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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처럼 떠나다

강원 영월 돌아보기 1 본문

답사.여행 후기

강원 영월 돌아보기 1

푸른새벽* 2014. 6. 4. 16:35
계절의 여왕이라는 오월.

올 오월은 긴 연휴로 시작되었다.

가급적이면 휴일엔 답사걸음하지 않는 나로서는 더더욱 이런 긴 연휴는 말 할것도 없다. 

그런데 한통의 전화로 인하여 오월 첫 연휴에 답사를 생각하고 준비를 했었다.

전화는 큰 사위로 부터 받은 것인데...

 

내 큰 사위의 종교는 불교이며 사돈댁도 대대로 불교집안이다.

자신의 종교가 불교라서가 아니라 불교문화에 관심이 많은 사위는 딸 아이와 결혼전에도 나와 답사를 다녀온 적이 있고

결혼 후에도 부부가 여행을 떠날때는 꼭 그 고장에서 찾아보고 와야 할 옛님을 나에게 묻기도 한다.

 

그런 사위가 연휴인데 어머니와 여행을 하고 싶다고 전화를 했으니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어머니께서 꼭 가보고 싶은 곳을 정하시면 좋겠다고.

운전하지 않아도 되고 밥 먹을 때 혼자 먹지 않아도 되고 또 생각만으로도 애잔한 큰 딸내미와 함께라니 얼마나 좋은가.

 

사위와 함께하는 답사여행지로 어디가 좋을까 준비하는것도 즐거움이었다.

가급적이면 많은 것을 보여주고 또 알게 해 주고 싶어 선택했던 곳은 전라남도 강진과 강원도 영월이었다.

영월은 내 답사걸음으로는 미답처이고

강진이야 여덟번 이상 답사걸음 한 곳이지만 한번 더 발걸음한다고 후회할 고장은 아니며

더더욱 몇 년전 귀촌한 언니가 살고 있는 곳이니 기왕이면 잠 잘자리 먹을거리 걱정없는 곳으로 택한 것인데...

딸 내외는 진도가 가까운 강진으로의 여행은 가급적 자제하는것이 좋다는 의견을 보내왔다.

아~맞다.

그걸 미처 헤아리지 못했다...

 

그렇다면 내내 궁금했고 가 보고 싶었던 법흥사가 있는 영월이었다.

거리상으로도 그리 멀지 않으며 여지껏 내 답사걸음이 못 미친 고장이니까.

 

하늘도 꽃도 바람도 삼라만상의 색감까지도 좋은 과히 계절의 여왕다운 오월.

사위와 딸은 답사 떠나기 전날 내가 사는 양평으로 와서 하룻밤을 지냈다.

아침 일찍 출발하려면 아무래도 그것이 나을 거라고,연휴라 도로사정 생각하면 일찌감치 집 나서야 한다고.

 

아침 아홉시 반 쯤 집을 나와 가까운 수퍼마켓에 들러 초콜렛과 육포를 비롯한 간식 한보따리와 생수를 준비해 출발했는데

이번의 답사도 사위가 운전하는 차로 움직이니 편하고 느긋하고 즐거웠다.

 

영월답사 자료를 준비하면서 동선을 잡아보니 첫번째 답사처는 법흥사였다.

집 나서 두시간 반 쯤 달려 도착해 살펴본 법흥사에 대해선 <법흥사 돌아보기>에 포스팅 하였으니 생략하고...

 

 

법흥사를 돌아본 후 점심시간도 넘었고 시장하기도 하여 간단하게 법흥사 사하촌에서 식사를 하려고 식당을 찾았으나

점심시간이었는데도 "밥이 없다"는 황당한 소리에 발길을 돌려 나와 무작정 가장 먼저 만나는 밥집에 들어가기로 하였다.

그런데 가장 먼저 만나는 밥집이라도 가금류요리나 장어요리를 하는 식당은 제외해야했다.

딸이나 사위는 음식에 대한 편견이 없는데 내가 가금류나 장어요리를 못먹기 때문에.

