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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처럼 떠나다

충남 홍성 돌아보기 1(2015.10.17) 본문

답사.여행 후기

충남 홍성 돌아보기 1(2015.10.17)

푸른새벽* 2015. 11. 19. 10:42

어떻게,무엇부터 시작할까...

평소에는 어떤 종류라도 글을 쓴다는것에 큰 부담은 느끼지 않았는데

홍성답사기를 쓰려고 준비하면서 한동안 망연함에 쉬이 시작을 하지 못했다.

답사기를 써 본지가 너무 오랫만이라서 그런가?

무엇부터,어떻게 시작할까.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푹 빠졌던 답사에 멀미를 느껴 그 멀미 진정될 때까지 당분간은 쉬어보자고했던 요량이

게으름에 겹쳐 몇 해가 훌쩍 흘러버렸지만 답사에 대한 내 기본적인 허기가 사라진건 아니다.

그렇지만 그 아뜩한 멀미를 계기로 내 답사의 행태도 싹쓸이 저인망식의 그저 많이,여러곳을 보겠다는 욕심 버리고

답사처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풍광과 분위기를 만끽하는 느긋하고 여유로운 답사를 하겠노라 방향전환을 했다.

 

작년 하반기부터는 자리잡고 푹 눌러 앉은지 오래된 답사카페의 단체답사엔 세상 없어도 참석하고 있는데

내가 여러번 가 본 고장이라도 빠짐없이 함께 하고자 하는것은

사람을 만나는것이 좋기도 하지만 답사내내 앞서서 옛님에 대한 길눈을 틔워주는 고수들이 버글버글해

1박 2일 동안의 빡빡하고 피곤한 답사지만 단어 하나라도 줏어 듣고 배우는게 즐겁기 때문이다.

 

 

2015년 충남 홍성답사.

역시 자리깔고 앉은 답사카페의 정기답사였다.

 

서해안 고속도로의 지독한 안개로 인해 오전 9시 정각의 약속시간보다 십여분 정도 늦게 도착했던 모임장소인 홍주의사총.

 

그동안 내 답사의 정서에 무덤이나 총塚은 관심밖이었고 현재라고 크게 관심이 생긴건 아니지만

그래도 기왕지사 발걸음 닿았으니 한바퀴 휘 돌아보긴했다.

 

 

 

한말 홍성군 지역에서 있었던 의병활동 가운데 홍주성 전투에서 일본군의 대포공격으로 희생된 수백명의 의병들 시신이 홍주천변과 남산 일대에 흩어져 방치되었다가 1949년에 항일의병의 유골임이 밝혀져 이곳에 모셨다고 하니 숙연해진다.

 

 

 

홍주의사총에서 그리 멀지 않은 동네 한가운데 어린이 놀이터 옆에 자리한 홍성 대교리석불입상(洪城 大橋里石佛立像)

 

 

 

홍성 대교리석불입상이 있는곳 근처에 당간지주가 있어 광경사지석불이라고도 하며

생김새가 민불의 성격이 강한 점으로 미루어 절이 폐한 뒤사람들이 미륵으로서 세운 것이라고도 한다.

이 대교리석불은 내가 만나봤던 대부분의 석불이 오른손을 들고 있는것과는 다르게 왼손을 들고 있는것이 특이하다.

그런데 광경사지 석불이건 미륵불이건간에

불상의 표정이 푸근하지도 온화하지도 않은것은 그렇다치더라도 중생들의 소원따위는 안중에 없다는 듯한 상호가

솔직히 말하자면 못생겨도 너무 못생겼다.ㅎ

 

 

 

대교리석불이 있는곳에서 얼마 멀지 않은곳에 있는 오관리 당간지주.

동네를 가로지르는 개천 건너편으로 당간지주가 얼핏 보인다.

 

 

 

대고리석불입상에서 오관리 당간지주를 만나러 가려면 그리 크지않은 개천을 건너야 하는데 철제다리가 걸쳐져 있다.

속칭 말하는 뿅뿅다리.

일행들은 둔탁한 쇳소리로 삐그덕대는 다리를 건너며 예천 회룡포의 뿅뿅다리가 생각난다고 한마디씩 한다.

 

혼자였으면 속으로만 그렇게 생각했지 이렇게 호호대며 다리를 건너진 못했을것이다.

고래고래 고함소리가 아니라,남에게 피해를 줄 만한 박장대소가 아니라 자잘한 웃음과 소곤거림이 거슬리지 않는게 

단체답사의 묘미이기도 하다.

 

 

 

홍성 오관리 당간지주(洪城 五官里 幢竿支柱)

상상으로 그려봤던 모습보다 창백하다 싶으리만큼 희다는 느낌이 드는것은 근래에 목욕(?)을 당해서(?) 그렇지 싶다.

