름이 탑동이 되었다니 예전부터 이 탑은 이자리에 있었을 것이다.원래의 모양은 이렇지 않았다고 하는데

무너져 내린 것을 마을사람들이 다시 모양새를 갖춰 세워놓은 이 탑은 원래는 오층탑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단다.

 

 

 

 

 

탑의 1층 몸돌 네 면 모두에는 좌불이 돋을새김 되어 있다.세월에 닳아 버려 좌불의 자세한 형체는 알아볼 수 없고,  지붕돌받침의 모양새로 보아 통일신라 때의 탑이 분명하다.얼기설기한 기단부나 지붕돌만 남은 2층이나 투박하고 어설픈 상륜부를 보아하니 지정문화재가 될 수 없음이 당연하지만 크지도 않고 온전치 못한 이 탑이 그럴 수 없이 당당하고 꽉 차 보였던 것은 1층 몸돌 네 면에 돋을새김된 좌불상 때문이었다.천년이 지나도록 이 자그마한 탑에 머물며 탑을 지키고 있는...

 

 

 

 

 

너무 강렬한 색감도 정신을 혼미하게 한다 라는 말을 실감했다.탑정리탑을 만나고 돌아나오는 길가엔 한창의 봄날임을 깊게 새기라는 듯 박태기나무가 멀미나도록 붉은 꽃망울을 달고 있었다.

 

 

 

 

 

오전 11시

구례군 산동면 이평리.윤문효공 신도비(求禮 尹文孝公 神道碑)를 찾아보러 왔다.

 

윤문효공신도비를 만나러 온 사람은 나 뿐이 아니었다.재실 인듯 싶은 이 건물의 주차장엔 대형버스에서 내린 한무리의 사람들과 윤문효공의 후손인지 싶은 어르신들이 모여 있었다.

 

 

 

 

 

주차장에서 십여 미터 정도 걸으면 왼쪽의 경사진 언덕에 층층으로 자리잡은 여러개의 무덤이 보인다.그런데...커다란 천막가림막이 어째 불안하다.

 

 

 

 

 

보물로 지정된 신도비 말고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석등이 분명한 것 같다.받침돌과 몸돌을 장식한 문양이 예사롭지 않고 정교하게 조각된 장식들로 치장된 지붕돌도 예사롭지 않다.무덤앞을 지키는 보통의 소박한 장명등과는 사뭇 다른,아주 화려한 석등이다.

 

 

 

 

 

구례 윤문효공 신도비(求禮 尹文孝公 神道碑)는 천막에 가려져 있었다.주차장에서 보았던 한 무리의 사람들 중 이 신도비의 세척작업을 위하여 답사를 온 사람도 있었다.

 

세척작업팀의 일행 중 한 젊은이가 이 가림막의 지퍼를 열고 들어가면서 보고 싶으면 들어와도 좋다고 하여 천막안으로 들어가 보기는 하였다.얼기설기 가로세로로 질러진 철제빔들 위에 위태위태하게 몸을 지탱하며 어마어마하게 큰 귀부와 머릿돌 문양만을 겨우 살필 수 있었다.

 

"야~ 대단하네요.이렇게 거대한 줄은 몰랐는데...그 시절 남원 윤씨의 세도가 대단했던 것을 알수 있군요." 라는 말만 할 수 있었을 뿐 사진기에 담을 수는 없었다.

 

철제빔에 겨우 몸을 지탱하고 있는데 밖이 몹시 소란스러웠고 비닐천막을 들추고 안을 들여다보는 아주머니들의 얼굴이 보였다.인터넷 무슨 까페에서 왔는데 답사라고 말하기는 그렇고 전국의 명성 자자한 곳은 찾아다닌다고 했다.이곳에 대한 설명을 하는 이도 없이,통솔하는 사람도 없이 시끄럽고 분주하기만한 사람들을 피해 먼저 그 자리를 떠나왔다.어차피 난 신도비나 묘지는 그렇게 큰 관심이 없으니까.그렇지만 나라안에서 가장 큰 신도비라는,보물로 지정된 신도비는 온전하게 살펴보고 싶었는데.얼마뒤면 이 거대한 신도비는 목욕재계마치고 창백하리만치 하얀 모습으로 나타나겠지.

