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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사.여행 후기

영월 법흥사 돌아보기.강원 영월

푸른새벽* 2014. 5. 28. 19:02

 





영월 법흥사.


내 여지껏의 답사걸음동안 영월이라는 고장은 미답처였다.미답처지만 영월이란 고장은 항상 '한번은 꼭 가봐야지'하며 벼르던 고장이긴했다.
그건 다름아닌 법흥사 때문이었다.


신라 말기부터 고려 초기까지 중국 달마의 선법을 이어받아 그 문풍(門風)을 지켜 온 아홉 산문(山門).
곧 실상산문(實相山門)의 남원 실상사. 가지산문(迦智山門)의 곡성 보림사. 사굴산문(闍崛山門)의 강릉 굴산사. 
동리산문(桐裏山門)의 곡성 태안사. 성주산문(聖住山門)의 보령 성주사. 사자산문(獅子山門)의 영월 법흥사. 
희양산문(曦陽山門)의 문경 봉암사. 봉림산문(鳳林山門)의 창원 봉림사 그리고 황해도 해주의 수미산문(須彌山門)을 구산선문이라 칭하는데
내가 아직 미답처인곳은
봉림사와 법흥사 그리고 언젠가 한번 슬쩍 발걸음했지만 속속들이 살피지 못한 봉암사도 미답처로 남아 있는 상태이며
황해도에 있는 수미산문의 광조사는 언감생심,내 생전에는 불가능할 것 이고...


법흥사가 궁금해서 5월 연휴의 답사처로 영월을 택하게 되었다.
하여
내 2박 3일 동안의 답사여행중 가장 첫번째로 찾았던 법흥사부터 돌아보려하며
영월과 평창에서 만나본 옛님에 대해선 다시 <영월돌아보기>나 <평창돌아보기>에 따로 포스팅할 생각이다.









영월군 수주면 법흥리 법흥사 일주문.
법흥사 일주문 부근도 여느 유명한 사찰의 寺下村과 다르지 않았다.








법흥사 일주문의 편액

동물의 제왕이라는 사자에 버금갈 만큼 힘이 넘치는 필체다.








일주문에서 오롯한 자동찻길을 따라 들어와 넓게 잘 정비된 주차장을 지나면 바로
관음루와 금강문이라는 편액 둘이 걸린 이층 누각이 웅장하게 서 있는데
자세히 살피지 않아도 근래에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살짝 실망감과 허탈함이 느껴졌다.








근래에 대대적인 불사가 진행되고 있어 그런가 여기저기 파헤쳐지고 정리되지 않아 조금은 어수선하다 싶었고
앞으로도 훨씬 사역이 넓고 거대하게 치장되어 질 것 같은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법흥사 관음루를 지나면 왼쪽으로 아득하니 바로 시선이 가는 곳.


보물 제612호로 지정되어 있는

영월흥녕사징효대사탑비(寧越興寧寺澄曉大師塔碑)가 확실해 보이니
절집 경내를 들어서 이곳저곳 기웃대지 않고 이렇게 금방 만나볼 수 있음이 기쁘다.








영월흥녕사징효대사탑비(寧越興寧寺澄曉大師塔碑).
「법흥사징효대사탑비」가 아니라 흥녕사징효대사탑비이다.
그것은
지금 법흥사가 자리한 이 곳이 사자산문(獅子山門)인 흥령선원(興寧仙院)의 옛터이기 때문이라고.








징효대사탑비의 이수螭首는

볼록한 보주가 흔히 보는 여느 사리탑비의 이수螭首 보다는 독특한 모양새며
 네 모서리에 각각 한 마리씩, 용 네마리가 조각되어 있다.
이수의 정면 가운데 부분 사각형으로 구분 지어진 곳엔 '고징효대사비(故澄曉大師碑)'라 새겨졌다는데
이렇게 밝은 날 멀리서 보니 무슨 글자가 새겨진것 같기는 한데 잘 알아볼 수가 없다. 








징효대사 탑비가 있는곳에서 왼쪽으로 비스듬히 올려다보면 나지막한 계단 위쪽에는 옹기종기 볼거리가 또 있다. 