그래도 늘~씬하다.

 

 

 

당간의 두 지주 사이에 남북으로 길쭉한 돌로 간대석을 삼고 중앙에는 원좌와 원공을 시공한것이 상주 복룡동당간지주와 비슷하다.

 

 

 

오관리 당간지주는 홍성읍을 관통하여 흐르는 홍주천변에 자리하고 있는데 이곳은 고려시대 창건된 광경사지(廣景寺址)로 전해지고 있다.당간지주의 소속 사찰이 있었던 일대가 현재는 완전히 민가로 변하였지만 입지 조건으로 보아 원의 기능도 수행하였을 것으로 보인다.그리고 이 일대에서 석탑과 석불이 발견되어 현재 다른 곳으로 옮겨져 있다고 한다.

 

높이가 4.8m 이고 고려 중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하며 다소 무거운 느낌이라는 전문가들의 평가와는 달리 나에겐 늘씬하고 멋지게만 보이니

햇살 투명한 가을날 아침 빨간 감을 매달고 있는 감나무와 함께있는 모습으로 만나서 그런것이었을까.

그러고보면

처음 만났을 때의 장소와 분위기에 따라 각각 느낌이 달라지는건 사람이나 문화유산이나 다르지 않다.

 

 

 

홍주순교성지비와 생매장터

 

천주교 박해 시대 때 홍성(옛 홍주)에서는 천주교 신자들이 생매장을 당했다고 하는데 1866년에 일어난 병인박해가 전국적으로 계속되던 무진년(1868년)에 순교한 네 명의 처형장소를 기리는 곳으로 당시 순교자들이 생매장을 당한 장소는 홍주성 북문 밖으로 추정될 뿐 지금으로서는 그 장소를 찾을 수 없다고 한다.

 

우리 슬프고 험난한 역사의 장에서 신앙의 지조를 지키기 위하여 목숨을 잃은 분들이 안타깝기는 하지만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병인양요를 일으키게 한 그 사건이 쉽게 용납되지는 않는다.

 

 

홍성 내현리삼층석탑(洪城 內峴里 三層石塔)

내현리탑보다 ‘광경사지 삼층석탑’이라는 명칭으로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59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번 홍성답사를 주관한 한건택 교수의 의견에 따르면 이 탑은 광경사지와 관련이 없어 보인다했다.그리고 사찰의범위에 대해서는 기존 거대 절집들의 배치와 주민들의 전언과 당간지주를 기준으로 북쪽으로는 홍주향교, 동쪽으로는 대교리 일대로 넓게 추정하였다. 오히려 홍주성 성벽에 있는 석탑재와 치석재가 미륵사, 즉 오관리사지와 관련되었을 것이라 추정된다고 했다.

 

삼층석탑은 홍성여중 교문을 들어서면 오른쪽 야트막한 동산에 오래된 배롱나무 아래에 자리하고 있는데1914년 일본인의 집으로 옮겨졌다가

1959년 현재의 홍성여자중학교로 옮겨졌다고 한다. 그리고 2008년 자료에 의하면 삼층석탑은 구항면에 위치한 내현리사지의 석탑일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마모가 심한 이 석탑은 이동되는 과정에서 부재 일부가 결실된 것으로 보이며, 고려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내력과 명칭이야 어떻든 그건 문화재전문가들이 침 튀기며 다툴일이고

마모가 심하고 제 자리 떠나 있어 안쓰럽긴했어도 나는 이 탑이 눈에 그득하게 아담하고 이뻤다.

 

 

 

오전 11시 조금 넘어 도착한 용봉사.

(용봉사에 대해선 '용봉사돌아보기'에서 다시 쓰려하니 여기선 생략.)

 

 

 

용봉사로 오르는 길 왼쪽 큼직한 바위에 새겨진 용봉사마애불(洪城 龍鳳寺磨崖佛)

 

 

 

마애불의 오른쪽 어깨 옆 바위 면에

'貞元十五年己卯四月日仁符
O 佛願大伯士元烏法師
O O 徒官人長珍大舍' 라는 3행 31자로 불상조성기가 새겨져 있으니 이 불상이 통일신라 소성왕 1년(799) 4월에 장진대사가 발원하여 원오법사가 새겼음을 알 수 있고 대강의 연대를 짐작할 수 있으니 고마운 일이다.

 

 수줍게 웃는 듯한 모습의 이 마애불의 키는 2.1m이며 앞서 대교리미륵불과 마찬가지로 마모 되긴 했으나 왼손을 들고 있다.

용봉사 마애불은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18호로 지정되었다.

 

 

용봉사 경내에서 왼쪽으로 난 길을 올라 신경리마애불을 뵈러 간다.

