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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마산 미황사(達磨山美黃寺).전남 해남 본문

☆~ 절집.절터/전 남

달마산 미황사(達磨山美黃寺).전남 해남

푸른새벽* 2014. 12. 28. 14:15

 

 

 

 

 

 

 

 

 

 

 

 

 

 

 

 

 

 

 

 

 

 

 

 

 

 

 

 

 

 

 

 

 

 

 

 

 

 

 

 

 

 

 

 

 

 

 

 

 

 

 

 

 

 

 

 

 

 

 

 

 

 

 

 

 

 

 

 

 

 

 

 

 

 

 

 

 

 

 

 

 

 

 

 

 

 

 

 

 

 

 

 

해남 달마산 미황사(達磨山美黃寺)


전남 해남군 송지면 서정리 산 247


우리 나라 육지의 절 가운데 가장 남쪽에 있는 미황사는 그 달마산 서쪽 중턱에 앉아 먼 데서 반짝이는 불빛처럼 조그맣게 빛나고 있다.절로 들어가는 길이 숲 사이로 나 있을 뿐 절 아래에는 숙박업소나 구멍가게 같은 것도 하나 없이 한적하기만 하다.한창 번성하던 때에는 스님들도 많이 있었고 주변에 열두 암자를 거느렸다는 절이지만 지금은 대웅보전과 응진전,요사채 등 건물 몇 채만이 남아 경내가 조촐하고,숲속에 떨어져 있는 넓은 부도밭과 사적비가 번성했던 옛날을 말해줄 뿐이다.


그러나 꼭 크고 기세등등해야만 좋은 것은 아니다.예전에 비해 퇴락했다고는 하지만 미황사는 결코 적막하거나 스산한 절이 아니다.
바위한 능선이 그려 내는 거친 선을 병풍처럼 뒤에 두르고 동백나무 숲으로 소복히 감싸인 절터와 경쾌하되 가볍지 않은 대웅전의 참한 품새를 마주하고 보면,오히려 '이렇게 포근하고 곱게 저물 수 있다면 저무는 것도 나쁘지만은 않다'하는 기분까지 갖게 된다.


길가의 나무들을 일주문과 해탈문 삼으려 절을 향해 올라가자면 정면에 화사하면서 점잖은 대웅보전이 올려다보이고 그 아래에 축대가 두 단 있다.아래쪽 축대 위 평면에는 커다란 문루가 있었는지 풀 속에 주춧돌이 여럿 박혀 있고 두번째 계단을 올라서면 대웅보전 앞마당이다.마당 가운데 기다란 돌확에는 맑은 물이 찰랑거리고 마당가 샘에는 돌담을 두르고 대쪽을 엮은 지붕을 씌웠는데 이끼가 끼고 담쟁이가 기어올랐다.왼쪽으로 살림집의 그것처럼 아담한 화단 너머에는 스님들이 기거하는 집채가 있고 대웅전 뒤 위쪽에 자그마한 응진전이 보인다.근래에 조금씩 손을 보고 있어서 마당 가운데 새로 만든 석등이 섰고 오른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새로 지은 건물 두어 채가 서 있다.


지금 미황사 경내에서 볼 수 있는 것은 그저 이 정도이다.


미황사의 창건 연대나 사적에 대해서는 별다른 기록이 없고 다만 부도밭 가는 길에 숙종 18년(1692)년에 세워진 사적비가 하나 있다.
비문은 당시 병조판서를 지낸 민암이 지었는데,다음과 같은 창건설화를 적고 있다.


신라 경덕왕 8년(749) 8월에 돌로 된 배(石船) 한 척이 아름다운 범패 소리를 울리며 사자포(땅끝마을) 앞바다에 나타났다.배는 며칠동안이나 사람들이 다가가면 멀어지고 돌아서면 다가오고 했는데 의조(義照)화상이 두 사미승과 100여 명의 제자들을 이끌고 목욕재계하고 기도를 했더니 육지에 닿았다.배 안에는 금으로 된 사람(金人)이 노를 잡고 있었고 금으로 된 함과 검은 바위가 있었다.금함 안에는 화엄경,법화경 같은 경전과 비로자나불,문수보살,보현보살과 40성중.53선지식.16나한의 상과 탱화 등이 들어 있었고 검은 바위를 깨뜨렸더니 검은 소가 뛰어나와 금세 큰 소가 되었다.


