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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제 행촌리(金提 幸村里) 느티나무.전북 김제 본문

☆~관심.호기심/나무 이야기

김제 행촌리(金提 幸村里) 느티나무.전북 김제

푸른새벽* 2014. 11. 11. 23:51

 

 

 

 

 

 

 

 

 

 

 

 

 

 

 

 

 

 

 

 

 

 

 

 

 

 

 

 

 

 

 

 

 

 

 

 

 

 

 

 

 

 

 

 

 

 

 

 

 

 

 

 

 

 

 

 

 

 

 

 

 

 

 

 

 

 

 

 

 

 

 

김제 행촌리(金提 幸村里) 느티나무


천연기념물 제280호
전북 김제시 봉남면 행촌2길 89 (행촌리)


김제 행촌리의 느티나무는 나이가 약 600살 정도 된 것으로 추정되며, 높이 15m, 가슴높이의 둘레 8.50m의 크기이다. 나무 밑 부분에는 2m 정도의 큰 구멍이 뚫려 있고 그 옆에 30㎝ 정도 높이의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가 조금만 더 높았더라면 역적이 날 뻔 했다는 전설이 있다. 나무 옆에는 정자가 하나 있는데, 옛날에 이곳을 지나가던 배풍(裵風)이라는 도사가 ‘익산태(益山台)’라고 이름을 지어 그렇게 불려왔으나 지금은 ‘반월태(半月台)’라고 부르고 있다. 마을에서는 이 나무를 신성시하고 있으며, 매년 정월 대보름에는 이 나무에 동아줄을 매어 줄다리기를 하면서 새해의 행운을 빌어 왔다고 한다.


김제 행촌리의 느티나무는 마을사람들의 단합과 친목을 도모하는 중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으며, 마을을 지켜주는 서낭나무로서 우리 조상들과 애환을 함께 해온 문화적 자료로서의 가치가 크다. 또한 오래된 나무로서 생물학적 보존가치도 크므로 천연기념물로 지정·보호하고 있다. 
*문화재청자료*


<느티나무>

옛 시골 동네 어귀에는 정자나무 한 그루가 어김없이 서 있었다.은행나무나 회화나무,팽나무,그리고 개울가에는 왕버들도 심었지만 정자나무로는 역시 느티나무가 최고였다.느티나무는 은행나무와 함께 천 년을 훌쩍 넘기며 사는 나무라서 온 마을의 역사를 다 꿰고 있다.어디 그 뿐이랴? 동네마다 서 있는 정자나무드링 서로 이야기를 주고 받으면 그것이야 말로 반만 년 우리 나라의 역사가 될 터이다.

느티나무를 정자나무로 삼은 대표적인 곳은 다음과 같다.먼저 전북 임실군 오수면에는 술에 취해 잔디밭에서 잠든 주인을 구하고 죽은 의견(義犬)을 기리는 개나무란 이름의 느티나무가 있다.강원도 삼척시 도계읍의 천연기념물 제95호인 천 년된 느티나무는 입시철에 치성을 드리는 나무로 유명하다.경남 의령군 유곡면 세간리에도 현고수(懸鼓樹)라는 이름의 유서 깊은 느티나무가 있다.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과재우 장군이 이 나무에 북을 매달아 놓고 군사 훈련을 시켰다고 한다.또한 강화도 정족산성의 느티나무는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마다 울었다는데,병인양요 때에는 프랑스군의 집중 포화로 총알받이가 되기도 했다.

 

옛 문헌에 나타나는 느티나무를 보면 그 한자이름이 확실하지 않아 혼란스럽다.《물명고》에는 거(柜)라고 하였으나 그 이전의 문헌에서는 이 글자를 찾아보기 어렵다.또 규(槻)라고 말하는 경우도 있으나 이 또한 근거가 없다.다만,사서(史書)에 흔히 나오는 괴(槐) 혹은 괴목(槐木)이라는 글자가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회화나무뿐만 아니라 느티나무를 말하는 게 아닐까 추장할 따름이다. 《삼국사기》의 '점해이사금(沾解尼師今)' 조를 비롯해서 몇몇 곳에 나타나는 괴곡(槐谷)은 느티나무골이다.회화나무는 산에 심지 않았기 때문이다.《태종실록》과  《세종실록》을 보면 관리의 복장을 규제하는 내용 중에 '홀(笏) 은 괴목을 쓴다'고 했다.이 때의 괴목도 느티나무다.그러나 백제 의자왕 19년(659) "궁중의 괴목이 사람의 곡소리와 같이 울었다".고려 태조 21년(938) "궁궐의 괴수가 저절로 일어 섰다." 조선 선조 11년(1578) 6월 28일의 "소나기가 내리면서 천둥이 크게 일어나 문소전 효선문 안의 괴목에 벼락이 쳤다" 등의 기록은 두 나무 중에서 어느 것인지 정확하게 가리기가 힘들다.궁궐 안에는 느티나무뿐 아니라 회화나무도 흔히 심었기 때문이다.그러나 정약용의 《아언각비雅言覺非》에 "괴판(槐板)은 귀목(龜木)이라 한다." 고 하여 느티나무임을 알 수 있다.또 같은 책에 늣회나무라는 말이 있다.이로 미루어 '늣회'가 변하여 느티가 된 것으로 보인다.이 때 '늣'을 '늣기다'는 옛 말의 줄임말로 본다면,둥그스름한 느티나무의 바깥 모양새가 회나무와 같은 느낌이 오는 나무란 뜻이 된다.