 

법흥사에서 나와 얼마쯤 달렸을까 마침 <대구탕>이라는 간판을 발견하고 들어갔는데

생각보다 깨끗하고 조용하고 또 주문한 대구탕과 곁들여 나오는 밑반찬들이 너무 맛있었다.

음식값을 치르고 나오면서 거듭 잘 먹었다고 고맙다고 인사를 했다.

 

한가지 아쉽다면 사위와 다니니 음식점이나 음식이나 그 밖의 것들에 일일이 사진기를 들이밀지 못했다는 것.

 

 



법흥사를 살펴보고 식사 후 두 번째로 찾은 곳은 영월군 수주면 무릉리에 있다는 무릉리마애여래좌상.

 

오래된 자료에 의지해서 그랬을런지는 몰라도 나는 무릉리마애여래가 있는 곳은 아주 한적하고 인적이 드문 곳인줄 알았다.

그런데 지금 무릉리마애여래좌상이 있다는 물가 근처는 아직 휴가철이 아니어서 그리 복잡하지는 않았지만

좁지 않은 주차장과 펜션임직한 건물 몇 동이 들어서 비교적 잘 정돈 되어 있었다.

공중화장실도 깨끗하고.

 

새로 지어진 펜션 몇동이 가지런한 곳 옆으로 난 길 초입은 자동차가 더 이상 들어가지 못하도록 굵은 쇠줄로 가로막혀 있었다. 

어차피 주차장에 자동차를 두었으니 그런것 아랑곳하지 않고 천천히 느긋하게 걸어 들어갔더니 생각지도 못한 아담한 절집이 있었다.

그러고보니 입구의 자동차진입방지 쇠줄은 이 절집에서 설치해 놓은 듯 싶다.

 

좀 어수선해 뵈는 절집 오른쪽 뒤편에 마애여래좌상이 위치한 곳을 알려주는 작은 푯말이 있다.

 




 

부드러운 흙으로 다져진 오솔길은 오월의 꽃과 신록이 만들어내는 그늘로 인해 한결 더 운치를 느낄 수 있었지만

나무나 들꽃에 대해선 문외한이라 오솔길 양 옆에 피었던 이쁘고 앙징맞은 그 꽃들의 이름을 일일이 나열하지 못하는게 아쉽다.

 

쉬엄쉬엄 바쁘지 않게 걷는다.

 

 




그리 오래 걷지 않아도 만날 수 있다.

오솔길이 끝나는 곳 위쪽으로 탑과 정자와 마애불이 모두 한 눈에 들어온다.

 

 




이렇게 한 곳에 여러 옛님이 있으면 매번 마음이 급해진다.

누가 등 떠미는것도 아니고 시간이 촉박한 것도 아닌데 왜 항상 이러지?

마치 맛있는 음식이 가득한 밥상 앞에서 뭘 먼저 먹을지 몰라 허둥대는 것 처럼.

 

 

근래에 들어 많이 손을 본 것 같지만 자그마하고 이쁜 요선정보다 우선 이 거칠고 거므스레한 탑부터 살펴본다.

언뜻 탑의 지붕돌이 투박한 몸돌에 비해 너무 얍실해서 이건 뭐지? 하는 의아함과 호기심 그리고

어째 범상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고

얍실한 지붕돌에 비해 몸돌의 비례가 통상 보아왔던 탑과는 좀 다르다는 느낌이... 

 

 




가까이 다가가 살펴보니 청석탑으로 볼 만은 한데

탑의 몸돌보다 시멘트로 이어붙인 부분이 더 높직하다.

청석 반 시멘트 반...

 

별로 상태가 좋아보이지 않는 탑에 우째 이렇게 많은 돌들을 올려놓았을꼬?

왜 이렇게 사람들은 돌을 올려놓거나 동전놓는걸 좋아하는지 왜 이렇게 낙서하는걸 좋아하는지.

 




 

이 탑을 척 보는 순간 범상치 않음을 느낀 이유는 바로 이 범자 때문이었다.

이 범자는 탑의 몸돌 네 면에 세 글자씩 모두 새겨져 있다.

