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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처럼 떠나다

충남 홍성 돌아보기 2 (2015.10.18) 본문

답사.여행 후기

충남 홍성 돌아보기 2 (2015.10.18)

푸른새벽* 2015. 11. 23. 20:06

이번 1박2일의 홍성답사 중 내가 가장 신경이 쓰였던 부분이 숙소였다.

지난 8월 말의 성주답사에서 잠자리 때문에 너무 큰 불편을 겪었기 때문.

 

성주에선 고택에서 하룻밤을 묵었는데 고택이라길래 당연히 아궁이에 불을 때서 구들을 덥히는걸로 알았는데 

현재 고택엔 사람이 거주 하지 않는 관계로 아궁이는 사용하지 않는다는 말 뿐 따로 난방에 대한 어떤 설명도 없었다.

8월 말이라해도 일교차가 지독해 낮엔 더위로 반소매 옷을 입고 다녔지만  새벽엔 거의 초겨울 수준이었다.

그런데도 얇은 담요한장으로 냉골을 견뎠으니 그 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턱이 덜덜 떨릴 정도인데

나중에 알았던 사실은 고택에도 도시처럼 전기보일러 시설이 갖추어져 있었는데 우리는 그것을 까맣게 몰랐던 것이었다.

 

홍성에서의 하룻밤은 정확하게 기억은 못하겠지만 마을단위로 운영하는 수양관 비슷한 곳이었는데

건물도 지은지 얼마되지 않은 듯 깨끗했고 배정받은 방도 넓직한데다 방방마다 샤워실이 딸려 있었고

정갈한 이부자리와 베개도 넘치게 넉넉했다.난방이 잘 되었던 것은 말 할 필요도 없었고.

무엇보다 좋았던 것은 건물에 식당이 딸려 있고 식당에서 일하시는 분들도 상시 거주하고 있어

식사를 하려고 따로 움직일 필요가 없었다는 것.

 

음식도 집밥처럼 푸짐하고 따끈따끈했으며 음식을 만드는 아주머니도 매우 친절해 지금도 기억에 남는다.

 

 

사실 홍성으로 답사 오기 전날 밤 갑자기 찾아온 감기몸살로 죽이 끓도록 앓았었다.

이틀전에 그렇게 앓았다면 분명히 답사를 포기할 것이냐 참여할 것이냐로 갈등을 했을것이다.

그런데 답사를 떠나려고 새벽에 일어나니 상태가 말이 아니었고 무엇보다 양평에 거주하는 답사카페회원이

어차피 자동차를 운행할것이니 따로 움직이지 말고 동행하는게 어떠냐는 제의에 그러노라 약속을 했기에

그 약속 저버릴 수가 없었을 뿐더러 내가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홍성은 내 답사걸음이 미치지 않은 고장이기도했고...

 

 

우리 답사카페의 1박 2일 단체답사엔 항시 새벽거리 답사가 있다.

답사동선에 넣자니 시간이 촉박하고 지나치자니 너무 절절한 옛님을 찾아 신새벽에 나서는 것인데

강제성은 없어 새벽에 일어날 자신이 없는 사람이나 나같이 산에 오르는게 힘겨운 사람들은 참여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잖아도 산에 오르는건 자신이 없고 감기몸살로 컨디션 영 엉망이라 당연히 새벽거리 답사는 미리감치 포기했었다.

 

새벽거리 답사처인 빈절골사지에 가지 못한 나를 배려해 빈절골사지마애불의 위치도와 사진을 보내준 이가 있어 이곳에 게시할 수 있다.

이 공간을 빌어 옛님카페의 플로우님께 감사의 마음 전한다.

 

홍성 빈절골사지의 정확한 위치는 모르겠지만 빨간동그라미 안에 표시된 용봉폭포 근처 어디쯤이라는데

다녀온 사람들의 말로는 용도사 아랫쪽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너덜겅지대를 한참이나 올라가 무척이나 힘들게 만나뵌 옛님이라 했다.

 

 

 

홍성 빈절골사지 마애불.

 

홍성군 홍북면 상하리 산 1-1번지에 위치하고 있다는 마애불은 보관을 쓰고 있으며 중앙에 화불을 새긴 관음보살이다. 두광은 동심원으로 표현하였으나 신광은 생략하였다 불신 주위에 특별한 문양은 보이지 않는다. 상호는 근엄한 표정이다. 목에는 삼도가 보이고 법의는 통견으로 U 자형 주름이 길게 드리워져 있다. 오른쪽 수인은 가슴에 두고, 왼쪽 수인은 몸에 붙여 아래로 향하였다. 발은 불신과 일석이다. 고려시대에 조성한 불상으로 알려져 있다.

