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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지산동당간지주(高靈池山洞幢竿支柱).경북 고령 본문

☆~당간지주/통일신라

고령지산동당간지주(高靈池山洞幢竿支柱).경북 고령

푸른새벽* 2015. 9. 8. 17:30

 

 

 

 

 

 

 

 

 

 

 

 

 

 

 

 

 

 

 

 

 

 

 

 

 

 

 

 

 

 

 

 

 

 

 

 

 

 

 

 

 

 

 

 

 

 

 

 

 

 

고령지산동당간지주(高靈池山洞幢竿支柱)


보물 제54호
경북 고령군 고령읍 지산리 4-2


고령은 대가야(大伽倻)의 도읍지로 알려져 있다.그래서 가야와 관련된 많은 유적과 유물들이 남아있다.현재 당간지주는 시내 한복판에 세워져 있는데,개발로 인하여 사찰과 관련된 직접적인 흔적은 발견되지 않고 있다.다만 이 일대에서 수습된 석불.석등.석탑 등이 있는데,통일신라시대의 것으로 알려져 있다.그리고 절이름은 물산사(勿山寺)로 추정되고 있다.특히 성당부지 좃어 시에 건물의 기단부 갑석으로 보이는 석재가 발견되어 당간지주부터 대가야 궁성지(宮城址)에 이르는 일대에 대규모의 사찰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아직까지 당간지주의 소속 사찰은 알 수 없는데,다만 당간지주가 남북으로 마주 서있고 주변 지형으로 보아 서쪽 편에 가람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두 지주는 하부가 매몰되어 있는 상태이며,지주 하단부의 치석 수법으로 보아 정연한 기단은 마련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그리고 두 지주 하부를 발굴한 결과 간대석은 결실되었지만 간대석을 괴던 받침돌이 확인되었고,잡석과 흙을 혼합하여 다짐한 것으로 확인되었다.지주부는 전후면과 외면 외곽에 일정한 너비로 윤곽대를 돌려 장식하였다.외면은 가운데에 1조의 세로띠를 추가로 조식하였는데,다른 당간지주에 비하여 너비가 상당히 넓다. 그리고 외면은 지주 상부를 1단 높게 치석하였다.정상부는 내면에서 외면으로 유려한 호선을 그리도록 하였으며,그 중간에 3단의 굴곡을 두었다.그래서 두지주의 내면을 맞대면 첨형(尖形)이 3개인 하나의 안상(眼象) 문야이 되도록 장식하였다.당간을 고정시키는 간은 지주 내며내 꼭대기에 '∪'형의 간구를 만들고,지면에서 47cm되는 높이에 사각형의 간공을 시공하여 끼워 고정시키도록 하였다.그런데 간구와 간공은 지주 규모에 비하여 작게 시공되었다.


이와 같이 고령 지산동 당간지주는 전체적으로 치석 수법이 정연하고,각 면을 고르게 다듬었다.또한 전후면과 외면에 장식적인 의장을 화려하게 하였으며,외면의 상부를 1단 폰게 한 것이나 정상부의 3단 굴곡 처리가 돋보이는 작이다.이러한 수법들은 경주 지역에 건립된 삼랑사지나 불국사 당간지주들과 강한 친연성을 보이다.한편 고령 지역은 경주와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위치하고 있어 경주 지역의 불교문화를 비교적 빠르게 접할 수 있었을 것이다.따라서 고령 지산동 당간지주는 경주 지역에 건립된 당간지주의 영향을 받아 통일신라 중후반경에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엄기표 지음 '한국의 당간과 당간지주'중에서*


 
고령지산동당간지주(高靈池山洞幢竿支柱)


마을로 변해버린 절터에 세워져 있는 이 당간지주는 동서쪽으로 서로 마주보고 서 있다. 안쪽 면에는 아무런 조각을 두지 않고, 바깥쪽 면에 양 모서리를 줄인 후 가장자리와 가운데에 세로띠를 도드라지게 새겨두었는데 그 모습이 장식적이고 화려하다. 앞뒤 두 면은 윗부분에 안상(眼象)모양으로 움푹 들어가게 새겨 놓았다. 꼭대기는 바깥으로 내려오면서 둥글게 깎여져 있으며, 3단으로 굴곡을 두었다. 안쪽 면의 아래위에는 당간을 고정시키기 위한 2개의 홈을 파놓았는데, 직사각형의 모습이다. 현재 아래부분은 묻혀 있어 받침의 모습을 알 수 없다.


단아한 조각솜씨와 그 수법에서 아름다움이 느껴지는 작품으로, 통일신라 중기인 8세기쯤에 만들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문화재청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