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바람처럼 떠나다

전북 익산 돌아보기.첫 날 본문

답사.여행 후기

전북 익산 돌아보기.첫 날

푸른새벽* 2014. 4. 3. 12:20

 

익산은 약 7년전에 두어 번 갔던 고장이지만
그 때는 많이 알려진 미륵사지와 앙궁리탑 때문에,또 화산성당을 돌아보는 것으로 만족을 했었다.그런데 답사걸음 시작한지 여러해 되고 또 답사발걸음 잦아지다보니 익산이란 고장이 미륵사지와 왕궁리와 화산성당이 모두는 아니라는걸 절실히 깨달았지만 전국을 통틀어 가본 곳 보다 가보지 않은 고장이 더 많으니 두어번 답사걸음 한 고장을 다시 찾는다는게 쉽진 않았다.그러기에 나에겐 아쉬움이 많은 고장이었다.


거의 십여년 동안 천방지축 아무것도 모르면서 무조건 샅샅이 훑고 만 다닌 답사걸음에 멀미를 느껴 삼년이 넘도록 답사 걸음 쉬고 있었는데 올해부터는 다시 틈 나는 대로 나서보려 작정하고 가장 먼저 떠 올렸던 고장이 쌍정리 당간지주가 있다는 익산이었다.
  
내가 돌아보고 찾아 본 익산의 옛님에 대해서는 <절집.절터>.<풍경소리>.<바람소리>게시판에 세세하게 포스팅 했으니 생략하기로 하고 이번 익산답사에서 느꼈던 소소한 이야기들이나 해 보려한다.






일주문 편액을 보니 미륵산 석불사다.
미륵산은 드넓은 김제와 이웃하고 있는, 산이라불릴만한 산다운 산이 전무하다시피한 익산의 진산이다.미륵사지도,석불사도,태봉사도...모두 그런편이다.


자동차가 많이 다니는 도로변의 아담한 석불사지만 사천왕상이 거하게 그려진 일주문은 야무지다.이곳에는 보물 제45호로 지정된 연동리석불좌상이 모셔져 있다.






석불초등학교는 석불사 뒷 담장을 끼고 들어 가면 되나보다.








익산연동리석불좌상(益山蓮洞里石佛坐像) 
보물로 지정된 백제시대의 불상이다.






태봉사 역시 자동차도로변에서 가까이 있지만 석불사처럼 야무진 일주문도 사천왕문도 없다.







태봉사엔 백제시대에 조성되었다는 익산시 유형문화재 제12호인 삼존석불이 하얗게 분을 뒤집어 쓰고 계시다.





심곡사 주차장에서 올려다보면 명창의 반열에 든 분이 이곳에서 득음을 했다는 커다란 안내판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익산의 절집은 숭림사가 가장 큰줄로만 알았는데 심곡사도 만만치 않은것 같다.






문화재로 지정된 대웅전과 칠층석탑과 지정문화재는 아니지만 살펴봐야 하는 부도밭...





오히려 나한전의 나한상들이 더 기억에 남는다.문득,숭림사 나한전이 생각난다.


익산답사의 동선을 따라 망성면으로 향했다.




사적 제318호로 지정된 화산성당은 먼젓번 답사에서 샅샅이 둘러보았지만 성당 뒷편의 동산엔 올라보지 못했었다.
이번엔 일부러가 아니라 이 동산 윗쪽의 마애불을 찾아보려면 지나갈 수 밖에 없었는데 성모동산이 여기 있었다.


날나리 가톨릭이라도 성모님께 초 한자루는 봉헌하는게 기본이지.우리 가족수 대로 초를 사서 성모님앞에 봉헌하고 잠시 기도도 했다.물론 봉헌초 값은 봉헌함에 넣었고... 





마애불이 새겨진 바위앞은 낭떠러지에 겨우 좁좁한 길이 있을 뿐이어서 사진기에 그 형체를 담기가 매우 힘들었다.익산답사를 위한 자료를 준비하면서 각종 포털에 게시된 화산리마애삼존불 사진을 살펴보았는데 거의 모두라 할 만큼 그 형체를 잘 알아볼 수가 없었다.


8년동안 마르고 닳토록 사용해 이젠 늙어버린 내 사진기가 과연 이 마애불의 형상을 잘 담아낼 수 있을지 걱정이 되긴했어도 아무튼 열심히 사진기에 담긴했다.


마애불을 뵙고 내려오는 길에는 예수 고난의 생애가 매우 사실적으로 조각된 '십자가의 길'이 있다.





성당면 갈산리의 남궁찬 묘석상.