 

홍성의 빈절골은

옛날에 큰절이 있었는데 어느날 지나는 중이 와서 말하기를 " 남쪽으로 내를 돌려서 내면 부富하리라" 하여 그렇게 하였더니 내에서는 용이, 산에서는 봉이 나가고 그 후엔 절이 망하여 빈절골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빈절골사지는 빈절골 계곡의 상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무너진 축대, 금당지의 석탑, 석등 부재, 마애보살 입상이 있다. 사찰명칭 및 사적은 전하지 않으나 사역으로 미루어 큰 절터 보다는 암자로 추측된다.

(자료는 옛님카페 선과님의 답사기에서 인용했으며 사진은 역시 옛님카페의 플로우님 작품이다.)

 

 

 

아침식사를 하기엔 조금 이른 시간 빈절골사지에 다녀온 카페지기가 나를 따로 부르더니 상하리미륵불을 보고 오라고했다.

원래 답사동선엔 상하리미륵불이 있었으나 너무 일정이 빡빡해 생략할것 같으니 아침식사전에 얼른 다녀오라면서

자동차로 용도사까지는 금방이라고했다.

나처럼 빈절골사지엔 못 갔던 일행 셋이 함께 갔던 용도사.

 

일주문도 없는 조촐한 절집 용도사 경내에 들어서면 법당보다 먼저 우람한 모습으로 다가오는 상하리미륵불.

 

 

 

시도유형문화재 제87호로 지정된 홍성 상하리미륵불(洪城 上下里彌勒佛)

넓적한 얼굴에 몸체도 평면인 이 거대한 미륵불은 언뜻 논산 관촉사 미륵과도 닮아 보이는것이 고려시대 불상임을 알 수 있다.

 

 

 

눈.코.입이 시원시원하게 표현된 이 미륵불을 보고 같이 갔던 일행중 한사람은 남태평양 이스터섬의 모아이 같다고 했다.

그러고보니 비슷해 보이기도 한다.

 

 

 

오전 10시.

아침 식사를 마치고 홍성 답사 둘쨋날의 공식적으로는 첫번째 답사처인 홍성군 홍북면 내덕리 어경마을에 닿았다.

이 마을 사람들은 할머니 미륵이라고 부른다는 홍성 내덕리석불입상(洪城 內德里 石佛立像)을 만나러.

불상은 마을 한가운데 민가와 민가사이의 배추밭 위쪽 얼겅설겅 쌓아 놓은 돌단 위에 모셔져 있었다.

 

 

 

홍성 내덕리석불입상(洪城 內德里 石佛立像)

 

내 눈에는 신체 아랫쪽의 옷자락 무늬만 선명해 뵈는데

어경마을의 수호 상징이기도 한 미륵상은 머리에 돌 모자를 쓰고 있으며 예전엔 그 앞에 아기 미륵이 있었으나 6·25이후 없어졌다고 한다.

지난 80년대 초에는 이곳에서 고려청자로 추정되는 꽃병이 발견됐으며 지금도 미륵상 주변엔 기왓장과 그릇 조각들이 발견되기도 하며
해마다 박물관과 문화재 관련 인사들이 미륵을 조사 연구하기 위해 이 곳을 다녀간다. 마을 사람들은 이 미륵상이 학계의 고증을 거쳐 문화재로서의 가치를 인정받길 바라고 있다. (충남.넷/지정숙 기자의 기사에서 인용)

 

 

 

어경마을 내덕리석불을 만나고 그 다음에 찾아뵌 홍성 용산리석불입상(洪城 龍山里 石佛立像)

 

홍북면 용산리 용두마을에 위치한 이 석불은 앞의 내덕리석불처럼 마을사람들에겐 미륵불로 불리우는데 마모가 심한 편이기는 하지만

반쯤 뜬 듯한 눈에 코는 뭉툭하고 조금 두툼하게 표현된 입가에는 얼핏 잔잔한 미소가 보인다.오른손을 내린 반면 왼손은 어깨부분에 올린 모양은 어제.오늘 살펴본 다른 석불들과 같은걸 보면 홍성지역 불상의 특징이 아닌가 싶다.

 

 

 

나는 지금도 답답하고 갑갑하다.

내 못믿을 기억력 때문에.

 

이 용산리석불을 척 보는 순간 머리속에 겹쳐지는 다른 석불이 하나 떠올랐는데 그게 어디에서 보았는지 도통 기억이 나질 않는다

길가 위쪽 야트막한 언덕 계단을 올라가면 벽돌담에 둘러싸여 자리한 위치와 불상의 모양새까지 분명히 비슷한데

어느고장이었는지 불상의 명칭이 무엇인지 아물아물 기억에서 건져올려지질 않아 너무 답답하다.