어쨌든 현재 창덕궁 후원에 있는 여든 그루가 넘는 아름드리 노거수는 그 절반이 느티나무다.느티나무의 목재는 결이 곱고 황갈색을 띈다.그리고 윤이 조금 나고 잘 썩지 않으며 벌레도 잘 슬지 않는다.게다가 다듬기가 좋고 물을 운반하는 '물관'의 배열이 독특해 아름다운 무늬를 만들어낸다.큰 나무가 될수록 비늘,구슬,모란꽃 모양의 무늬가 타나나고 광택도 더 난다.느티나무는 말려도 잘 갈라지지 않고 덜 비틀어지는 편이다.또 마찰이나 충격에도 강하며 단단하기까지 하다.


느티나무는 당당하고 우아한 그 모습 말고도 이처럼 속에 갖춘 성질까지 다른 나무가 감히 따라올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나다.우리 나라에서 가장 좋은 나무라고 해도 아무도 이의를 달지 않는다.한마디로 나무가 갖추어야 할 모든 장점을 다 가지고 있는 나무의 황제다.느티나무 목재는 힘을 받칠 수 있어 기둥으로 사용할 수도 있고 또 땅 속에 묻히는 관재로 쓰기도 한다.이외에 모양새를 따지는 가구,생활도구 등 어떤 용도로 쓰든지 간에 느티나무를 감히 넘볼 나무가 없다.느티나무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우량 목재인 월넛((Walnut), 티크(Teak), 마호가니(Mahogany), 자단(Rosewood), 흑단(Ebony) 등과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다.


나무를 다루는 기술이 남달랐던 우리의 선조들이 느티나무를 그대로 둘 리 없었다.기록상으로는 《삼국사기》 '거기(車騎'조에 "육두품의 안장에 자단,침향,회양목,느티나무,산뽕나무 등을 쓸 수 없다"고 했고,조선 세종 12년(1430)에는 "싸움배를 만드는 방법으로서 괴목판을 써서 겹으로 만들고 만약 괴목을 구하기 어려우면 다른 나무를 쓰라"는 내용이 있다.느티나무가 여기저기 귀하겨 또 요긴하게 쓰였음을 알 수 있다.


경북 경산시의 임당동 고분군과 부산광역시 복천동 고분군,그리고 경주 천마총에서 출토된관을 조사해 보니 느티나무로 만든 것이었다.전남 완도군 약산도에서 인양된 고려 초 화물선 밑바닥의 일부도 느티나무였다.건축재로는 경북 영주 부석사의 무량수전,경남 합천 해인사의 대장경판 보관 건물인 법보전과 수다라장,전남 강진의 무위사 극락전,충남 부여의 무량사 극락전,전남 구례 화엄사 대웅전,제주도 관덕정 향교 등의 나무 기둥의 전부 혹은 일부가 느티나무이다.흔히 스님들이 '싸리'로 만들었다고 굳게 믿는 구시(나무밥통)나 나무 불상도 상당 부분 느티나무로 만든 것이 많다.그 밖에 사방탁자,뒤주,장롱,궤짝 등의 조선시대 가구까지 느티나무의 사용 범위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다.특히 느티나무는 우리 나라 전통 가구재인 오동나무,먹감나무와 더불어 3대 우량 목재로 꼽는다.문화가 화두인 세상,우리의 나무문화는 흔히 소나무 문화라고 하지만,그것은 조선 이후의 이야기다.유적지에서 출토되는 유물로 보아 그 전에는 느티나무 문화였었다.최근 산림청에서도 새 천년을 맞아 우리 나라의 번영과 발전을 상징하고 국민에게 희망과 용기를 줄 수 있는 밀레니엄나무로 느티나무를 선정했다.


느티나무는 잎떨어지는 넓은잎 큰키나무로서,전국에 걸쳐 자란다.햇빛을 독차지하는 자리에 서 있는 정자나무로는 넓게 퍼져 자라지만,다른 나무와 경쟁하며 자라는 숲에서는 곧고 우람하다.그것도 높이가 2~30m,둘레도 너덧 아름은 보통이므로 큰 건물의 기둥이나 임금의 관재로도 전혀 손색이 없다.나무껍질은 어릴 때는 짧은 점선을 그어 놓은 것처럼 숨구멍이 있고 회 갈색이며 매끄럽다.그러나 오래되면 비늘처럼 떨어지고 그 흔적이 황갈색으로 남는다.긴 타원형의 잎은 어긋나기고 달리고 끝이 뾰족하며 가장자리에 날카롭지 않은 톱니가 있다.암수 한 나무로 눈에 잘 띄지 않는 작은 꽃이 봄에 피며 가을에 작은 팥알 크기의 열매가 익는다.
*박상진 지음 <궁궐의 우리나무>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