범자는 산스크리트어인데 불교 천수경 해설을 보면 '옴 마니 반메 훔'에서

'옴'은 하늘 세상, '마'는 아수라, '니'는 인간, '반'은 축생, '메'는 아귀, '훔'은 지옥 세계의 제도를 뜻하고 또한 일체의 복덕 지혜와 모든 공덕행의 근본을 갈무린 진언을 뜻하며 육도의 중생들을 제도하여 육도의 문을 닫게 한다는 뜻이라고 한다.

불교가 번성하던 고려 때에는 임금의 옥좌 위 천장에도 이 글자가 새겨졌다고 하며 고려 범종이나 금동향로 등에 금은상감으로 새겨진 것을 볼 수 있으며 이후 탑이나 부도의 석조 유물에도 범자를 표현한 예가 많으니 이 탑이 고려에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반듯하게 새겨진 범자위로 온통 낙서가 어지럽고 몸돌과 지붕돌을 떼워 붙인 시멘트가 속상하다.

 

 




옥개석은 없이 지붕돌 네 개 몸돌 네 개만 남아 있어 이 탑이 오층탑이었던지 칠층탑이었던지 알 수는 없는데

각 탑 몸돌 하단에 시멘트를 발라 놓아 탑의 원래 모양보다 높이가 훨씬 커 졌다는 걸 느낄 수 있고

사진에서 보이는 것처럼 탑의 갑석이 뒤집혀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탑을 이렇게라도 대충 모양새를 갖출 때 그렇게 된 모양인데 다시 뒤집기가 어려운가...

 

오랫동안 자리를 지켜준 것만으로도 고마운 일이지만 현재의 상태가 속상하고 또 속상하다.

 




 

탑 몸돌에 집 지어 붙여 그 안에 알을 낳아 살피던 여왕벌.

발자욱소리와 말소리 두런거리니 잔뜩 긴장을 했는지 아랫도리가 팽팽하다.

청석탑보다 먼저 눈에 띄여 조심을 하느라고했는데도 이 여왕벌에겐 몹시 거슬렸던 모양이다.

긴장을 하고 있긴 나도 마찬가지였단다~

 

 




옆에서 보면 딱 보실보실한 병아리 여러마리를 품은 어미닭의 모습이지만 정면에서 보는 느낌은 한참 다른 이 마애불은

가까이 다가가 자세히 살피지 않으면 좌상이 아니라 입상인 듯 보인다.

 

근데 왜 나는 마애불상이 새겨진 바위 전체는 암탉으로 보이는데 막상 마애불은 영화 '타이타닉'에서 그 유명한 장면으로 보일까~ㅎ

 

고려시대 영월지방의 대표적인 마애불상으로 꼽히는 무릉리마애여래좌상은

화려하고 멋진 광배에 비해 무릎 아랫 부분이 약하게 표현되어 가분수같은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푸른 물이 감돌고 좌우로 건너다보이는 암벽들이 아름다운 주천강을 내려다보이는 복받은 자리에 계신다.

 




 

마애여래상과 삼층탑과 동무하고 있는 요선정은 요선암이라고도 불린다.

 

 




정면 두 칸의 팔작지붕 자그마한 몸집에 너무 거한 편액이 둘이나 걸려 있다.

요선정.모성헌...

 

 




요선정 내부에는 여럿의 글들이 빽빽하게 걸려 있는데 이 가운데는 숙종의 어제시도 있다고 하는데

자세히 촘촘하게 들여다보진 않았다.

 

 




요선정은 마을의 원씨.곽씨 이씨가 숙종이 하사한 어제시를 봉안하기 위해 건립한 곳으로, 조선 중기 풍류가 봉래 양사언이 경치에 반해 선녀탕 바위에 ‘요선암(邀仙岩)’이라는 글자를 새긴 데서 그 이름이 유래 됐다고 한다.

 

사방이 탁 트인 이런 정자에서 아래 강가의 풍경을 바라보는것은 매우 즐거운 일이다.

 

 




오늘 하루 돌아보고 만나봐야 할 옛님이 더 많으니

정자에서 더 쉬고 싶은 아쉬움 떨치고 청석탑과 암탉 형상의 마애여래상과 요선정에 바이바이~

 

 




요선정이 있는 곳에서 머지 않은 곳에 위치한 무릉리 삼층석탑.