 

불상에서 내려다보면 왼쪽으로 길가에 문을 닫은 작은 가게가 하나 있고 그 가게 앞에 자동차를 세워두고 조금 걸어서 그 석불을 보러 갔는데,

석불의 아래쪽은 그리 번잡하지 않은 왕복 2차선의 굴곡진 자동찻길이고 그 자동찻길을 따라 기찻길인지 공단인지는 모르겠지만

높은 차단벽이 설치되어 있었던것까지 생각이 나고 그 때도 혼자의 답사길이었고 서울에서 그리 먼 고장은 아니었던것 같고...

 

이 답사기를 쓰면서 다시 한번 내 답사기록 사진파일을 몽땅 뒤져 보았다.

그래도 못 찾았다.

그래서 더 답답하다.

 

 

홍성답사 둘쨋날의 시작을 불상 두 기를 만나는 것으로 하여 다음으로 찾은 곳은 홍북면 노은리 104번지에 위치한

충청남도 기념물 제5호로 지정된 성삼문선생유허지(成三問先生遺墟址).

 

도로변에서 약간 올려다 보이는 곳, 삼태극문양 선명한 곳이 노은단인데 홍성군청 자료에 의하면

숙종 2년(1676)에 읍사 이옥량이 선생의 옛 집 근처에 사당을 세우고 사육신을 같이 모실 것을 청하자, 나라에서 녹운서원이라 하였고, 뒤에 노은이라고 이름을 바꾸었다. 그후 매년 12월에 제사를 지내오다가 대원군이 서원철폐령에 의해 철폐되었고, 후에 유생들이 사육신의 위패를 모시고 노은단이라고 하고 제사를 지냈다.1954년 홍성 고적현창회에서는 제단을 보수하고, 해마다 음력 10월 20일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이전의 제단 자리는 이곳에서 동북쪽으로 약 50m 지점에 있으며, 유허비는 약 30m 거리의 마을 앞에 있다.

 

답사첫날에 찾아갔던 이응로생가나 한용운 생가처럼 생경하긴 여기도 마찬가지다.

 

 

 

유허지임을 알리는 유허비는 조금 아래쪽 도로변 작은 전각에 갇혀있다.

 

 

 

좁은 전각에 갇혀 있어 사진을 찍기도 어려워 부분부분 나누어 사진기에 담을 수 밖에 없었고

더우기 한문에는 까막눈 수준이라 도저히 알 수가 없으니...

 

유허비란 옛 선현의 자취가 있는 곳을 후세에 전하고 이를 계기로 그를 추모하기 위해 세워두는 비로, 이 비는 조선시대 전기의 문신이면서 사육신의 한사람인 성삼문(1418∼1456) 선생의 공적을 적고 있다. 선생은 세종 29년(1447) 문과 중시에 장원으로 급제한 후 집현전 학사로 뽑혀 왕의 극진한 총애를 받았다. 왕이 훈민정음을 만들 때에는 정인지·최항·박팽년 등과 함께 훈민정음의 반포에 크게 공헌하였다.

 

수양대군이 어린 조카 단종의 왕위를 빼앗아 즉위하자 박팽년, 유응부, 허조, 이개 등과 함께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 발각되어 죽음을 당하였다. 절의를 지닌 대표적인 조선시대의 선비로서 오늘날에 이르러서도 많은 이들의 우러름을 받고 있다.

조선 현종 9년(1668) 선생이 태어난 이곳에 비를 세워두었으며, 현재는 비각을 세워 보존하고 있다. 송시열이 지은 글에, 김진상의 글씨로 하여 비문을 새겼다.

 

 

오전 10시 40분

성삼문유허지에서 자동차로 2~3분 거리에 있는 고택을 찾아가는 길.

<내포 역사 인물 길>이라는 단정하고 깔끔한 안내판을 지나 천천히 걷는다.

 

 

 홍성군 홍북면 최영장군길 11-26

중요민속문화재 제231호로 지정된 홍성 엄찬고택(洪城 嚴璨古宅).

이 집은 사육신 성삼문의 외손 엄찬이 살았던 집으로 전해오며 성삼문은 그의 외가가 있는 이 마을 노은동에서 태어났다고 하는데 그가 태어난 집이 어딘지 알 수 없지만 이 가옥이 그의 탄생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추측된다. 이 가옥에는 원래 사랑채와 문간채도 있었으나 현재는 안채와 안채에 붙은 익실, 중문간채만 남아있다.

 

"아~이런데서 살고싶다."

"겨울이면 억수로 춥고 불편해서 하루도 몬살낀데~" 옆에서 거드는 사람.

