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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처럼 떠나다

경북 청도돌아보기.2 본문

답사.여행 후기

경북 청도돌아보기.2

푸른새벽* 2010. 11. 12. 19:21

 이젠 익숙해 질때도 된 것 같은데 아직도 등에 가시가 박힌 것처럼 낯선곳에서의 하룻밤은 편치 못하다.청도에서의 하룻밤.

이리저리 뒤섞여 아예 희미해진 지난밤의 꿈처럼 청도의 새벽은 안개천지다.일체의 형태와 소리를 삼켜버린 안개.

 

커피 한잔으로 아침을 대신하고 청도군 화양읍 합천리를 향해 안개낀 거리로 나선다.

 

 

떠나오기 전 익히 알고는 있었다.

합천리를 찾아왔던 많은 답사객들의 이야기가 한결 같이 찾기 어렵다는 말을 했었고 위성지도에도 뚜렷하게 표시되지 않은 합천리석불을 찾아 합천리 마을로 들어섰다.네비가 가르쳐주는데로 따라오니 마을을 가로지른 개천위의 다리를 지나야 한단다.

 

합천리에도 날개 거두지 못한 안개가 머물러 있었다.

 

 

 

 

 

합천교를 지나 왼쪽 과수원을 따라 난 좁은 길로 들어서니 복숭아가공공장의 팻말이 있는 막다른 길이다.사람들 왕래가 거의 없는 길가 적당한 곳에 차를 세워놓고 찾아보기로 할 수 밖에.나중에 안 일이지만 합천리석불을 쉽게 찾으려면 이 합천교를 지나자마자 바로 오른쪽길로 들어가야 한다.

 

과수원 안에 있다는 석불을 찾으러,분명 전각안에 모셔져 있다는 석불을 찾으러 자동차를 세워둔 주변의 과수원을 돌고 또 돌다가 아무래도 안되겠다 싶어 과수원 안으로 들어갔다.전각안에 있다하여 멀리서 살펴 보면 전각의 지붕쯤은 보일 줄 알았는데...

 

각종 과실수가 빽빽하고 들어차고 나무들의 이파리, 열매들이 천지를 이룬 과수원 안은 생각과는 달리 시야가 막혀 있어 더더욱 힘이 들었다.어찌할까~ 어찌할까 한참을 망설이다 한 번 더 과수원을 돌아보기로했는데 문득 어디선가 소리가 들렸다.이 이른 아침에 사람일까?속는셈 치고 소리가 나는 쪽으로 가 보았다.사람이 있었다.부지런한 과수원 주인이었다.

 

공손하게 인사하고 이러저러한 일로 과수원 안에 있다는 불상을 찾아왔노라 말했더니 가르쳐 주겠다며 일어서는가 싶었는데 아예 손에 들고 있던 연장을 내려놓고 따라오라며 앞장을 섰다.

"요즘엔 나무가 너무 무성하여 찾기가 상그랍지요"

 

내 자동차가 세워진 곳과는 반대방향에서 이리저리 한참을 돌아서 닿을 수 있었던 곳.

 

 

 

 

 

합천리 석불을 모셔놓은 전각이 있었다.마을 입구에서나 과수원길 중간에 눈씻고 살피고 또 살펴봤지만 한군데도 없었던 안내문이 전각의 곁에 바짝 붙어 서 있다.땀흘리며 어렵사리 찾아온 사람을 맹꽁이 취급하듯.

 

 

 

 

 

석불의 크기에 비해 많이 좁아보이는 전각은 잠겨 있어 촘촘한 살창에 얼굴을대고 들여다볼 수 밖에 없었다.석불의 전신을 사진기에 담을 수 있으려나 모르겠다.

 

 

 

 

 

안개낀 아침에 나를 이곳으로 불러준 청도합천리석조아미타여래입상(合川里石造阿彌陀如來立像)

불상몸체를 따라 길쭉하게 광배가 같이 붙어 있으니 불상과 광배는 돌 하나로 만들었을 것이다.상투를 튼 것 같은 머리모양과 살집많아 보이는 얼굴은 마모되어 그 표정을 자세히 읽을 수는 없고,당당한 어깨와 가슴에 얹은 오른손이 유난히 묵직하고 커 보이지만 흘러내린 소맷자락은 부드럽고 유연하다.

 

합천리 석불을 만나본 시간,아침은 안개사이에서 기지개를 켠다. 

 

 

 

 

 

생각같아서는 합천리석불이 모셔진 전각 앞 축대에서 조금 느긋하게 앉아 있고 싶었다.그러나 이곳까지 일손놓고 나를 안내해준 어르신이 기다리는 것을 알기에 그 느긋하고 싶은 맘을 접었다.석불이 모셔진 전각앞에는 가을이 열려 있었다.푸근하게 익은 호박의 모습을 빌어.

 

 

 

 

 

석불이 있는 곳을 가르쳐 준 어르신의 과수원에서 주은 모과 세 개와 탱자 두 알.아직 물기 가시지 않은 모과와 탱자를 소중하게 품고 합천리를 떠났다.