남궁이란 성씨를 가진 후손들의 조상묘역이 잘 정돈되어 있었는데 문화재로 지정된 석상을 찾기는 어렵지 않았다.
문화재로 지정된 석상은 상당하게 우람한 모습으로 묘역앞에 서 있었지만 먼저 내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이 문인석이였다.


문인석을 살피기전 나는 묘석상에 관한 안내문이나 내가 챙겨가지고 다니는 자료를 들여다보지 않았다.하루 한곳만 돌아보는 답사라면 내가 만나볼 옛님에 대해 세세히 공부하겠지만 2박 3일 동안의 답사에서 살펴볼 옛님만도 서른에 가까우니 남궁찬 묘석상은 찾아봐야 할 곳이라고만 인지하고 있었을 뿐이다.그런데 보통 옛님을 만나게 되면 그 앞에서 자료를 들춰보거나 옛님 앞에 세워진 안내문을 읽어본다.이곳에서는 자료도 안내문도 일부러 읽어보지 않았던 것은 바로 이 문인석이 가슴에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들고 있는 홀 때문이었고 내 기억력을 시험해보고자 하는 마음도 함께였다.


홀(笏)이란 국가의식때에 신하가 두 손에 모아 쥐고 임금 앞에서 예를 갖추었던 패로 이 홀은 상아로 만든 것이며 홀은 평상시에 관복의 허리에 차고 다녔으나 전시에는 홀에 왕의 지시사항을 적기도 했다고 한다


이 문인석의 홀을 들고 있는 모양새를 보며 나는 남궁찬묘석상은 조선전기의 것이란 확신을 가졌고 내 확신은 틀리지 않았다.


6년 전 구리의 동구릉을 돌아보며 알았던 것인데 조선전기의 문인석은 홀을 턱에 바짝 붙여서 들고 있으며 조선 중.후기로 넘어 오면서 점차 문인석의 홀은 허리까지 내려오게 된다는 것을 그 때 배웠다.






묘역임을 알려주는 입구의 아주 자그마한 낡은 보호각에 자꾸 눈길이 갔다.조선시대의 효자 남궁관의 효자비가 모셔져 있는 정려각이다.


남궁관은 조선후기의 효자로 본관은 함열(咸悅), 대제학(大提學) 남궁찬(南宮璨)의 후손, 남궁순(南宮洵)의 아들이다.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76호로 지정된 묘석상보다
반질반질한 배롱나무가 호위하듯 서 있고 낡은 블록담으로 둘러싸인 아주 작은 보호각.익산답사를 마치고 돌아 온 후에도 가장 기억에 남는 이쁜 정려각이다.





성당면 갈산리를 떠나 다음으로 찾은 곳은익산에서 그래도 규모가 큰 절집 숭림사.7년 전 숭림사를 찾았을 때의 모습과는 많이 달라졌음을 느꼈다.


절집을 드는 입구의 고즈넉했던 흙길도 이젠 모두 시멘트로 포장 되어 있었고 꽤 넓었다고 기억했던 개울도 그 폭이 많이 줄어들었으며 무엇보다 절집입구 바닥 한켠에 옹기종기 모여 있었던 부도들은 높직한 석축 위에 잘 모셔져 있었다.


숭림사는 아직도 공사중이며 보광전은 보물로 지정되어 외부도 사진촬영 절대 할 수 없다는 절집사람의 냉랭하고 매서운 눈초리에 "그렇게 보물인 법당을 누가 업어가면 어쩌려구 이렇게 그냥 놔두냐~ ". 둘레에 철책이라도 치고 몇만볼트의 전류라도 흐르게 해 놓지" 하는 못된 생각을하며 요 앞에서 만났던 익산의 다른절집들의 인심과는 전혀 다름을 생생하게 실감했다.





문화재로 지정은 되었으나 보물의 반열에는 들지 않아 경계를 덜하는지 어쩐지 사진기를 든 채 들어가도 아무런 제지가 없는 나한전은 편하게 살펴볼 수 있었다.


보광전 내부를 살펴보지 못해 서운했지만 7년전이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고운 나한전의 이쁜 동자상에 눈맞춤 할 수 있었음에 만족하고 숭림사를 돌아나왔다.



 


바람이 많은 3월 중순의 오후.
절집사람 불친절한 숭림사를 떠나 다음으로 찾은 곳은 익산시 여산면 제남리에 위치한 남원사.

답사까페에서 먼저 다녀간 분들이 모두 입을 모아 했던 말. '익산 남원사 스님은 참 친절하시다.'