 

 

 

 

 

12시 30분.

산수유꽃으로 유명한 산동면을 떠나 광의면 대전리에 도착.

떠나오기 전 대전리석불의 자료를 정리하면서 각오를 단단히 다졌었다.이곳을 찾았던 모든 사람들의 답사기에서 빠지지 않고 언급됐던 것은 '대전리석불입상을 찾아가는 길은 쉽지가 않다.' 였고 내가 이곳을 찾아오면서 참고했던 길안내는 '대전리 상대마을 북쪽저수지 끝부분 평평한 곳에 있는데 수월하지는 않은 길이다.'였는데 나 역시 네비양을 믿었다가 낭패를 당하고나선 잠시 황망하여 마을초입에선 보이지도 않는 저수지는 아예 생각지도 않았으니 저수지북쪽이고 뭐고 그냥 내 感을 믿고 그에 따랐을 뿐인데 感이 정확했던 것이다.

 

내 感은 나만의 것이니 뭐라 설명할 수는 없고 누구라도 이 석불을 찾아 오려한다면 대전리 상대마을 초입에선 절대 네비를 믿지 말고 그냥 상대마을 아무곳에서나,아무 집으로 들어가서 물어보라는 것이다. 정확한 명칭 대전리석불입상이 어쩌고 하는 것 보다는   미륵님이 어디 계시냐고 물어야 한다.그러면 절대 낭패를 당하지 않는다.

 

 

 

 

 

구례군 광의면 대전리석불입상(求禮大田里石佛立像)

봄바람 저수지를 훑고 지나와 소살거리며 들러가는 아늑하고 양지바른 곳에 평온하게 서 계신다.

 

상호는 표정을 알아 볼 수 없이 닳아 있지만 이곳에 이렇게 안온하게 서 계신 걸 보면 분명 부드러운 인상이었을 것이다.

목 부분이 마치 연고를 바른 것 같이 하얗게 보이는 것은,원래는 두상이 떨어져 있던 것을 접착제로 붙여 복원한 흔적이다.

두 손을 앞가슴에 가지런히 모으고 있는 이 석불입상은 수인을 보아하니 비로자나불이다.여지껏 많은 비로자나불을 보았지만 이렇게 서 계신 비로자나불은 처음 뵙는다.

 

10여 년 남짓한 내 답사길에서 참 많은 불상을 만났다.석불.목불.금동불.철불...내 답사길에 함께 하는 답사메모에 가장 먼저 자리잡는 것은 당간지주이고 보니 불상은 얼마전 까지만해도 탑에 비해 그리 큰 매력을 느끼질 못했었다.하지만 늘상 다니는 답사길에 당간지주를 만나는 일보다 불상을 만나는 일이 더 많다.수 도 없이.그러다보니 차츰 불상을 대하는 눈이 조금씩 트이기 시작한 것이다.아직도 금동불이나 철불에는 그리 매력을 느끼지는 못하는 처지지만(도피안사 철불은 제외) 석불만큼은 다르다.불상을 살피다보니 불상의 종류만도 오만가지가 넘는다는 것을 알았고 그 중에 으뜸은 석불이었다.물론 지극히 내 개인적인 취향이긴 하다.

 

불상 전체를 보면 석불,그중에서도  석조비로자나불이 가장 맘에 든다.이유를 설명하긴 힘들지만.

 

구례 광의면 대전리 미륵골에 서 계신 비로자나부처님에겐 잠시 그 앞에 무릎꿇고 앉아 香 한자루라도 피워올리고 싶었다.

