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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처럼 떠나다

경북 청도 돌아보기 1 본문

답사.여행 후기

경북 청도 돌아보기 1

푸른새벽* 2010. 11. 3. 15:19

가끔씩은

다음의 답사처로 정해놓고 자료정리까지 마친 고장보다는 뜬금없이 그리워지는 곳이 있다.

그럴경우엔 자료정리마친 고장보다는 내 마음이 가는,그리워지는 곳이 우선이다.

경북 청도가 그랬다.

의성으로 1박2일의 일정을 잡아 모든 준비까지 마쳤는데 갑자기 장연사지가 그리워진 것이다.

장연사지...

4년 전 초겨울 그 무성하던 감나무의 이파리가 다 떨어진 후 진눈깨비 내리는 날 찾아갔던 장연사지.

그곳에서 청도라는 고장을 알았고,길명마을을 알았고 청도사람들의 인심을 알았었다.

 

내 답사의 행태라는 것이 한 번 가본 고장으로는 에지간해선 다시 발걸음하지 못하는데 청도라는 고장으로 다시 발걸음한 것은

한 번 가 본 고장이라해도 청도에선 장연사지만 돌아봤던 것이 그 후 내내 아쉬웠기 때문이었다.

 

2010년 10월 12일 아침 여섯시.

청도를 향해 집을 나섰다.

 

  

집에서 306Km의 거리.

청도군 화양읍 송금리.

청도의 첫 답사처로 정한 대적사.

아침 9시의 햇살은 대적사로 들어가는 입구의 울창한 나무그림자를 미처 거두지 못한 것 같다.

 

 




오래된 나무 두 그루가 양쪽으로 도열하듯 서 있는 계단을 오르니 극락전 현판이 보인다.

 

 




고즈넉한 위치에 번잡하지 않게 자리한 대적사의 극락전이 단정한 모습으로 다가온다.

 

 




조선중기에 건립되었다는 대적사 극락전은 지난 세월만큼이나 단청도 오래 묵었음직한데 극락전 현판만은 근래에 단청을 새로 손 본 것 같다.

공포의 단청에 비해 산뜻한 극락전의 현판이지만 요란하지는 않다.

 

 




극락전 현판 아래 양쪽에 장식된 용머리. 

마치 속눈썹을 붙인 것 같이 표현된 눈썹과 멀뚱하고 둥그런 눈동자하며 벌름거리는 코와 귀에 걸릴만큼 찢어지게 웃는 입매와 한껏 벌린 입이 반야용선을 인도하는 장엄함보다는 말썽쟁이 아이를 어르는 귀여운 도깨비 같아 절로 웃음이 나온다.

 

 




내륙의 깊숙한 곳에 자리한 청도라는 고장에서 그것도 그리 널리 알려지지 않은 절집 대적사

대적사 극락전이 보물로 지정된 이유를 알게 해 준 극락전 내부 불단위의 닫집과 공포와 단청.

바쁜 답사길이 아니라면 이렇게 사진찍는 것 말리지 않는 대적사에서 하루종일을 보내고 싶은 맘 간절했다.

극락전 천장만 찬찬히 살펴봐도 하루가 모자랄 것 같다.

 

 




대적사에서 빠트리지 말고 살펴볼 것이라는 메모가 있으니 대적사 극락전 기단을 살펴본다.

겹겹이 겹쳐진 커다란 꽃과 석축을 타고 오르는 거북이.거북의 꼬리를 물고 있는 작은 게와 그 아래쪽 에미인 듯 보이는 조금 더 큰 게.

절집에서,그것도 바다마을의 절집이 아닌 내륙 깊숙한 곳에 자리한 절집의 기단석축에 이런 바다생물의 모양을 새긴 것이 신기하기도하고

의아스럽기도 하다.

오래전 대적사 극락전을 지은 장인의 정서는 익살스럽고 해학이 넘쳤던가 보다.

 

 




극락전 계단의 양쪽 옆면에 새겨진 용머리 조각.(이럴 땐 아침 맑고 강한 햇살이 그리 반갑지 않다.)