 

 

 

홍성 신경리 마애여래입상(洪城 新耕里 磨崖如來立像)

 

이 부근이 용봉사 옛 절터인데 옛 행정명칭대로 흔히 신경리 마애불로 부르나 현재 소재지 명칭은 홍북면 노은리이다.

 

높다란 축대위 커다란 바위에 숙인듯이 새겨진 마애불은 머리 위쪽으로 바위 위에 보개를 얹었는데

얼굴은 몸에 비해 크고 풍만하고, 역시 왼손을 들고 있으며 큼직한 귀에 미소가 느껴지는 상호는 부드럽고 온화하다.

 

 

 

나는 이 불상을 딱 보는 순간 영월무릉리마애불이 떠 올랐다.

너무너무 비슷하다.

불상이 새겨진 바위의 형상이 꼭 암탉의 옆모습 같은.

 

 

 

충남 홍성군 홍북면 중계리 386-1

고암 이응노(顧菴 李應魯) 생가터와 기념관

 

 

 

나는 생가터라는건 별 흥미가 없다.

세세년년 존경받으며 역사에 기록될 만 한 인물이 태어나고 자란곳이 어찌 문화사적인 가치가 없을까마는

내가 깜빡 속아서라도 가 본 지금껏의 몇몇 생가터에서 느꼈던 허탈함과 낭패감.

고암의 생가터에서도 다르지 않았다.

 

명작엔 설명이 사족이 된다지만 이런 생뚱맞은 사기에도 역시 설명은 낭비에 다름아니다.

 

 

 

생가터와 몇 발짝 떨어지지 않은곳에, 들리는 말에 따르면 몇 억원을 들여 디자인하고 지은 건물이라지만

내가 보기엔 그냥 컨테이너 박스를 붙여 놓은 듯한 모양의 고암 기념관이 있는데

가는날이 장날이라고 무슨 행사가 있는지 어수선하고 번잡하기 짝이 없어 그야말로 휘돌아 나오는걸로 관람(?)을 마쳤는데

마침 눈에 익은 작품이 있어 사진기에 담았다.

 

눈에 익다...

예산 수덕사를 돌아보고 내려오는길에 들러봤던 수덕여관.마당 한쪽 바위에 새겨져있던 그림조각이다.

 

나는

이응로의 작품세계나 그의 미술사적인 업적에 대해선 가타부타 말 할 자격도 실력도 깜냥도 안된다.

하지만 한 여인의 순정한 일생을 그토록 매몰차게 짓밟은 그의 삶의 방식에 대해선 시쳇말로 영 밥맛이다.

 

수덕여관 마당 한켠의 바위에 새긴 그림조각.

그럴수 밖에 없었으리라.

제자와 눈이 맞아 자신을 버리고 떠난 사람을 일편단심 기다렸고 

나라를 들썩이게 했던 사건에 얽혀 잡혀와 옥살이 할 동안 옥바라지했고

출옥을 해서도 한동안 그의 건강이 회복될 때까지 묵묵히 수발을 했던 조강지처에게

적어도 인간이라면 무슨 낯으로,무슨 할 말이 있었겠으며 눈 맞추고 마주 앉을 용기도 없었을터이니

하릴없이 마당에서 작품이랍시고 바위나 쪼을 수 밖에 더 있었으랴.

아니,그런 미안함이라도 가지고 있었는지 그것도 의심스럽다.

 

그래서 나는 예술가로서의 그의 업적보다는 가장 기본적인 인간의 도리조차 다 하지 못한 그를 영영 못마땅해 할 것 같다.

 

 

 

고암의 생가터를 돌아보고 다음으로 갔던 곳.

한용운 생가터

이곳도 고암의 생가터와 그리 많이 다르진 않지만 적어도 알미늄틀에 번쩍이는 유리문을 단 화장실은 없었다.

 

 

 

한용운기념관에서 가장 현실감있게 보았던...

 

 

 

기념관 한쪽벽을 장식하고 있던 시화.

 

 

오후 4시 50분.

결성읍내의 거리에 저녁빛이 갸웃하다.

 

 

 

홍성군 결성면 읍내리 380-2 번지에 자리잡은 결성양조장.

 

 

 

생각했던것 보다 양조장은 그리 크지 않았고 시설들도 일견 단순해 보였지만

유산균, 비타민, 식이섬유 등이 풍부하고 목 넘김이 부드러우며 뒷맛이 깔끔한 특징을 갖고 있는 결성 막걸리는  프리미엄 웰빙주로 자리매김하는 데 성공했다. 이로써 소비시장을 주도하는 결성양조장은 고급화 전략을 시행하면서 한층 업그레이드된 막걸리를 생산하기 위해 연구개발에 주력하고 있고 2012년에는  대한민국 TOP BRAND 大賞을 받았다고 한다.