 

 

 

 

 

불상의 왼쪽에는 두 손을 모으고 무릎을 꿇은 듯한 석상이 하나 있는데 자료를 찾아보니 공양상이란다.탑앞에 있는 공양상은 몇 번 만난 적이 있다.강릉 신복사터와 오대산 월정사...그런데 이렇게 불상 옆에 나란히 있는 공양상은 처음이다.생각같아선 보호각을 앞쪽으로 조금더 넓혀 공양상을 석불의 앞쪽에서 석불을 향하여 앉도록 옮겼으면 좋겠다.

 

 

 

 

 

석불을 모신 전각을 둘러친 돌담장 안쪽 한켠에 놓여진 돌기둥.

 

 

 

 

 

대전리석불의 보호각 앞쪽의 돌담에서도 멀미나게 농익은 봄이 있었다.

 

 

 

 

 

답사일정 조금 여유롭게 잡았더라면 한정없이 이 석불을 바라보며 앉아 있고 싶을 만큼 대전리석불이 위치한 곳은 아늑하고 편안하다.

 

 

 

 

 

바람이 분다. 옷깃을 여며야 할 만큼 바람이 분다.

 

한 달전 강원도 바닷가의 나뭇가지 꽃망울이 겨우 터질 그 때,조카를 영영 보내던 날도 이렇게 바람이 옷깃을 잡아 챌 만큼 불었었지.17년 전 엄마와 작별했던 그 자리에 다시 서게 될 줄은 생각하지 않고 그동안을 살았었다.엄마를 보낸 그 자리에 서서 보내야 하는 조카의 마흔나이 아까워 가슴을 쳤고 그것 밖에 못 살았던 그 청춘이 안쓰러워 애통하고 애통했었다.얼마나 열심히 살았고 얼마나 예의 바르고 얼마나 속이 깊고 얼마나 정이 많은 아이였는데...

 

내가 사는 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강건너 동네에 살았던 친정 장조카의 위독함을 알았던 것이 불과 두 달전.그 소식을 듣고도 전화통화만 간간이 했을 뿐 병원에 다니느라,딸아이 혼사치르느라 찾아가 보질 못했었다.딸내미 혼사를 치른 그 다음날 병원입원도 소용없어 집에서 요양 중이라는 조카를 보러 집으로 갔을 때 복수가 차서 불룩해진 배를 감싸안고 희미하게 나를 보고 웃던 조카의 낯빛이 어떻게 할 수 없을만큼 검게 변한 것을 보고 가슴이 미어지며 내내 다리가 후들거려 어떻게 운전해서 돌아왔는지 모른다.말기암 판정을 받은 후 한달도 못 살다간 조카를 보내던 날도 이렇게 바람이 심하게 불었었다.

 

다시 머리가 뜨거워진다.

 

 

 

 

 

점심 시간이 지났는데 아직 시장한 줄은 모르겠다.

오후 1시

구례군 광의면 수월리 매천사.

 

 

 

 

 

문에 자물쇠가 걸려 있어 잠긴 줄 알고 돌아서려 했더니 지나가던 마을사람이 자물쇠만 걸려 있을 뿐 잠긴 것은 아니니 들어갈 수 있다고 일러줘 들어올 수 있었다.마당엔 제를 지낼 때 입음직한 관복들이 걸려 있었다.이 바람불어 좋은 날 거풍하려고 꺼내어 널어 둔 것 같다.

 

 

 

 

 

대문을 들어서 오른쪽으로는 깔끔하고 소박한 매천유물관이 있다.

 

 

 

 

 

매천유물관 편액

 

 

 

 

 

유물관을 옆으로 하고 정면으로 보이는 또 하나의 문.

 

 

 

 

 

그 문에 걸렸던 편액.성인문

 

 

 

 

 

성인문도 고리만 살짝 걸려 있었을 뿐 잠기진 않았다.

 

 

 

 

 

매천사(梅泉祠)

매천 황현(梅泉 黃玹)선생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매천 황현(梅泉 黃玹.1855~1910)은
전남 광양군 봉강면 석사리에서 태어난 황현은,어려서부터 매우 총명하여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고정 20년(1883) 왕의 특명에 의해 실시된 보거과 첫 시험에 응시하여 우수한 성적을 얻었는데,시골사람이라는 불합리한 이유로 자신이 2등으로 밀려난 사실을 알고서잇달아 있는 시험을 모두 내쳐버리고 귀향했다.