계단의 양쪽 옆면을 가득채워 용며리장식을 조각한 절집은 그리 흔하지 않으니 대적사 극락전이 더욱 특별해보인다.

 

 




근래에 새로지은 누각이 있는 곳에서 바라본 극락전의 측면.

감의 고장답게 감나무가 드리운 풍경이 참 좋다.

 




 

감나무 이파리가 낙엽된 계단을 내려오며 극락전이 아름다운 대적사를 가슴에 새기고 너무 맑아 서러운 가을을 껴안는다.

 

 

 




첫 답사처로 정한 대적사로 들어갈 때 보았던 와인터널을 대적사를 돌아나오고서야 눈길을 준다.

와인터널 앞에는 삼삼오오 와인터널에 입장하려는 사람들이 모여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각종 매체에서 청도의 와인터널을 소개하는 것을  보았을때는 와인터널은 언제라도,어느때라도 누구나 편하게 입장이 가능한 것으로 알았는데 그게 아닌가보다.

와인터널은 시간에 따라 입장객에 따라 개방이 되는 곳인 것 같다.

사진의 왼쪽에 보이는 좁은 길이 대적사로 들어가는 길이며 오른쪽이 와인터널의 입구인데 내가 사진을 찍은 곳은 와인터널의 관람객을 위하여 만들어놓은 커다란 주차장이다.

 

 




청도의 두 번째 답사처로 정한 운문사.

운문사에 대해선 기회가 닿으면 다시 세세하게 쓰려하니 이곳에선 언급하지 않겠다.

 

 




운문사를 돌아보고 청도의 세 번째 답사처인 금천면으로 왔다.

청도군 금천면 박곡리.

박곡리엔 보물로 지정된 박곡리석조석가여래좌상이 있고 비지정인 탑과 광배가 있다.

 

석불을 모신 전각인 듯 싶은 건물이 보이는 한적한 찻길가의 풍경이 아련하다.

 

 




파란 가을하늘과 옛정취 고스란히 묻어 있는 담장너머로 붉은 감을 주렁주렁 매달고 있는 감나무가 보인다.

박곡리석불이 모셔진 전각은 문이 닫혀 있었다.

잠겨져 있는 것은 아닐까.

 




 

가끔이라도 찾는이를 배래해서였는지 석불이 모셔진 전각을 둘러치고 있는 담장의 문은 열려 있었다.

문 닫힌 작은 전각에 모셔진 듯 싶은 불상보다 모습 온전치 못한 탑이 먼저 반긴다.

감나무와 참 잘 어울리는 풍경.

 

 




청도박곡동석조석가여래좌상(淸道珀谷洞石造釋迦如來坐像)

머리부분이 심하게 손상되어 잘 알아 볼 수는 없지만 불상전체에서 온화한 기운이 느껴진다.

참 편안한 부처님이다.

가을하늘의 빛과 가을 오후의 햇살이 석불 대좌에 부시게 머물러있어 잠깐 실눈이 된다.

 

 




불상의 크기에 비해 턱도 없이 좁은 전각안이지만 불상의 뒤로 돌아가 볼 수는 있었다.

밋밋한 여느불상의 뒤태와는 달리 박곡리석불의 뒷모습은 세심한 장인의 손길을 느낄 수 있을만큼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다. 

등뒤로 감아내린 법의의 긴자락이 겹쳐 흘러내린 모양새는 가을바람에 금방이라도 하늘거릴 것 같은 이 불상은 보물 제203호로 지정되어 있다.

 




 

석불이 모셔진 전각의 모퉁이에 서서 탑과 광배를 바라본다.

 

 




전각안에 모셔진 불상이 신라시대에 조성된 것인데...

1층 몸돌과 지붕돌만 온전한 이 탑은 단층의 기단에 우주만 새겨져 있을 뿐 아무런 장식없이 소박하다.