 

 

"손맛이 살아있는 전통막걸리의 맥을 이어간다는 자부심이 크다"는 사장님은

토요일 오후라서 일찍 문을 닫아야 함에도 미리 연락을 해 놓아 그랬는지 우리 일행을 맞이해

막걸리의 발효과정을 세세히 설명해 주었고 결성막걸리를 시음하게 해 주었다.

 

딱 시음의 정도로만~ㅎ

 

 

결성 양조장 맞은 편 도로변엔 지금은 아주 귀한 단어가 되어버린 다방이나 이용원이란 간판을 달고 있는 건물들이 조로록 늘어서 있다.

 

*    *    *    *

 

이번 1박 2일 답사여행 첫날의 끝머리.

홍성답사를 주관한 한건택교수는 마지막 답사처로 향하는 버스안에서

이곳에서 얼마멀지 않은곳 바닷가의 낙조가 일품이니 답사처 한곳을 포기하더라도 서해안 낙조는 꼭 뵈드리고 싶다했다.

일행중 여성들의 박수가 쏟아진것에 반해 남성들의 반응은 무념무상한것 같았다.

이번 답사여행에 참가한 인원중 여성들 숫자는 남성들의 삼분의 일 밖에 되지 않았지만 대한민국 아줌마들의 파워가 드러났다.

 

어쩌랴.

이럴때는 품 넓은 남성들이 양보를 해야지.ㅎ

 

사람에 약하고 분위기에 약한 카페지기는 분위기 띄운답시고 스마트폰으로 급히 낙조에 관한 시 한편을 찾아내

경상도 억양에 투박하고 밋밋한 어조로 읊었는데 그 어렵사리 찾아낸 詩는 이태극의 '서해상의 낙조'였다.

 

어허 저거 물이 끓는다.구름이 마구 탄다./둥근 원구가 검붉은 불덩이다./수평선 한 지점 위로 머문 듯이 접어든다.

큰 바퀴 피로 물들며 반 나마 잠기었다./먼  뒷섬들이 다시 환히 얼리더니 /아차차 채운만 남고 정녕 없어졌구나.

구름 빛도 가라앉고 섬들도 그림 진다./끓던 물도 검푸르게 잔잔히 숨더니만,/어디서 살진 반달이 함(艦)을 따라 웃는고.

 

 

너무나도 유명한 詩지만 왜 감흥은 하나도 없었을까.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내가 이 공간에 詩를 옮길 때는 시의 운율에 맞게 적당한 행간을 두고 쓰는데

카페지기의 시 낭송은 이곳에 어떻게 옮겨 놓을지 대략난감이라 고심에 고심을 거듭한 끝에 '/' 라는 기호로 그 밋밋함을 표현했다.

 

"이 유명한 시를 왜 몰라요?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도 나온건데..."

시에 대한 호응이 심드렁하자 카페지기가 멋적은 듯 한마디 하니

뒷자리에 앉은 아지매 여럿이 합창하듯 대꾸했다.

"우리가 배운 교과서에는 없었는데 아마도 카페지기는 실업계 고등학교를 나왔는갑다.ㅋㅋㅋ"

 

 

 

 


해는 온종일 스스로의 열로
온 하늘을 피빛으로 물들여놓고
스스로 그 속으로
스스로를 묻어 간다.

아... 외롭다는건
노을처럼 황홀한게 아닌가...

(노을 / 조병화 )

 

억센 경상도 억양이라도,투박하고 밋밋한 목소리였어도

이런 詩를 읊었다면 아지매들 반응은 정말 남달랐을 것을...

 

 

 

 

눈부시게, 눈이 부시게 쏟아지는
지는 해 아래로 걸어가는
출렁이는 당신의 어깨에 지워진
사랑의 무게가
내 어깨에 어둠으로 얹혀옵니다

사랑이 날개를 다는 것만은 아니더군요
사랑은,
사랑은
때로 무거운 비윗덩이를 짊어지는 것이더이다
사랑이 날개를 다는 것만은 아니더군요

(노을 / 김용택 )

 

 

 



하늘도 사랑을 하면
타는 속마음 숨길 수 없나 보다
우연이든 필연이든
마지막은 상처로 남는 사랑을 만나면
지붕 되어 품어온 온 세상 앞에서
붉은 눈물 흥건히 보이는 건
하늘도 어쩔 수 없나 보다
오늘의 쓰라림 오늘에 고이 묻고
아쉬움이라고는 없는 듯
돌아서며 처연히 침묵하고픈 건
하늘도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속살 터뜨리는 피눈물이 흘러도
아픔마저 생의 아름다움으로 믿으며
내일로 향한 통로를 묵묵히 걸어가는
내 사랑법도 어느덧 하늘을
닮아가나 보다

(장미빛 노을 / 류시경) 

 

 

홍성 첫날 답사는 이렇게 황홀하지만 가슴 싸아해지는 서해 낙조로 마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