이후 아버지의 명을 어기지는 못하여 고종 25년(1888) 생원회시 장원으로 합격하였으나,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을 겪은 뒤 청나라와 일본의 경쟁,고정의 어지러운 정치,명성황후의 독점적인 세도정치 등 부패가 극심한 세태를 보고는 구례로 내려와 역사와 경세학 등 독서 와 시문 짓기에 열중하였다.


그 사이 갑오농민정쟁.청일전쟁을 비롯하여 이듬해 명성황후시해사건,아관파천 등이 잇달아 일어나자 그는 어지러운 세태를 후손들에게 바로 알려주기 위해 경험하거나 보고 들은 이야기들을 『매천야록梅泉野錄』,『오하기문梧下記聞』 등의 책으로 남겼다.

 

1910년 8월 22일 나라가 일본에 강제로 합병되었다는 소식을 한 달 뒤 전해들은 그는 절명시(絶名詩)와 유서를 남긴 채 많은 아편을먹고 목숨을 끊었다.매천은 조선 말기의 문신이자 대문장가인 이건창(李建昌)과 한말 유학자인 김택영(金澤榮)과 함께 한말삼재(韓末三才)라고 불린다.다음은 우리가 너무도 잘 알고 있는 매천의 절명시다.

 

* 절명시(絶名詩)
난리속에 살다보니 백발이 성성하구나
그동안 몇번이나 목숨을 끊으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제는 더이상 어찌 할 수 없게 되었구나
가물거리는 촛불이 푸른 하늘을 비치는도다.


요망한 기운에 가려 임금자리 옮겨지더니
구중궁궐 침침하여 해만 길구나
이제부터는 조칙(詔勅)이 다시 없을 것이니
옥같이 아름다웠던 조서(詔書)에 천가닥 눈물이 흐르는구나


새와 짐승이 슬피 울고 바다와 산도 낯을 찡그린다.
무궁화 이 강산이 속절없이 망하였구나
가을 등잔불 밑에 책을 덮고 수천년 역사를 회고하니
참으로 지식인이 되어 한평생 굳게 살기 어렵구나


일찍이 나라를 위해 한 일 조금도 없는 내가
다만 살신성인할 뿐이니 이것을 충(忠)이라 할 수 있는가
겨우 송나라의 윤곡(尹穀)처럼 자결할 뿐이다.
송나라의 진동(陳東)처럼 의병을 일으키지 못하는 것이 부끄럽도다.

 

 

 

 

 

매천사는 생전에 그가 살았던 곳에 그의 후손과 지방 유림들이 1955년에 세운 사당이다.

 

매천사 담장을 의지해 피어난 동백꽃 빛깔이 그의 변치않았던 기개처럼 붉다.

 

 

 

 

 

광의면에 있는 매천사를 떠나 구례읍 논곡리에 도착했다.

논곡리삼층탑이 있다는 구례읍 논곡리 산51번지를 찾아가는 길 초입엔 가정녹색농촌체험마을의 표지판이 있는데

표지판 화살표 방향을 따라 계속 마을 깊숙이 들어가야 한다.

 

'마을입구에 붉은 벽돌의 청소년수련관이 있는데 수련관을 지나 한참을 올라가면 다리를 건너 마을회관 옆을 지나 올라간다'앞서 대전리석불입상을 찾아가는 길이 만만치 않다고 했는데 논곡리탑 역시 찾아가는 길이 만만치 않다는 의견들이 지배적이었다.찾기 어렵다니 각오 단단히 하고...

 

 

 

 

 

이 건물인가보다.

내 자료에 메모된 붉은 벽돌의 청소련 수련관. 마을초입 가정녹색체험관의 표지판이 있는 곳에서 부터 딱 80m의 거리이다.