사실 이 탑은 법흥사를 돌아보고 점심식사를 마친 후 무릉리마애여래를 찾으러 가는 길에 먼저 만나긴했었다.

사위가 운전하는 자동차 뒷좌석에 앉다보니 시야가 훤하지 못해 나는 놓쳤었는데

운전하던 사위가 "어머니 저 탑요" 하길래 내다보게 되었고 무릉리마애불을 보고 다시 오자고했던.

 

사실 사진에선 별로다.

근데 무릉리탑은 아담하고 이쁘게 생겼다.

 




 

아직도 미술사학적으로나 고고학적 가치를 느끼는 눈과 마음이 모자라기에

나는 탑에 대해선 눈이 어설프다.

내가 만났던 탑 중에서 가장 나를 흥분 시켰던 창녕 술정리동삼층석팁도 미술사학적인 면으로 감동하고 흥분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냥 그 탑 앞에 섰을 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어떤 설레임과 흥분이 있었기에 그렇다는 것이지

국보의 위엄이나 알맞은 체감률,정확한 비례미,역사적인 무게감으로 그렇게 느꼈던 것은 절대 아니다.

그건 아직도 내가 문화재를 보는 눈이 설고 공부가 부족하기 때문이라는건 알고 있다.

 

그러나마나 나는 아직도 문화재를 대하면서 그냥 좋다...싶으면 된거라 생각한다.

 

이 무릉리삼층탑도 그냥 좋았다.

그냥 이쁘다는 생각이 들었다.

멀리 울퉁불퉁 근육질의 산들이 보이고 탑 주변으로 너르게 펼쳐진 평화로운 경작지와 또 탑 가까이 포진된 인삼포들...

그 곁에 작고 아담한 탑이 자동찻길 가에 서 있는 그런 풍경이 좋았다.

 

이 탑은 원래의 제 있던 자리에서 약간 옮겨져 왔다는데

신라말기에 흥령사(현 법흥사)의 법요집행상 대령제(對靈祭)를 지내기 위해서 조성한 것이라는 전설도 있다.

 

 




답사자료를 정리하면서 무릉리삼층탑자료에는 붉은 색으로 '탑 앞의 배례석도 반드시 살필것'이라고 적어 놓았었는데

이 탑을 만나면서 그렇게 주의사항을 까먹었었다.

그냥 탑 앞에 이런 배례석이 있길래 이쁘다 생각하고 열심히 살펴보고 또 살펴봤었다.

 

집에 돌아와 자료를 다시 되돌려 보면서 '아차,탑 앞의 배례석~!' 하고 사진을 찾아보니 사진 여러장 찍은 것이 있었다.

하룻동안 영월의 여러곳을 돌아보면서 무릉리삼층탑.주천삼층탑.용석리삼층탑이 내 머릿속에서 뒤죽박죽 정리가 채 되지 않았던가 보다.

 

 

무릉리삼층탑을 돌아보고 그 다음의 목적지는 장릉이었다.

장릉은 영월읍내에 있는데...

도저히 살펴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장릉입구의 주차장을 가득가득 그야말로 빼곡히 채운 주차장과 사람들.

와~정말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었다.

휴일이라서 그렇다고,오후라서 그럴거라 생각하며

장릉은 다음날 아침 일찍 돌아보자하며 장릉 매표소 오른편으로 난 작은 길로 들어섰다.

장릉에서 그야말로 한발짝만 더 가면 보덕사가 있으니.

  

보덕사에 대해선 다시 <보덕사 돌아보기>로 포스팅할거니까 여기선 생략하고...

 

 




보덕사를 돌아나오며 만났던 작은 안내팻말

'금몽암 500m'

 

별로 멀지 않고 또 답사자료 정리하면서 언뜻 단종 삶에 얽힌 절집이라는 걸 보았던 기억도 한 몫했다.

보덕사에서 아주 잠깐 자동차로 움직이면 바로 금몽암의 앞 뜰에 닿는다.