고려시대에 세워졌을 것이라 추정만 할 뿐 탑에 대한 자세한 자료는 거의 없지만 적어도 석불과는 무관한 탑인 듯 싶다.

그러면 뭐 어떠랴.

불상을 보고자 찾아와서 이렇듯 탑까지 만났으니 더 이상의 것을 바란다면 그것도 욕심에 다름아닌 것이다.

 




 

탑의 뒷쪽 담장 한켠에 놓여진 광배.

주형 .신광에 덩굴문, 두광을 갖춘 광배는 온전한 모양이었다면 매우 아름다웠을 것이며 그 크기 또한 대단했을 것 같다.

곁에 있는 전각안의 석불도 손상되지 않았으면 분명 광배를 갖추고 있었을 것이지만 이 광배는 아니라고 한다.

 

 




서글프게 맑고 푸르고 볕 따사로운 가을날이다.

 

 




오후 두시 반.

석불이 모셔진 박곡동에서 가까운 거리인 대비사로 왔다.

 




 

주차장에서 약간 올려다 보이는 건물의 옆면을 따라 빙 돌아들면 대비사 절마당에 닿는다.

 




 

에고에고~어찌 이리도 꼬질꼬질할꼬~

하기는 누가 오거나 말거나 이렇게 아무대나 퍼질러 누웠으니 그럴만도 하지.

볕 좋은 이 가을날  절마당에 따신물 담긴 커다란 고무통 하나 놓고 녀석을 비누칠해 벅벅 씻겨주고 싶다~ㅎ

 

 




「호거산 운문사 사적기」에 의하면 대비사는 567년(신라 진흥왕 28)에 창건되었는데 창건주의 이름은 알 수 없고 557년(진흥왕 18) 한 도승이 운문산에 들어와 현재 금수동 북대암 자리에 초암을 짓고 3년 동안 수도하더니 홀연히 득도하여 도우 10여명과 산세의 혈맥을 검색하고 다섯 개의 갑사를 짓기 시작해 7년 만에 완성하였는데 산 중앙에 대작갑사, 동쪽에 가슬갑사, 남쪽에 천문갑사, 서쪽에 소작갑사, 북쪽에 소보갑사를 각각 지었으며 이중 대작갑사가 지금의 운문사이고 소작갑사가 대비사라고 하는데 고려시대 이전에는 박곡리 마을에 있었으나 고려시대에 지금 있는 자리로 옮겨왔단다.대비사 대웅전은 16세기 경에 세운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니 조선 초기에서 중기에 걸친 양식 특징을 살필 수 있는 건축물이다. *문화재청자료 참고*

 

대비사에선 대웅전을 각별하게 살피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했던 것은 법당문에 드리워진 방충망을 들춰볼 엄두를 내지 못했기 때문.

법당문에 달아놓은 방충망에 대한 언짢은 기억이 있어 더욱 그러했다.

고창 문수사.

문수사 대웅전문에 설치된 방충망을 들춰보다가 혼쭐이 났던 기억은 나에게 그만큼 큰 충격이었던 것이다.

 

 




참 이쁘고 여유로운 풍경.

나만 그런 줄 알았는데 모두들 그랬나보다.대비사를 다녀온 사람의 사진들을 보면 이 풍경은 빠지지 않고 꼭 있더라는.

사랑하는 맘이 있으면 그 정서도 비슷해지나보다.

 

 




법당 옆 한켠에서 느른하게 낮잠을 즐기던 야옹이가 발자욱소리에 놀란 듯 고개를 일으키고 눈을 맞춘다.

보실보실한 털을 만져주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지만 그건 내 생각이고...

 




 

주차장에서 빙돌아 절마당에 들어왔었는데 들어올 땐 몰랐던 절마당 가운데에서 보이는 작은 계단을 내려오니

수세미덩굴이 작은 터널을 이룬 길이 있었다.

왜 들어올 땐 몰랐을까.

대비사 절집사람들의 알뜰한 손길이 느껴지는 길을 따라 내려오며 다음의 답사처를 생각한다.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길 건너편에 보이는 대비사부도밭.