이곳에서도 한참을 더 마을 깊숙이 들어가야 한다지.

 

 

 

 

 

붉은 색 벽돌건물인 청소년수련관에서 120m정도 더 마을 안쪽으로 들어오면 이렇게 논곡리탑의 표지판이 서 있다.

이 표지판을 지나면 길은 더욱더 좁아지고 휘어진다.붉은 벽돌건물 수련관에서 이곳까지 오는 구불구불 좁좁한 길보다 더욱 좁좁하고 구불구불하다.

 

 

 

 

 

미리 정보를 알고 왔다. 탑 바로 근처에 주차장이 있다는 정보를.

이 곳 바로 아래까지 경사가 심하고 굴곡도 장난이 아닌 좁은 길 내내 긴장하다가 주차장에 도착해서야 겨우 휴~ 하고 한숨을 지었다.운전경력 22년이 그냥은 아니구나 싶었다.생각보다 너른 주차장에 자동차를 세우고 올려다보니 탑의 지붕돌이 보인다.

 

 

 

 

 

논곡리탑은 마을의 가장 위쪽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는데 보물로 지정된 문화재답게 탑으로 올라가는 계단도 잘 정리가 되어 있다.

 

 

 

 

 

보물 제509호로 지정된 구례논곡리삼층석탑(求禮論谷里三層石塔)

 

잘 생긴, 세련된 신라 후기의탑이다.탑의 상륜부는 노반만 남아 있는데 노반과 삼층지붕돌이 하나의 석재로 되어 있다.

광복 전까지만해도 탑의 상륜부가 온전하게 남아 있었다고 하는데...아쉽다.

 

 

 

 

 

이 삼층석탑에 나타난 표현수법 가운데 가장 독특한 것은 기단의 갑석 윗부분을 장식한 복련과 인동무늬이다.이러한 양식은 경기도 여주 신륵사 다층석탑은 단판(單瓣) 복련무늬가 또렷하고 논곡리 삼층석탑의 경우 인동무늬인 점이 다르다.이렇듯 갑석을 화사하게 조성한 기법은 고려시대의 석탑에서 종종 나타나곤 한다.('답사여행의 길잡이' 중에서)

 

 

 

 

 

논곡리삼층석탑의 기단은 네 모서리에 우주를 새기고 맨윗돌에는 두툼한 연꽃받침을 두어 탑신을 받치도록 하였다.

 

 

 

 

 

논곡리탑의 앞쪽에 탑을 향하여 공손히 앉아 있는 공양상이 있는데 목도 잘려 나가고 팔도 부러졌지만 탑을 향해 앉아 있는 매무시는 얌전하고 단정하다.이 공양상은 원래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어디에서 흘러들어 온 것인지 알 길이 없다.

 

 

 

 

 

논곡리탑 옆에는 두 기의 동물모양 석물이 있는데 등 위에 구멍이 있는 것으로 보아 기둥을 꽂았던 것 같은데 몹시 마모되어 두리뭉실해 보이지만 엎드려 있는 사자 같다는 생각이 든다.

 

 

 

 

 

어느 광배가 이리도 아름다울까.

논곡리삼층탑엔 철따라 아름답게 변하는 광배가 있다.봄에는 분홍색으로 한껏 치장한 광배가.

 

 

 

 

 

마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논곡리삼층석탑.

탑이 있는 곳에서 퍼질르고 앉아 내려다 본 마을이 정겹다.복숭아꽃 살구꽃 아기진달래~울긋불긋 꽃대궐 차린 동네~~

동요 '고향의 봄'의 가사와 똑 닮은 풍경이다.