 

 

 

 

 

안개는 전신주 사이로 갸웃이 고개 숙이며 조금씩 조금씩 아침 밖으로 걸어 나간다. 그림자도 떼어놓고 저 혼자 간다.엇박자로 엮어가는 계절의 손장단에 안개보다 몇 걸음 아침이 밝아온다.

 

 

 

 

 

아침 아홉시 반.청도석빙고를 만나러 화양읍 동천리로 왔다.

 

 

 

 

 

우와우와~!! 보물로 지정될 만하네.

 

막돌로 촘촘히 깐 경사진 바닥의 가운데에는 물이 빠지는 길을 두고 동쪽에 구멍을 만들어, 석빙고 밖의 작은 개울로 물이 빠지도록 하였다는데 천장이 완전히 무너져 불완전한 상태라해도 내가 보기엔 너무너무 놀랍고 근사하다.얼음창고로 지어진 것이지만 단순히 저장의 기능만을 염두에 두고 지은 것은 아닌 것 같다.어찌 얼음창고가 이리 멋질 수 있단 말인가.

 

 

 

 

 

강아지풀이 갸웃거리는 축축한 풀밭에 엎드려 석빙고를 올려다본다.옛모습이 온전하지 못한채로,이렇게 무너져 내린 옛님을 옷 다 적시는 것 아랑곳 않고  엎드려 바라보며 흐뭇해하는 내가 진정 이상한 사람일까.

 

 

 

 

 

살 다 발라먹은 생선의 등뼈 같다는 생각이 드는 청도 석빙고는 조선 숙종 39년(1713)에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하며, 보물 제323호로 지정되어 있다.

 

 

 

 

 

청도군 화양읍에는 청도석빙과 말고도 돌아볼 곳이 서너군데는 더 있다.청도 석빙고에서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는 청도향교.주차장이 있는 곳에서 조금 돌아들면 청도향교에 진입할 수 있는 문이 있는데 문이 잠겨 있다.하는 수 없이 이 돌담을 따라 돌아보기로 했다.어딘가에 들어가는 문이 또 있을 것 같은 생각에.

 

 

 

 

 

주차장에서 향교담을 빙돌아 보니 담장의 일부가 헐려 있었다.이곳이 원래 입구였는지 안내판이 서 있긴한데...아무려나 사람이 드나들기 위해서 그리 했지 싶다.

 

 

 

 

 

허물어진 담장을 통해 향교마당으로 들어가려는 내게 딱 걸린 풍경.이런 풍경 만나기 쉽지 않지 싶어 사진기에 담았는데...아쉽다.자연이 베푸는 이 거룩한 풍경의 맛을 제대로 살리지 못한 것이.

 

 

 

 

 

향교의 마당을 들어서니 가장 먼저 눈길이 가는 곳.명륜당의 입구인 사락루(思樂樓)가 높직하다.

 

 

 

 

 

사락루(思樂樓)의 앞에는 이렇게 자그맣고 귀여운 문이 있는데 지금이야  향교마당 아무방향에서라도 누하진입이 가능하지만 예전엔 이 문을 통해서 사락루로 들어갔을 것이다.

 

 

 

 

 

자그마한 문을 통해서 보이는 누각은 작지 않다.

 

 

 

 

 

사락루(思樂樓) 현판.

 

 

 

 

 

청도향교의 강학공간인 명륜당.

 

 

 

 

 

명륜당의 편액.사락루처럼 푸른 바탕에 흰 글씨다.

 

 

 

 

 

기숙사인 동재와 서재가 명륜당을 중심으로 양쪽에 도열하듯 자리하고 있다.

 

 

 

 

 

저기 흙담장의 가운데 작은 문이 보이니 가지런한 박석이 깔린 길을 따라 서재의 옆을 돌아가 본다.

 

 

 

 

 

청도향교의 제향공간인 대성전.

그런데 좀 이상하다.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명륜당과 대성전이 나란하다니.여지껏 보아왔던 전국의 많은 향교에서와는 확연히 다르다.보통 향교의 건물배치는 전묘후학(前廟後學)이나 전학후묘(前學後廟) 였는데...청도향교는 강학공간인 명륜당과 제향공간인 대성전이 나란한, 이를테면 좌학우묘(左學右廟)의 배치이다.

 

 

 

 

 

거리낌 없이 웅혼한 필치로 씌어진 대성전 편액.

 

 

 

 

 

대성전 좌우에 나란한 동무(東 廡)와 서무(西 廡).이곳은 여러 유현(儒賢)들의 위패(位牌)를 모셔둔 행각(行閣)이다. 

 

 

 

 

 

애초에 외삼문을 통과해서 향교에 들어야 하는데 어떻게하다보니 돌아보는 동선이 뒤죽박죽이 되었다.명륜당과 대성전을 살펴보고 다시 사락루를 통하여 밖으로 나왔다.

 

 

 

 

 

이제서야 눈에 들어오는 내삼문.익히 보아왔던 것처럼 태극문양이 선명하다.