그 말이 예외는 아니었다.절집으로 드는 인기척소리에 스님은 함박 미소를 지으며 나오셨다.멀리서 이렇게 찾아와 주셔서 감사하다시며 미륵전의 문을 그냥 열어주시며 미륵님 자랑을 하셨다. "스님 고맙습니다."





익산 남원사미륵불좌상(南原寺 彌勒佛坐像)
지정된 문화재는 아니지만 답사객들은 꼭 찾아보는 미륵불이다.






남원사에는 미륵불 뿐 만 아니라 이렇게 온전치 못한,희멀쭉한 오층석탑도 있다.


한가지 아쉬운 점이 있었다면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88호로 지정된 미륵전은 보수공사가 지나쳐 옛맛을 하나도 느낄 수 없었다는 것...





그래도 남원사에서 애교스런 건축물하나를 발견했다. 해우소입구의 요 깜찍한 문.누구의 생각이고 솜씨였을까? 마치 해인사 장경각을 드나드는 월문같다고 느꼈다면 좀 오버한것이려나~ㅎ






문이 닫혀있을거라는 내 짐작과는 달리 무슨 좋은 운이 닿았는지 향교문은 열려 있었다.





향교의 배치가 전학후묘인 곳에서는 이런 느낌이 참 좋다.명륜당을 돌아서 대성전으로 향하는 계단이 보이는 풍경.
내삼문이 열려있으려나...






오늘 정말 운이 좋은 날인가 보다.

여산향교 대성전은 정면 세칸이 모두 판문이며 맞배지붕에서 흔히 보듯 측면엔 풍판을 달았다.녹색과 붉은색의 조화가 이렇게 단정하게 느껴졌음이 매우 신기하다.





나는 이런 건축물을 좋아한다.나는 이런 건축물의 색감을 좋아한다.


운이 좋아 여산향교를 대성전까지 잘 돌아는 보았는데 향교를 막 들어서면서부터 향교전체를 휘감아 내 코를 자극해 역겨웠던 냄새는 향교를 모두 돌아보고 난 후까지 계속 후각을 괴롭혔다.


분명히 짐승의 털을 태우는 냄새.그랬다.아직 복날은 멀었는데...




여산동헌의 느티나무가 전라북도 기념물로 지정까지 되었다니 여산동헌에선 반드시 느티나무를 놓치면 안된다는 강박관념 때문이었을까.여산동헌 가까이 자동차를 주차하고 나니 바로 커다란 나무가 눈에 띄었다.옳거니,바로 저 나무인가보다하고 참 여러장의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사진에 보이는 계단으로 올라가보니 여산동헌은 보이지 않고 나무앞의 표지석에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는 문구는 없었다.아닌가? 





안내문을 보니 백지사터.가톨릭성지다.

나는 이번의 익산답사를 계획하면서 백지사터는 전혀 자료도 없었고,아니 안중에도 없었다는 표현이 맞다.돌아와 답사기를 정리하면서 그제서야 백지사터에 대해 알았고 또 부끄러웠다.날나리가 괜히 날나리랴...

백지사(白紙死)터 성지는 여산동헌에서 내려다 보이는 곳으로 대원군 집정 때인 1866년 병인 박해가 계속 진행되어 대학살이 감행되는 동안 천주교 신자들을 처형한 곳이라고 한다.백지사라는 뜻은 얼굴에 물을 뿜고 백지 붙이기를 여러번 거듭하여 질식사시키는 방법으로 일명 '도모지사(塗貌紙死)' 라고도 하며 쇄국 정책의 분노와 증오에 양심과 신앙 자유가 질식한 곳이라고...

백지사터에선 느끼지 못했던 숙연함이 이 답사기를 쓰는 내내 나를 옭아매는 듯 했다.






어쩌나...익산답사에 여러가지로 도움을 주고 동선을 안내했던 지인이 손짓을 했다.






백지사터와 인접한 담장 한켠이 허름하다.이 담장을 지인은 훌쩍 넘어들어갔다.나도...





 

나는 동헌건물을 좋아한다.동헌건물은 업무를 위한 장소이지만 또한 쉼의 공간이기도 하다.답사를 다니며 만났던 거개의 동헌건물은 모양새가 대동소이했다.단청을 하지 않고 소박한 기둥이나 대청마루나 지붕대들보가 그대로 드러난 천장이라든지 창호의 문살무늬가 참 매력적이다.





 

여산동헌 마당 한켠에는 각종 선정비와 영세불망비들이 즐비하다.그 가운데 유독 세간의 관심을 받고 있는 비석한 기.







여산척화비
洋夷侵犯非戰則和主和賣國 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서양 오랑캐가 침입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해를 하자는 것이니, 화해를 주장함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해서 그렇게 가톨릭교도들을 박해하였던가.