그날 밤 의조화상의 꿈에 금인이 나타나서,자기는 우전국(인도) 왕인데 금강산이 일만불을 모실 만하다 하여 불상들을 싣고 갔으나
이미 절이 많이 있어서 봉안할 곳을 찾지 못하고 돌아가던 길에 금강산과 비슷한 이곳을 보고 찾아왔는데,경전과 불상을 소에 싣고 가다가 소가 멈추는 곳에 절을 짓고 안치하면 국운과 불교가 흥왕할 것이라고 말했다.


다음날,의조화상이 소에 경전과 불상을 싣고 나섰더니 소가 달마산 중턱에서 한 번 넘어지고 또 일어나서 한참 가다가 크게 울며 넘어지더니 일어나지 못했다.의조화상은 소가 처음 멈췄던 곳에 통교사(通敎寺)를 짓고 마지막 멈춘 곳에 미황사를 지었다.절 이름을 미황사라고 한 것은 소의 울음소리가 매우 아름다웠다고 해서 '미'자를 넣고 금인의 빛깔에서 '황'자를 딴 것이라 한다.


민암은 사적기에 이 창건설화를 적은 후 "석우(石牛)와 금인의 이야기는 너무 신비해 속된 귀로는 의심이 갈 만하나 연대를 따져 고증하려는 것은 부당한 일이다.지금이라도 미황사에 가면 경전과 금인 ,탱화,성상 등이 완연히 있다"라고 덧붙였다.하지만 지금 미황사에는 설화를 뒷받침할 만한 유물은 물론이고 조선 시대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갈 만한 유물도 없고 의조화상이라는 인물의 행적도 알 수가 없다.


한편,나름의 상징체계와 어법을 가진 설화를 곧이곧대로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 해도 이 창건설화는 우리 나라 불교의 남방 해로 전래설을 뒷받침하는 자료가 된다.불교는 4세기 말에 중국을 통해 우리 나라 북쪽을 거쳐 전파되었다는 것이 통설이다.그러나 우리 나라 서남 해안지방에는 불상이나 경전 등이 바다를 건너 전해져서 그곳에 절을 지었다는 설화가 많이 퍼져 있다.그중에서도 미황사 창건설화는 인도에서 직접 불적이 전래되었음을 말하는 것으로 주목된다.장거리일 경우 육로보다 바닷길이나 물길이 먼저 발달했던 것과,문화의 동질성이 산맥을 경계로 끊어지고 물길을 따라 이어지는 것에서 미루어 볼 때도 북쪽의 육로로만 불교가 전해졌다고 단정하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여겨진다.


창건 이후 수백 년 동안의 미황사 사적은 전해지지 않으며,선조 30년(1597)에 정유재란으로 소실되자 이듬해인 만선(晩善)이 중건하고 현종 1년(1660)에 성간(省侃)이 3창 하였으며 그 후 몇 차례 중수되었다고 한다.


미황사의 규모가 지금처럼 작아진 것은 언제,무엇 때문일까? 절 아래 서정리 노인들 사이에는 창건설화만큼이나 극적인 미황사 망한 사연이 전해 온다.즉,150년쯤 전만해도 미황사는 스님이 40여 명이나 있고 재산도 많은 큰 절이었다.당시 절에서는 큰 중창불사를 벌이려고 스님들이 '궁고'를 꾸려 해안을 돌며 일종의 순회공연을 하고 시주를 모았다.


어느날,설쇠 맡은 스님이 어여쁜 여인의 유혹을 받는 꿈을 꾸고는 오늘은 쉬자고 했으나 주지스님이 듣지 않았다.그들은 완도,청산도로 공연을 하러 가던 길에 폭풍을 만나서 배는 침몰하고 설장고 맡은 스님 하나만 빼고는 모두 떼죽음을 당했다.남은 것은 절에 있던 나이 많은 스님 몇 분과 궁고 꾸리느라 투자한 빚더미뿐,미황사는 그만 망해 버렸다.