 

 




괜시리 마음이 바쁘다.

매전면으로,장연사터를 찾아가는 맘이 바쁘다.

장연사터엔 뭔지는 꼭 꼬집어 말 할 수는 없지만 무언가가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아 맘이 더욱 급해진다.

 

대비사가 있는 금천면에서 장연사터로 가는 길목

매전면엔 그냥 지나칠 수 없게 만드는 희귀한 소나무가 자동차를 세우게 한다.

매전면 처진 소나무.

 

 




처진 소나무는 소나무의 한 품종으로 가지가 밑으로 축 처진 모습을 하고 있으며 그 숫자가 그리 많지 않다고 한다.

매전면 동산리의 처진 소나무는 나이가 200살 정도로 추정한다.

이 마을에는 옛날 어느 정승이 이 나무 옆을 지나는데, 갑자기 큰 절을 하듯 가지가 밑으로 처지더니 다시 일어서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아무리 장연사터가 나를 바쁘게 불러도 이곳을 지나치면 안된다.

답사까페 주인장이 신신당부하며 빼놓지 말라했던 장연사터 불상이 있는 곳.

매전초등학교.

 




 

불상은 매전초등학교 운동장 한 켠 시원한 나무그늘 아래에 있었다.

 

 




오랜 세월탓인지 장연사의 지난한 굴곡의 내력 때문인지 석불은 쉬이 표정을 읽을 수 없을 만큼 마모가 심하지만 둥글둥글한 모습에서 외할머니의 온화한 심성이 느껴진다.어쩌다 폐허가 된 절터 감나무밭의 탑 곁도 아니고 건너편의 당간지주 곁도 아닌 이 곳 학교운동장에 오게 되었는지...

매전초등학교엔 이 석불 말고도 장연사터의 각종 부재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담장에 걸린 발간 감과 초록의 학교문패가 "여긴 감의 고장 청도입니다" 하는 것 같다.

 

 




드디어~ 그리도 그리던 장연사터에 도착했다.

4년 만이다.

 

 




사람이 이렇게 그리웠으면 그 기간을 어찌 견뎠을까...

변하는 것이 사람이고 움직이는 것이 사랑이라고 했던가.

오래토록 변함없이 그자리에 말없이 기다려주는 옛님은 그래서 귀하고 아름답다.

 

장연사지 삼층석탑 둘.

많이 보고싶었고 많이 그리웠었다.

초겨울 첫 만남때는 아릿해서 안쓰럽다는 생각까지 했었는데 깊은 가을에 만나는 장연사지탑은 늠름하기조차하다.

탑이 나이가 들었는지 내가 나이를 먹었는지 아니면 풍성한 계절 탓인지.

 

 




4년 전 이곳에 왔다가 놓치고 그냥 가서 내내 후회를 했던.

장연사지 당간지주.

붉은 감 잔뜩 달고 있는 감나무밭 사이에 부러진 채 되똑하니 서 있다.

 

 




길 건너편 과수원에 나란히 서 있는 삼층석탑과 같은 시기인 신라말기에 세워졌을 것이라는 추측하는 장연사지 당간지주는  

두 지주 모두 지주 상단부가 절단되었는데,이중에서 지주 상단부의 일부가 마을 입구에 있는 이씨 종친회의 사당인 사원재에 옮겨져 있다고 한다.

 

 




상부가 부러진 당간지주지만 당간에 새겨진 문양은 처음처럼 아름답다.

내 어릴적 안방에서 보았던,혼수로 어머니를 따라온 장롱 모서리에 아름답게 꾸며진 백통장식처럼.

 

 




두 기둥 모두 온전치 못한 당간지주를 안타깝고 또 안타까워하면서 돌아나오는 발걸음이 아쉽다.

 




 

사실은 내 상상속의 장연사터는 이런 모습이 아니었다.

언젠가 이파리 다 떨어내고 빨간 감만 매달린 감나무를 배경삼은 장연사터 삼층탑을 사진으로 본 적이 있다.