수많은 가톨릭교도들이 탄압을 받고 죽임을 당했다는 백지사터 바로 위 동헌건물 한켠에 척화비가 세워져 있다는 아이러니...





 

익산시 문화재 자료로 등록되어 있는 동헌앞 느티나무.


느티나무는 가지가 넓게 퍼지며 잎이 무성해 그늘이 아주 시원하다.그래서인지 땀 냄새를 쫓는 모기도 느티나무 아래에는 들지를 않는다고 한다.이러한 까닭에 시골 아낙네들은 여름 한낮에 느티나무 그늘에서 아기를 재운다고 한다.

느티나무는 다른 어떤 나무보다 인기가 높다.옛날 우리의 선조들은 소나무로 만든 관에서 태어나 소나무로 만든 가구를 놓고 살다가 소나무로 만든 관에 들어가 죽는다고 한다.하지만 부유한 양반네들은 느티나무로 만든 집에서 태어나 느티나무로 만든 가구를 놓고 살다가 느티나무로 만든 관에 실려 이승을 떠난다고 하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이니...

그렇게 우리네 살림살이로 우리 곁에서 오랜 세월을 지내온 나무가 느티나무이다보니,사람들의 소망과 기원까지 담아내곤했다.이를테면,느티나무에 잎이 돋아나는 모습을 보고 그 해 농사가 풍년인지,아닌지를 점치기도했다고 한다.

느티나무를 흔히 '정자나무'라고도 한다.마을 어귀나 집 주변에 묵묵히 서서 수백 수천 년 동안 마을 사람드의 크고 작은 일들을 모두 지켜보며 자라기 때문이다.사람들은 느티나무 앞에서 온갖 이야기들을 풀어내기도 하니 마을 어귀에 있는 느티나무에는 어김없이 애잔한 전설들이 얽혀 있는게 아닐까.(고규홍 지음 '나무이야기'에서 인용)


여산동헌의 이 느티나무는 어떤 나무보다도 더 많은 이야기와 사연을 알고 있을 듯하다.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빼앗긴 현장인 백지사터를 내려다보고 있으니...





 

사적 제87호호 지정된 익산시 석왕동의 쌍릉.
말 그대로 달랑 무덤 두 기가 모두다.무덤에는 무인석과 문인석이 있고 여러가지 동물상들이 도열해 있을거라 생각했던 것은 조선시대 왕릉만 보았던 내 좁은 생각과 시야탓이었다.


익산 쌍릉은 출토유물은 없지만 무덤 안의 구조로 보아 백제 후기의 것이 틀림없으며,근처에 미륵사가 있어서 미륵사를 처음 만든 백제의 무왕과 그 왕비인 선화공주의 무덤일 것으로 짐작되고 있으나,뚜렷한 증거는 없다고 한다.




 

익산 쌍릉을 떠나 자동차로 거의 이십여분을 헤맨 끝에 만나게 된 덕기리 석불입상.
비딱하게,위태롭게 누워계셨다.

우리 문화재의 현주소가 그렇다지만 이렇게 비지정문화재의 현실은 참담하기 그지없다.덕기리 석불입상에 관한 자료는 아직 나에게 없고 아직 문화재를 바라보는 눈이 어설프니 시대나 형식조차 가늠을 못하겠다.

다 망가져 탑이라는 모양새마져 유추하기 힘든 돌덩어리에 불과한 것도 애지중지 보살피며 귀히 여기는 고장도 많은데
근사하게 치장해놓길 바라는것은 아니라도 제발 이 석불을 편안하게 세워놓기라도 했으면 좋겠다는 절절한 마음으로 발길을 돌렸다.





 

길어졌다고는 해도 아직은 바람이 차가운 3월의 해는 오후 여섯시 반을 넘기니 어느새 뉘엿뉘엿해지려 한다.


저 멀리 왕궁리오층탑이 보인다.답사걸음 시작할 초기에 내 애인삼은 탑이지만 이제는 그냥 바라보면 좋은 탑이지만 애인은 안한다.너무 잘생겨서,너무 인기가 많아서, 너무 많은 여인네들이 탐을 내니 애인 지키려고 애먼글먼해야 하는 그 피곤함을 견뎌낼 재간이 나에겐 없다.옛날애인이었던 왕궁리탑은 내일 만나볼 것이다.


2박 3일간의 답사여정의 첫날을 왕궁리 탑을 아득하게 바라보며 마쳤다.
이제 만족하게 저녁식사를 할 만한 밥집을 찾아서 익산시내로~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