 

논곡리탑 아래 세워둔 자동차로 돌아와 한 삼십여 분을 자동차에 있었다.점심시간이 훨씬 지난지라 시장하기도 하였고 다시 돌아나가면 언제 점심을 먹을 수 있을지 몰라 살랑살랑 바람불고 아늑하게 내려다 보이는 풍경이  한껏 정겨운  곳 논곡리탑 주차장에서 준비해 간 점심을 먹었다.집을 떠날 때 도시락을 준비했었다.맑은 국물과 주먹밥과 밑반찬 몇가지와 과일과 커피.길거리 즐비한 음식점 아무곳에서나 한끼 때우면 오히려 간단하지만 보관도 어렵고 손도 번거로운  도시락을 준비했던 것은 이렇게 눈 맛 시원한 곳에서 느긋하게 또 혼자 밥먹는다는 부담감을 갖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아무도 없어 더욱 좋았다.

 

 

 

 

 

논곡리에서 점심식사를 마치고 떠나서 구례향교를 찾은 시간은 오후 3시.

통상 향교의 뜰에서 보던 오래된 나무가 구례향교의 초입에도 있다. 그런데 나무 뒤로 연못이 있네~

 

 

 

 

 

향교 홍살문을 들기 전 오른쪽 밭 가장자리에 붉은 글씨로 또박또박 씌여진 하마비가 서 있다.

 

 

 

 

 

구례향교는 잠겨 있었다.

 

 

 

 

 

답사를 다니며 향교나 사당,서원을 찾아 갔을 때 잠겨 있었던 적은 한 두번이 아니었다.잠겨있는 것을 확인하면 딱 포기하고 그냥 담을 따라 한바퀴 빙 돌아보고는 발길을 돌리는데 구례향교도 담을 따라 한바퀴 돌아보았다.

 

 

 

 

 

향교 오른쪽 담장에는 파란색 철대문이 연결되어 있었다.멀리서 보아하니 철대문 안으로 들어가면 향교도 출입할 수 있을 것 같았다.큰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파란 철대문을 밀어보니 열렸다.야호~ 들어갈 수 있겠다.

 

 

 

 

 

파란대문을 열고 들어가니 보얀 결의 나무대문이 나타났다.고리만 살짝 걸려 있을 뿐 잠겨 있지는 않았다.

 

 

 

 

 

향교 외삼문에서 정면으로 보이는 명륜당 건물인데 외삼문쪽에서 바라보면 뒷면이다.

 

 

 

 

 

건물 옆쪽으로 돌아가 본다.

 

 

 

 

 

내삼문에서 바라 본 편액이 걸린 명륜당의 정면.

 

 

 

 

내삼문은 이런 긴 막대기가 가로질러 걸려 있었다.막대기에 달린 고리를 풀고 문을 밀고 막대기 아래로 통과했다.

 

 

 

 

 

구례향교 대성전.

구례향교(求禮鄕校)는 지어진 연대를 정확하게 알 수  없다고 한다.중종 13년(1518)에 백련동에 향교를 지었으나 매년 제사 때마다 호랑이가 나타나서 숙종 30년(1704)에 봉성산 아래인 현 위치로 옮겼다고 한다.

 

 

 

 

 

대성전에서 다시 가로 질러진 나무 아래를 통과해 나왔다.물론 나온 뒤에는 나무 막대기를 누구도 손 댄 흔적 없이 제대로 걸쳐 잠궜다.

 

 

 

 

 

붉게 흐드러진 동백이 아까 지나온 매천사의 그것과 닮았다.

 

 

 

 

 

화엄사와 연곡사,천은사를 제외하고 구례에서 만나볼 마지막 옛님을 찾아 구례 마산면 사도리로 왔다.내 답사정보에는 사도리로 들어오려면 마을입구에서 한참을 걸어들어와야 한다고 메모가 되어 있었지만 사도리석탑과 석불을 모시고 있는 상은사 절집 입구까지 자동차로 별 어려움 없이 들어올 수 있었다.

 

석불과 탑이 있는 상은사라는 작은 절집 입구에는 옥산제라는 편액을 달고 있는 단정한 살문의 정면 4칸의 팔작지붕 건물이 있다.이런 건물을 보면 탐난다.이런 곳에서 살면 참 좋을텐데...

 

 

 

 

 

상은사라는 절집은 일주문도 천왕문도 없는 전각 두어 채로 이루어진 아주 조촐한 절집이다.

