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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 만덕산 백련사(康津 萬德山 白蓮寺).전남 강진 본문

☆~ 절집.절터/전 남

강진 만덕산 백련사(康津 萬德山 白蓮寺).전남 강진

푸른새벽* 2015. 1. 2. 18:00

 

 

 

 

 

 

 

 

 

 

 

 

 

 

 

 

 

 

 

 

 

 

 

 

 

 

 

 

 

 

 

 

 

 

 

 

 

 

 

 

 

 

 

 

 

 

 

 

 

 

 

 

 

 

 

 

 

 

 

 

 

 

 

강진 만덕산 백련사(康津 萬德山 白蓮寺)


전남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 246


백련사는 만덕사로 불렸으며 신라 문성왕 1년(839)에 무염(無染)선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진다.무염선사라면 선종 구산선문 가운데 충청남도 보령의 성주산문을 개창한 그 스님이다.그후 절이 없어지고 터만 남았는데,고려 후기 무신정권 시절에 요세(了世,1163~1245)가 중창하고 천태종의 수행결상니 백련사(白蓮寺)의 터전으로 삼으면서 대단한 거찰이 되었다.백련사는 수선사(修禪社,지금의 순천 조계산 송광사에 자리잡았던 조계종의 정혜결사로,보조국사 지눌이 열었다)와 함께 고려 후기 불교 수행결사의 양 갈래를 이룬다.


백련사를 연 요세는 합천 출신으로 속성은 서씨이다.열두 살 때 합천 천락사(天樂寺)로 출가하여 균정(均定)에게서 천태교관을 배운 후 꾸준히 수행하여 큰 덕망을 쌓았다.그는 평생 참회수행했기 때문에 서참회라는 별명까지 가졌었다.전국의 절을 순례하며 수행하는 중에 지눌(知訥,1158~1210,시호는 普照國師)을 만나 함께 지내며 지눌의 정혜결사에서 조계선을 닦기도 했다.지눌이 송광산(지금의 조계산)으로 정혜결사를 옮긴 후 요세는 천태종을 중흥할 사명을 자각하고 천태종 수행으로 돌아왔다.1208년 부터는 월생산(月生山,지금의 월출산) 약사란야(藥師蘭若)에 머물고 있었는데 그의 고명을 들은 탐진(耽津,지금의 강진)의 세력가 최표,최홍,이인천 등이 그를 만덕산으로 초빙했다.


요세는 희종 7년(1211)부터 만덕산의 '옛 신라 절터'에 절을 짓기 시작하여 고종 3년(1216)에 80여 칸의 절집을 완성하고 1232년에 처음으로 보현도량(普賢道場,천태종에서는 법화경을 기본으로 삼는데 법화참회의 주존이 보현보살이므로 보현도량이라 했다)을 열어수행결사의 체계를 세웠다.이때부터 백련사라는 결사 명칭도 사용되었다.이후 백련사는 조계종 지눌의 수선사에 못지않게 대단한 성황을 이루었으며 최씨정권과 밀접한 유대를 가졌다.요세를 만덕산으로 불러들이고 후원한 최표와 최홍이 이미 최씨정권과 끈이 닿는 강진의 실력자들이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지눌의 수선사가 돈오점수(頓悟漸修),정혜쌍수(定慧雙修)를 수행의 요체로 삼았던 반면 요세의 백련사에서는 참회하여 죄를 멸하는 참회멸죄(懺悔滅罪)와 정토에 태어날 것을 바라는 정토구생(淨土救生)에 전념했고 염불선을 수행의 방편으로 했다.이는 교화의 대상에 대한 의식이 달랐기 때문이다.수선사가 어느 정도 높은 근기(根機)를 가진 중생을 대상으로 했다면 백련사는 '근기가 낮고 업장이 두꺼워서 자력으로는 도저히 해탈할 수 없는 범부'를 교화의 대상으로 하여 좀더 대중적인 면이 강했다.


요세는 83세로 입적한  후 국사로 책봉되었고 시호를 원묘(圓妙),탑명을 중진(中眞)이라 했다.요세가 법화도량을 연 이후 120여 년 동안 이 절은 백련결사의 중심으로 번창하면서 8명의 국사를 배출했다.


고려 왕조 말기에 왜구들이 자주 우리 나라 해안을 침범할 때 바닷가에 바짝 붙어 있는 이 절도 큰 피해를 입었다.조선 시대에 들어서는 태종 때 조계종 자복사(資福寺) 24사에 속하는 등 명맥을 유지했으나 척불론이 강하던 당시였으므로 사세는 미미했을 것이다.세종 12년(1430)에이르러 천태종의 종장인 행호선사가 세종의 둘째 형인 효령대군의 지원을 받아 절을 복구하기 시작,6년에 걸친 불사 끝에 비로소 옛모습을 얼마간 되찾았다.행호선사는 왜구에게 당했던 옛일을 거울 삼았던지, 절을 둘러 긴 토성을 쌓아 놓았다.그 토성은 지금 둔덕처럼 뭉그러졌지만 여전히 행호토성으로 불린다.