절집 이라기 보다는 잘 지은 여염집 같은 느낌이다.

 

 




주차장으로 쓰이는 공터 왼편에 조성된 비석들에서 여기가 금몽암임을 알 수 있는데

작은 절집에 비하여 석조물들은 규모가 큰 편이다.

 

 

 



살짜그니 대문을 지나 금몽암 마당으로 들어섰다.

 

사각형의 작은 마당을 둔 ㄱ 자 형의 건축인데 우화루란 편액이 걸린누마루도 그렇고 꽤 오래전에 지어졌음이 느껴진다.

 

 




대문을 들어서 정면으로 보이는 곳이 법당으로 쓰이나보다.

신라 문무왕때 세워졌다는데 '금몽암'이란 편액이 참 또렷한데 서체가 어쩐지 낯설지 않다했더니 해강의 글씨란다.

금몽,꿈을 금지한다는 뜻인가...

창건 당시에는 지덕암(旨德庵)이었는데 조선 세조 때 금몽암(禁夢庵)이라 개칭하였다고 하니

단종이 궁궐로 돌아올 꿈을 꾸지 말라는 세조의 은근한 협박은 아니었을런지.

 

 




전설에 의하면 단종이 영월로 유배된 후 이 암자가

단종이 궁에 있을 때, 꿈속에서 유람하던 곳과 흡사하다고 하여 ‘금몽암’이라고 하였다고하며

광해군 때 군수 김택룡이 증축하면서 노릉사(魯陵寺)로 개칭하였다가, 다시 영조 46년(1770)에 금몽암이라 개칭되었고

지금은 보덕사에 속해 있는 암자로, 1984년 강원도문화재자료 제25호로 지정되어 있다. 

 

 




영월향교

 

영월읍내의 옛님을 찾느라 이 앞을 몇번씩이나 지나쳤었는데 막상 찾으려고 했을 땐

엉뚱한 네비양 때문에 헤맸었다.

 

 




영월향교도 역시 다른 향교와 다르지 않게 잠겨있었다.

 




 

잠겨있다고 그냥 발길을 돌리기는 아쉽지.

 

어디 다른 출입구가 있나 싶어 이리저리 살피다가 이쁘게 만들어진 굴뚝을 끼고 돌아가보았다.

 

 




향교 정면에서 왼쪽 굴뚝이 있는 곳 바로 뒤 작은 출입문이 있었다.

자물쇠가 걸려 있기는 했지만 잠긴것은 아니었다.

 

자물쇠를 살그머니 젖히고 마당안으로 들어서는데

함께 간 사위와 향교나 서원에 별스레 관심이 많은 딸은 겁난다고,누가와서 뭐라고하면 어쩌냐고 들어서지 못한다.

이런일 어디 한두번이랴~

딸과 사위는 밖에 있으라하고 나는 쪽문을 들어섰는데 바지런한 손길이 느껴진다.

향교를 관리하는 분이 엄청 부지런하신가 보다.

 

 



 

영월향교 명륜당

 

 



 

명륜당 뒤쪽에 자리한 대성전.

정면 5칸의 단정한 맞배지붕인데 칸칸의 붉은 기둥과 녹색의 살문 그리고 태극문양이 단정하다.

조선 태조 때 지어진 영월향교는 전학후묘의 배치인데 한국전쟁 때 대성전을 제외한 모든 건물이 불탔다고 한다.

 

 



 

넓지 않은 영월향교는 관리하는 분의 세심한 손길이 곳곳에 느껴졌다.

비록 향교의 정문인 풍화루는 잠궈 놓았어도 살짝 쪽문을 열어두는 배려를 해주니

향교 정문에 잡아먹을 듯 '개조심'이라 붙여놓은 어느 지방의 향교관리인에 비하면 천양지차니까.

 

 



 

영월향교를 마지막으로 영월답사의 첫날을 마감했다.

 

 

향교에서 주차장으로 돌아오는길에 내 눈길을 사로잡은 풍경.

언젠가 집 가까운 산책길에서 이런 풍경에 홀렸던 적이 있다.

 

애기똥풀과 함석울타리...

참 잘 어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