 

 

 

 

 

보아하니 마주보이는 저 파란 살문의 전각안에 석불이 모셔져 있지 싶다.

탑도 보이네.

 

 

 

 

 

시도유형문화재 제12호로 지정된 구례 사도리삼층석탑(求禮沙圖里三層石塔)

큰 돌로 지대석을 만들고 탑의 기단은 네 장의 판석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우주는 없다.3층 지붕돌은 몸돌과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으며 층급받침이 표현되지 않은 지붕돌은 그래서 조금 두껍고 둔탁해 보이는데 그래서 그런지 몽실몽실하다는 느낌이 든다.별다른 장식이 없이 전체적으로 간결해 보이는 이 탑은 고려시대에 세운 것이라 한다.

 

 

 

 

 

미쳐 편액도 달지 못한 전각에 모셔진 구례 사도리석불좌상(求禮沙圖里石佛坐像).

 

불상의 머리부분이 떨어져 있던 것을 최근에 다시 붙인 것이라는데 어째 상호가 예전의 것 같지가 않다.눈.코.입이 시원시원하게 표현된 것이 불상이라기 보다는 장수의 모습같다.이 불상의 좌대를 살펴본다는 것이 무지하게 어려웠다.각종 제사용구가 차려져 있는 선반이 떡 하고 불상앞을 가리고 있으니...

 

 

 

 

 

좁은 전각 불상의 옆으로 들어가 살펴보니 상.중.하로 나뉘어진 팔각의 대좌가 웅장한데 대좌의 상대와 하대엔 연꽃잎이 깊게 새겨져 있다.사도리석불좌상은 그 조각수법으로 보아 고려 초기의 것으로 추정한다.

 

 

 

 

 

전남 구례군  마산면 사도리의 절집,잘 알려지지 않아 조촐한 절집 상은사엔 간결하고 아담한 탑과 대좌가 웅장한 불상이 있다.

 

 

 

 

 

상은사 텃밭을 노란색으로 자욱하게 장식한 장다리꽃.

 

오후 5시 반.화엄사에 도착했다.

화엄사에선 당간지주와 구층암과 구층암탑과 석등과 천불전을 돌아보았다.종일 화창한 봄날의 표본인양 그렇게 맑던 날씨는 구층암을 돌아보고 내려올 쯤 잔뜩 흐려 있었다.오후 여섯시 반 화엄사 일주문을 나오며 다리를 쉬어야 겠단 생각을 했다.

 

 

 

 

화엄사 일주문을 나와 다리를 건너니 왼쪽으로 찻집이 보이길래 다리도 쉬고 차도 한잔 마실겸 찻집으로 들어가 이쁜 등이 켜져 있는 탁자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얼마만의 휴식이냐~~늘상 그렇지만 답사를 다니는 내 행태는 대부분이 빡빡했다.한 곳이라도 더 들러볼 욕심에 내 답사길은 항시 바쁘고 조급했었는데 이렇게 느긋하게 차 한잔 마시는 여유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이 남도에서 내가 쓸 수 있는 내일이 있다는 안도감과 오늘이 뉘였해지는 시간이였기에.

 

 

 

 

마시고 싶은 차는 모두  이러저러한 이유로 준비가 안된다니 가장 쉬운 대추차 한잔을 주문했는데 쫄깃한 찰시루떡 두 조각이 따라 나왔다.찻잔이라기보다는 사발에 내온 푸짐한(?) 대추차는 몹시 뜨거웠다.평소엔 떡을 즐기진 않는 편인데 두 조각의 찰떡은 아주 만족스러웠다.약간의 아쉬움이 남을 정도로~

 

화엄사찻집에서 삼십여 분쯤 앉아 있으며 어디에서 하룻밤을 보내야 할까 검색을 하면서 아이패드의 유용함을 실감했다.

그리고 결정했다.내일 아침엔 천은사 →연곡사로 동선을 잡았으니  멀리 갈 것 없이 화엄사 寺下村에서 묵기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