그 황홀한 모습이라니...

그런 풍경을 상상하고 내달려왔는데 아직은 조금 이른가보다.

멀리서 보이는 두 탑의 모습을 사진기에 담으려했는데 무성한 감나무잎이 좀처럼 비켜주지 않는다.

두 탑의 모습을 온전히 사진기에 담기는 내 실력이 역부족이다.

 

 




당간지주가 있는 감나무 밭 앞에서 볼 때 두 탑 중 오른쪽의 탑은 지붕돌만 겨우 보일 뿐.

 

 

 



4년 전 12월 초입에 찾았던 장연사터.

진눈깨비 날리던 그날의 아련함이 새삼 가슴을 쓸어 내리게한다.

 

 




장연사터에 있었다던 배례석을 찾아 마을로 들어왔다.

 

 




그래~변함없이 그자리에서 기다려주는 것은 귀하고 아름답지.암 그렇고 말고.

오래된 은행나무 아래, 제 있던 자리 잃었어도 자세만이라도 편안해야 마땅할 장연사터배례석.

하지만 배례석은 불평이나 불만이 없을 것이다.

나무그늘에서 고된 일손을 잠깐 쉬는 아낙들의 웃음소리에 미소지을 것이며, 동네아이의 자전거를 맡아 지켜주기도 할 것이고

오가는 사람이나 자동차에도  인사 해야하니 장연사터배례석은 홀로 서 있다고 외로울 것 같지는 않다.

 

 




장연사터탑과 함께 나를 청도로 불렀던 배례석.

노란 은행잎이 이곳에 가득 깔리는 더 늦은 계절엔 그야말로 환상인데...

배례석의 안상과 연화문에 꼭꼭 눌러 눈도장을 다시 찍고 돌아선다.

 




 

배례석이 있는 곳은 길명마을이라 했던가.

4년 전 이곳에 처음 왔을 때 이곳에서 만난 어르신은 동네한바퀴를 돌아 안내하며 이곳 매전면의 특산물인 빨간대추를 한봉지 담아 주셨었다.

지금 다시 그 어르신을 찾아볼까하고 왔는데 그냥 말았다.

시간은 점점 저녁으로 달리고 내 하루 답사의 걸음은 아직 마치지 못했으니 장연사터에 와서 길명마을의 어르신을 찾아뵙고 또 마을어귀에 있다는 사원재도 찾아가 부러진 당간지주의 지주상부도 찾아보려했던 맘을 접을 수 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장연사터에서 너무 시간을 많이 보냈나보다.

그럴 것이라 막연히 추측만 했던 1박2일의 답사일정이 그 추측대로 전행되고 있다.

떠나올 때 첫날의 마지막 답사처가 될 것 같았던 불령사를 찾아가야 한다.

날은 이미 어두워지려 하는데 불령사는 장연사터에서 그리 멀지 않다고 하니 그나마 다행이다.

 





 땅거미가 내려앉은 가을 저녁나절에 찾아 들었던 불령사(佛靈寺).

누가 태백산의 정암사를 제비집마냥 산비탈에 붙어 있다고 했던가.

불령사에 비하면 정암사는 평지사찰이다.

 

주차장에서 가파르게 올려다보이는 불령사는 절마당도 없고,법당을 사진기에 담기도 몹시 곤혹스러울 만큼 좁고 가파른 비탈에 있었다.

 

 




자동차소리를 듣고 나온 상냥하고 자분한 불령사보살에게 인사하고 탑의 위치를 물으니 언덕위를 가리킨다.

보살님이 가르키는 방향으로 한껏 고개를 젖혀 올려다보니 산신각위로 빼꼼하게 탑이 보인다.

 

 




청도군 문화재자료 제294호로 지정된 청도불령사전탑(淸道佛靈寺塼塔)

깍둑깍둑 썰어놓은 깍두기마냥 야무지고 매끈하다.

그런데...