영월징효국사부도(寧越澄曉國師浮屠)
언덕 아래의 탑비와 짝꿍이다.


비록 상륜의 일부가 깨어져 온전치 못하지만 이 부도는 찬찬히 뜯어보면 재미있는 볼거리가 많다.
지붕돌 끝에 활짝핀듯 새겨진 귀꽃을 비롯하여
팔각의 몸돌 앞 뒷면에 새겨진 문짝 모양의 조각안에는 앙징맞은 자물통이 새겨져 있고
 가운데받침돌은 각 면 모서리 부분에 기둥 모양의 조각을 두었다.
 둥그스럼한 윗받침돌엔 예쁜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고
아래받침돌 역시 여덟면이 꽉 차도록 안상(眼象)이 새겨져 있다.
징효국사부도는 영월군 유형문화재 제72호로 지정되어 있다. 










오월 초입이라고해도 한낮의 볕은 뜨겁지만 부도를 요모조모 살피느라 정신을 빼고 있었는데
언뜻 뒤통수에 따가운 시선이 느껴져 허리를 펴고 돌아보았더니
내 관찰이 언제 끝나나 서서 기다렸던 파란눈의 여인네가 있었다.
아이쿠야~
이런 실례가 있나...








징효국사부도 바로 아래에 있는 석종형부도.
내가 가진 자료에는 아무런 명문도 없다고했는데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무언가 글자가 새겨져 있는듯 보인다.
이런 석종형부도는 가장 윗부분의 볼록한 부분,유곽이나 유두로 표현되는 부분이 참 매력 있는데
어느 스님의 것인지는 모를 이런 소박한 부도를 만나는것도 답사의 즐거움이된다.








석종형부도 오른쪽으로 연꽃잎이 빽빽하게 베풀어져 있는 사각형의 연화대석이 있는데
정확하게 이 연화대석의 용도는 알지 못한다고하니 답답하고 갑갑했지만
위풍당당한 체구의 부처님이 앉아 계셨을거라고 내 편한대로 짐작했다.
그리고
이런 멋진 연화대석에 지금 놓아진 이 조각상이 너무 옹색하다는 생각도했다.
기계로 드르륵 뚝딱 만들지 말고, 이렇게 반질거리게하지 말고
그냥 사람의 손으로 툭툭 쪼아 눈.코.입 모양 세심하게 다듬지 못해도
연화대석과 비례만 맞게 대충의 모양새만 잡힌 그런 좌불상을 올려놓았더라면
훨씬 좋았을텐데...








이제 적멸보궁이 있다는 안내문을 따라 급하지 않게 경사진 길을 올라가야한다.










부처님 오신날이 바로 코 앞이라 적멸보궁으로 오르는 계단을 따라 걸려 있는 빛깔고운 연등.
나뭇잎 사이로 들어온  햇살이 연등위에 어룽어룽 흔들린다.


운동하고는 담 쌓은지 오래라 잠시 걸었는데도 숨이 차다.
저 계단 끝에 적멸보궁이 있겠지.








이런 설레임이 참 좋다.
이 계단을 다 올라가면 어떤 놀라운 정경이 펼쳐질까하는 그런 기대감.
오랫동안 답사걸음했지만 이런 계단 앞에서는 언제나 설렌다.








적멸보궁엔 부처님이 안계시다는 건 익히 알고있다.
적멸보궁 안에 불상을 봉안하지 않은 것은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봉안하였다는 사리탑이 건물 뒤쪽 언덕에 있기 때문이라고.








적멸보궁을 돌아 뒤로 왔다.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73호로 지정된 법흥사부도(寧越法興寺浮屠).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봉안하였다는 이 사리탑은 기실 이름을 알 수 없는 한 스님의 부도일 뿐이라고 한다.
이것이 진신사리를 봉안한 사리탑으로 둔갑한 연유와 시기는 알 수 없으나,
다만 진신사리의 영원한 보전을 위해 자장율사가 사자산 어딘가에 사리를 숨겨둔 채 적멸보궁을 지었다고만 알려져 있는데
지금도 간혹 사자산 주변에 무지개가 서리는 것은 바로 그 사리가 발하는 광채 때문이라고 한다는 것을
답사책에서 읽은 기억이 난다. 