그후 효종 때도 몇몇 건물이 중수되었지만 영조 36년(1760)에는 큰 불이 나서 대웅전,만경루 등 대부분의 건물이 타 버렸고 불상만을 겨우 건져 냈다고 한다.지금 우리가 볼 수 있는 백련사는 그후에 중창된 모습이다.조선 시대에도 백련사에서는 8명의 대사가 배출되었다.그 가운데 여덟번째가 바로 다산 정약용과 교류하던 혜장선사 아암으로,그는 대둔사 쪽에서는 12대 강사로 꼽힌다.


지금 백련사의 규모는 크지도 작지도 않다.맨 앞에 만경루가 있고 들어가면 대웅보전과 명부전,칠성각,응진당이 나란히 남향으로 앉았으며 선방과 요사채가 있다.


다른 절에서는 보통 누각 아래를 뚫어 놓아 절 진입로로 삼고 있지만 백련사 만경루는 아래가 막혀 있으므로 빙 돌아서 안으로 들어가도록 되어 있다.그 모습에서 마치 덩치 큰 사람이 등을 돌리고 앉은 듯한 인상을 받게 되는데 일단 그 누마루에 올라앉아 절 아래로 트인 구강포를 내려다보자면 무뚝뚝한 첫인상의 섭섭함은 몇 배로 보상받고도 남는다.누안에 달린 현판은 동국진체(東國眞體)를 완성한 원교 이광사(圓嶠 李匡師,1705~1777)의 글씨이다.이광사는 여기서 가까운 신지도에서 귀양살이로 말년을 보냈다.그래서인지 좀 우울한 듯한 힘이 우줄우줄 생동하는 그의 독특한 글씨체는 멋 모르는 사람의 눈에도 굵은 느낌표를 찍어 준다.


지금은 만경루에서 막바로 절이 시작되지만 19세기 중엽까지는 그 앞에 해탈문이 있었던 모양이다.헌종 2년(1836)에 작성된 해탈문중수기가 절에 보관되어 있다.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36호인 대웅전은영조 때 화재를 입은 후 다시 세워진 건물이다.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다포집이며 기둥이 지붕 무게를 감당하기 겨운 듯 네 귀퉁이에 활주를 받쳐 놓았다.이 대웅전에서는 건물보다 현판 글씨 구경이 앞선다.'대웅' '보전'이라고 두 쪽으로 나뉘어 걸려 있는 현판 또한 이광사의 글씨이다.현판 양옆 기둥 위의 용두 장식이 눈에 띈다.


명부전을 지나서 북서쪽으로 가면 빈터에 백련사 사적비가 서 있다.숙종 7년(1681)에 당시의 홍문관 수찬 조종저가 지은 비문이 새겨져 있으며 보물 제1396호로 지정되어 있다.비석은 숙종 때 것이지만 아래위의 돌거북과 머릿돌은 고려 시대 것이다.『만덕사지』에 따르면 원래 이곳에는 고려의 문필가 최자가 비문을 지은 원묘국사의 부도비가 있었다.그 비신이 언젠가 훼멸된 후 돌거북과 머릿돌만이 남았다가 나중에 이렇게 다시 사용된 것이다.고려 돌거북은 점잖게 수염을 늘어뜨리고 두 눈을 씩씩하게 부릅뜨고 아래윗니를 맞물고 있다.여의주를 물고 있지 않은 것이 특이하다.


백련사에서 빼 놓을 수 없는 것,물로 동백숲이다.절을 에워싸듯 1500여 그루가 자라고 있으며 천연기념물 제151호로 지정되어 있다.
절 앞의 숲도 대단하지만 백련사 사적비에서 더 서쪽으로 가서 허물어진 행호토성 너머에 펼쳐지는 동백숲은 더욱 장관이다.이곳의 동백나무들은 해묵어서 둥치가 기둥만큼이나 굵다.잎이 짙어서 침침한 숲속 여기저기에는 단정한 부도 네 기가 흩어져 있다.3월 말을 전후한 꽃필 철이면 이 동백숲은 감동적이기까지 하다.또 그 무렵이면 백련사 앞길 가에 붉은 밭흙과 새파랗게 자라 올라오는 보리 그리고 샛노란 유채꽃이저마다 선명한 색으로 어우러지고 길가 집의 흰둥이,누렁이까지 어울려 정다운 '고향의 봄'을 이루곤 한다.
*한국문화유산답사회 지음 '답사여행의 길잡이'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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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자료는 백련사 홈페이지의 설명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