내가 상상으로 그리던 불령사탑은 이런 모습이 아니었다.

이전에 불령사를 다녀온 사람들의 사진이나 답사기에는 정말 이런 모습이 아니었다.

답사를 다녀온 사람들의 이야기로는 불령사전탑은 한창 보수공사중이라고 하긴 했었는데.

탑 앞에는 이렇다할 안내문도 없으니 이 탑이 정말 불령사전탑인가 하는 의심이 가시지 않는다.

이 곳 말고도 또 다른 탑이 있을까?

불령사의 전체적인 절집모양으로 봐서 어디 다른 곳에 탑이 있을만한 장소가 없는데.

탑의 앞쪽은 나무울창한 언덕이며 그 언덕사이로 난 길도 없고 탑의 아래쪽은 절벽이다.

정말 맞긴한건가... 

 



 

 어쨌거나 전탑은 확실한 것 같다.

탑 앞에서서 불령사전탑에 관한 자료를 다시 펼쳐 읽어본다.

'이 탑의 특징은 무늬가 있는 벽돌을 사용한 점으로, 불상과 3층 석탑 무늬가 있는 벽돌로 쌓아 올려 탑 전체를 장식하고 있다'

맞는데...

 





'길쭉한 벽돌의 옆면마다 연꽃받침 위에 앉아있는 3구의 불상과 2기의 석탑이 서로 교차하여 돋을새김 되어 있는데, 이러한 까닭에 이 탑을 ‘천불탑’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것도 맞는데...

 

 



 

보수공사를 하기전의 불령사전탑의 모습이다.(옛님방 탑돌이의 작품을 잠시 빌려왔음)

이런 모습의 사진을 많이 봐왔기에 이런 탑이려니하고 상상했었다.

아~불령사전탑은 매우 좁고 길구나~

그러나 답사자료에 의하면 불령사전탑은 애초에 이런 모습이었다고 확신할수는 없단다.

그렇다고 지금 3층으로 야무지게 깍두기 쌓아놓은 것 같이 아주 알토란 같은  모습이었다고 단정지을 수도 없는것 아닌가.

 

어떤 확실한 근거에 입각하여 불령사전탑이 지금의 모습으로 바뀌었는지는 모르겠다.

나라안에 전탑이 남아있는 경우가 많지 않고 더우기 무늬가 있는 벽돌을 사용한 예는 극히 드문 마당에 이 불령사전탑을 그냥 막무가내로 보수를 하진 않았을게다.모르긴해도 관에서,전문가들의 자문을 거쳐 많은 시간과 비용을 들여가며 이렇게 말끔하게 보수하였을 것이다.

무엇이 바른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하여간 내 느낌으로는 근래에 새로만든 탑같다는 생각만 들었지 너무 다행이라고,애초에 그리하였어야 한다는 생각은 들지 않을만큼 불령사전탑은 너무너무 낯설었다.

허위허위 찾아와서 흐뭇하게 웃을 수 없음이 못내 아쉬웠지만  지금 생경한 탑의 모습도 세월이 많이 지나고 눈에 익어지면 그 땐 또 다른 감흥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내 꽁무니에 붙어 불령사까지 따라왔던 땅거미의 형상이 보이지 않을 만큼 어두워졌을 때 불령사와 작별을 했다.

"이렇게 날 저물었는데, 낯선길을 또 한참을 가야할텐데 걱정이 됩니다~" 하는 불령사 보살의 진심어린 염려에 거듭 고개숙여 감사하며.

 

불령사에서 내려오는 길을 잘못들어 네비도 더 이상은 능력밖이라 퍼진 임도에서 얼마나 헤매었는지 모른다.

날은 저물고 네비는 먹통이고 울퉁불퉁 심하게,자동차 바퀴 제어하기 힘든 포장도 안된 가파른 산길에서...

누가 강제로 시켰으면 시킨사람과 백년은 넘게 원수질.

하느님.부처님을 번갈아 찾았던,십년은 족히 감수를 한 것 같은 청도의 첫날답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