 

 

 

 

 

내삼문에 걸린 편액도 참 특별하다.여러고장의 향교를 돌아봤지만 향교의 내삼문에 이렇게 편액이 달린 곳은 많지 않은데...

 

청도향교는 조선 선조 원년(1568)에 군수 이선경(李宣慶)이 고평리에 건립한 것을 인조 4년(1626)에 군수 송석조(宋碩祚)가 합천리로 옮겨 세워졌으며 그 후 홍수량이 다시 중수하였는데 이후 5-6차례의 중수를 거쳐 영조 10년(1732) 9월에 군수 정흠선(鄭欽先)이 현재의 위치로 이건한 것이다. 일명 화양향교라고도 하는데 설총(薛聰), 안유(安裕), 이황(李滉), 이율곡(李栗谷), 최치원(崔致遠), 이언적(李彦迪) 등 유현(儒賢) 18 현을 배향하고 있는 유서깊은 곳이다. 

 

 

 

 

 

강학공간과 배향공간이 나란한 청도향교에서 새삼 향교의 건물배치가 전학후묘니 전묘후학으로 한정된 것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곳곳에 이리도 배울 것이 많으니 어찌 답사의 걸음 쉬이 멈출 수 있단 말인가.

 

 

 

 

 

청도향교를 돌아보고 같은 화양읍에 있는 청도 도주관으로 왔다.청도척화비는 조선시대 청도군의 객사인 도주관의 입구에 서 있다.

 

 

 

 

 

척화비란 조선 고종 때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승리로 이끈 흥선대원군이 서양사람들을 배척하고, 그들의 침략을 국민에게 경고하고자 서울 및 전국의 중요한 도로변에 세우도록 한 비로, 이 비도 그 중의 하나이다.

 

 

 

 

 

청도척화비는 청도 도주관 앞에 세워져 있다.척화비를 살펴보고 도주관으로 눈을 돌려보니 공사가 한창이다.

 

 

 

 

 

도주관의 출입문은 잠겨 있었다.도주관 담장안쪽에선 쉼없는 기계소리와 연장소리 그리고 사람들의 소리가 섞여 요란하니 분명 이곳말고 다른 출입구가 있을 터이다.

 

 

 

 

 

도주관 출입문에서 오른쪽 담장을 끼고 돌아오니 도주관담장 한켠이 틔어 있었다.틔어 있는 담장사이로 공사차량과 공사관계자들이 드나드는 모양인데 각종 공사자재들로 어지러운 마당 한켠엔 비석들이 눕혀져 있었다.비석의 모양새를 보아하니 아무아무개의 공덕비같다.

 

 

 

 

 

날개를 편 듯 시원하게 치켜진 도주관의 우익사 지붕처마가 우람하다.통상 중앙부서의 관리가 이곳에 오면 문관은 동익사에 무관은 서익사에 머무르며 각종 연회나 회합이 동익관에서 베풀어지기 때문에 여느고장의 객사에서나 항시 동쪽 건물이 서쪽의 것보다 훨씬 넓고 크다.청도도주관도 마찬가지다.

 

 

 

 

 

얼마전 보수공사를 마쳣다는 서익사.동익사보다 한 단 낮게 지어졌다.근래에 손을 보아서 그런가 익숙하고 부드러운 맛은 없지만 산뜻하기는 하다.

 

 

 

 

 

임금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나 대궐을 상징하는 궐패(闕牌)를 모시고 임금에 대한 예를 행하는 장소인 도주관 정청.

한창 공사중이다.

 

 

 

 

 

 

2010년 12월 중순에나 공사가 끝난다고 하니 그 이후엔 단정하게 정리된 도주관의 모습을 온전하게 살펴 볼 수 있을것이다.

 

 

 

 

 

도주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 청도동헌이 있다길래 달려왔더니 초등학교 운동장이다.화양초등학교.운동장 한쪽에 높직하니 건물이 보인다.

 

 

 

 

 

조선 영조 13년(1737) 경에 지어졌고, 1956년 경 지금의 위치로 옮겨 다시 지었다고 하는 청도동헌.

 

 

 

 

 

감의 고장 청도의 인심을 넉넉하게 보여주는 풍경.잘 익은 감이 조르르 앉아서 까치를 기다리고 있다.

 

 

 

 

 

동헌건물의 정면인데 편액은 걸려 있지 않다.

 

 

 

 

 

 

1956년 경 지금의 위치로 옮겨 다시 지었다는데 단청이나 건물의 전체적인 모양새로 보아 그 보다 더 지난후에 손을 본 것 같은 느낌이 들만큼 건물은 산뜻하다. 원래 동향 건물이었다고 전해지나 옮겨 지으면서 서향으로 바뀌었다는 청도동헌. 동헌건물은 업무를 보는 공간과 주거의 공간이 공존하기에 관심이 많은 편인데 사람냄새는 어디에서도 맡을 수 없었던 청도동헌이었다.

 

오전 10시가 훌쩍 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