사리탑은 법흥사 관음루를 들어서면서 바로 만났던 징효대사사리탑과 비슷한 모양새지만
사리탑 윗 몸돌에 돌아가며 신장상을 새긴것이 징효대사사리탑과 다르다.
고려시대에 만든것이라는데 새겨진 신장상은 비교적 형체가 또렷하다.








법흥사 부도 곁에는 자장율사토굴이 있다.
법흥사를 창건한 자장율사가 수도하던 토굴이라고 일컬어지는데
아무리봐도 사람이 드나들기는 힘들것 같은 생각이 드는데
내부의 밑바닥이 입구보다 50cm 정도 깊어 몸을 일으킬 수 있으며 머리만 숙이면 굴 내에서도 다닐 수 있다고
표지판에 씌여있다.
하긴 불만 밝힐수 있다면 여름엔 시원하고 겨울엔 따뜻할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적멸보궁을 돌아보고 내려가는 길.
숨차서 헉헉대며 올라오느라 미쳐 살펴보지 못한 우물에서 찬물 한바가지로 목을 축이고...








우물 윗쪽 언덕에 자리한 산신각도 슬쩍 돌아보고.








이제 이 경사진 길을 따라 다시 여러채의 전각이 즐비한 법흥사 경내로 내려가야한다.








징효대사부도비와 사리탑에 인사하고 저 관음루를 나가면 법흥사답사는 끝난다.








관음루 이층 누각에 걸린 법흥사 목어의 표정은 그리 친절하지 않다.


신라의 자장율사는 당나라에서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석가모니의 진신사리와 가사를 전수받아 귀국한 뒤
오대산 상원사와 태백산 정암사,양산 통도사,설악산 봉정암에 사리를 봉안하고,
마지막으로 영월에 법흥사를 창건하여 진신사리를 봉안했다.
이때이 절 이름은 흥녕사(興寧寺)였다.
그 뒤 징효대사 절중은 신라 말에 쌍봉사를 창건하여 선문을 크게 일으킨 철감선사 도윤에게 가르침을 받아
이 절을 사자산문의 근본 도량으로 삼았다.
혜종 1년(944) 중건되고 이후 큰 화재를 만나 1000년 가까이 명맥만 이어오다가,
1902년 비구니 대원각이 다시 중건되면서 법흥사로 이름을 바꾸었다.
(*한국문화유산답사회 지음 '답사여행의 길잡이' 중에서)








큰 기대를 가지고 찾았었던 법흥사.
살짝 실망감은 있었다.
책에서만 보고,나 보다 먼저 다녀와서 쓴 답사기들을 더러더러 보기는했지만
내 마음속의 법흥사는 조촐하고 아담한 절집이었다.
그런데 지금의 법흥사는 언제 끝날지 모르는 불사가 진행중인 거대한 사찰에 다름아니었다.
시대가 변하니 사역도 넓힐 필요가 있다는걸 이해못할 바는 아니나
태백산 정암사 정도까지만 이었으면 좋겠다.
바라건데 제발 월정사처럼 되지는 말았으면...




사리는 상징일 뿐이다.
법흥사 절멸보궁 뒷산은 사리신앙의 본질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 거대한 산 속에 몇 톨의 진신 사리가 흩어져 묻혀 있다.
그 속에서 사리를 찾는다는 것은 망망대해에 던져진 조개껍질을 찾는 것만큼 불가능하고 무의미하다.
그러나 우리는 쉽게 사리를 발견할 수 있다.
온 산이 부처의 몸이기 때문에,뒷산에 널린 돌멩이 하나도 부처의 뼈가 되고
풀포기 하나도 부처의 모발이 된다.
법흥사 적멸보궁이 전하고 있는 뜻은 바로 그것이다.
그 좁쌀만한 사리를 왜 찾으려 하는가?
온 산이,온 세상이 부처인데...
(김봉렬 지금 '가보고 싶은 곳 머물고 싶은 곳'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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