전설 같은 이 이야기를 뒷받침하듯,미황사 아래 서정리 사람들은 비바람이 치는 을씨년스런 날씨를 두고 '미황사 스님 궁고 친다'는 말을 속담처럼 쓰고 있으며 송지면 산정리 마을에 전승되고 있는 12채 궁고의 깃발에는 삿갓 쓴 스님이 바다거북을 탄 모습이 그려져 있다.


한편,미황사에는 가뭄이 들 때 걸어 놓고 기우제를 지내면 비를 내리게 한다는 괘불이 전해져 온다.아무때나 볼 수는 없지만,영조 3년(1727)에 조성된 이 괘불은 근래에도 몇 차례 '영험을 증명'한 적이 있고 심지어 기우제 도중에 비가 쏟아져서 배접이 떨어진 일까지 있다.1993년에 손상된 괘불을 수리하고 기념행사를 가졌었다.그림은 독존도 형식이며 머리 양옆에 합장한 부처가 세 분 앉아 있고 무릎 좌우에는 향로를 든 보살상과 '금함'을 든 사자상이 그려져 있어서 창건설화를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한국문화유산답사회 지음 '답사여행의 길잡이'중에서*

 

 

해남 달마사 미황사 일원은 미황사를 포함하여 달마산 정상까지 수려한 지형경관을 형성하고 있어 2009년에 명승 제59호로 지정되었다. 해남군 현산면·북평면·송지면 등 3개 면에 접하고 있는 달마산은 높이 489m로 해남읍에서 남쪽으로 약 28㎞ 떨어져 있으며, 땅끝 가까이에 우뚝 솟은 산이다. 미황사는 749년(경덕왕 8)에 의조(義照)가 창건한 신라시대 고찰이다.

 

달마산은 소백산맥이 두륜산을 지나 마지막으로 일어선 산이다. 현산면이 머리에 해당된다면 북평면은 등에, 송지면는 가슴에 해당하는 형상을 이루고 있으며, 이 산의 줄기는 땅끝의 사자봉으로 이어지고 있다. 달마산 일대의 암석단애는 달마산 북서쪽에 위치한 바람재로부터 달마산-귀래봉(471m)-도솔봉(421m)에 걸쳐 나타나는데, 길이가 약 6~7㎞에 달한다.

암석단애를 구성하는 기반지질은 변성퇴적암류인 덕룡산 규암으로 이루어져 있다. 특히 이런 기반암으로 암석단애를 이룬 곳은 우리나라에서 매우 희귀하다. 산 능선부를 점하는 변성퇴적암 계통의 규암질 암석단애는 풍화와 침식에 강해 급경사의 암봉을 이루는데, 마치 공룡의 등줄기를 방불케 할 뿐 아니라 암색 또한 흰 빛을 띠고 있어 수려하고도 기묘한 경관을 나타낸다.

 

미황사는 경사가 완만한 달마산 서사면 중간에 대지를 조성하였기 때문에 사찰의 구역이 여러 단의 축대로 이루어져 있다. 따라서 다른 사찰과는 달리 전면이 안산 등으로 막혀있지 않고 툭 터져 있어 시야가 시원하게 열려 있다. 미황사 경내에는 대웅전(大雄殿, 보물 제947호), 응진당(應眞堂, 보물 제1183호), 달마전, 세심당, 향적당, 자하루, 범종각, 석비, 당간지주, 부도군, 사적지 등 많은 당우와 유적이 위치하고 있다.

미황사에서 바라보이는 달마산 능선의 조망경관은 빼어난 절경을 이루고 있고, 달마산 능선에서 부감되는 미황사의 전경과 남해도서의 조망경관 또한 이 일대의 수려한 풍광을 보여주고 있다. 달마산 능선에서 바라보는 서해 낙조는 매우 아름답다.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