"계절이 어디 겨울뿐인가? 정히 그렇다면 봄.여름.가을만 여기서 살아보고 싶다.ㅎ"

 

성삼문이라는 이름은 역사교과서에서 배운대로 지조과 고통의 이름으로 각인되어 있지만 그와 연관된 이 고택만큼은

넉넉하고 푸근한 풍경이다.

 

 

 

안마당이 트이지 않고 사방이 막힌 'ㅁ'자 형의 집에 안마당 역시 트이지 않은 ‘ㅁ’자 형으로 규모까지 작아 꽉 갇힌듯 하지만

아늑하고 포근한 감은 있다.방 앞쪽 오른쪽으로 보이는 부엌 상부는 누다락을 만들어 안방에서 출입하도록 하였다.

 

 

 

이 고택은 안채의 중심부에 안대청을 두고 좌우에 안방과 건너방을 배치해 두었는데

"왜 안채의 건넌방 창문턱을 유별시리 높게 해 놓은지 아는사람?"

"글쎄요~무슨 심오한 의미라도 있는건가요? "

"양반님네들이 노비나 종을 부르거나 일을 시킬때 대청으로 나가려면 의관을 정제하고 위엄을 갖추어야 하는데

그게 귀찮고 또 혹시라도 긴급한 일을 벌이고 있다가 노비를 부를 일이 생길수 있으니 윗옷만 대충 걸치고 앉아도

마당에 서 있는 노비나 종은 바지를 입지 않은 줄 모르게 하려고 그랬던거지"

"아니~저고리는 입었는데 바지는 왜 안 입었으며 그 긴급한 일이라는게 뭘까요?"

"이 사람들이 정말~ 몰라서 묻나? 척 하면 삼척이고 쿵 하면 담넘어 호박 떨어지는 소리지 뭘 그걸 꼭 집어서 말하라카노~ㅎ"

장난스런 카페지기의 말에

우린 모두 방으로 들어가 창문가에 앉아서  마당을 내려다보고 다시 방에서 나와 마당에 서서 방을 올려다 본 후

고개 끄덕이며 한바탕 웃었다.

 

 

 

고택의 중문간채 측면이 참 멋지다.

우진각 지붕과 흙벽은 옛날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운데

여름에 책 한권 들고 큰 댓자로 누우면 신선이 부럽지 않을것 같다~ㅎ

 

 

 

엄찬고택을 둘러보고 다시 한군데 더 찾아 갔던 홍성군 장곡면 산성리 309번지 사운 고택(洪城 士雲 古宅).

이곳 역시 중요민속문화재 제198호로 지정되어 있다.

 

건축양식으로 보아 19세기 중반에 지어진 것이라는데 입구부터 정성스런 관리의 손길이 느껴진다.

 

 

350년 전에 지어진 이 집은 양주 조씨 충정공파의 종가로, 현 소유주인 조환웅씨의 고종조인 조중세의 호인 ‘사운(士雲)’에서 택호를 따왔다. 사운은 구름 같은 선비라는 뜻이다.

 

 

 

사운고택의 또 다른 이름은 ‘우화정(雨花亭)’이다. 꽃비가 내리는 정자라는 의미로, 조선 영조때 문신인 자하 신위(紫霞 申緯)가 이곳에 머물때 봄철 사랑채 수루앞 벚나무에서 꽃잎이 떨어지는 모습을 보고 붙였다고 한다. 수루 안에는 조선 3대 묵죽화가로 불렸던 신위가 쓴 우화정이라는 글씨가 남아 있다. 수루 밖에는 ‘낮잠 자는 집’이라는 뜻의 ‘수루(睡褸)’라는 현판이 달려 있다. 누마루 아래에는 회벽에 기와로 ‘천하태평(天下太平)’이라는 글씨를, 그 사이에는 건곤감리의 팔괘 무늬를 들였는데 원래의 모양은 부드럽고 아름다웠으나 개축을 하는 과정에 좀 우스꽝스런 모습으로 변했다고 고택을 관리하는 이 댁의 종손께서 말해 주었다.

 

 

 

그런데 엄찬고택과 사운고택 두 곳의 고택을 둘러보았지만 이 사운고택에 대해선 별로 기억에 남는것이 없다.

조상에 대한 긍지로 이 댁을 관리하시는 종손께서 일부러 시간 할애하여 고택 곳곳에 대한 설명을 해 주셨고

마지막엔 슬라이드까지 봤건만 왜?

 

우르르 몰려가 우리끼리 이러고 저러고 의견 분분했던 엄찬고택이 훨씬 기억에 남고 이야깃거리가 많다.

사운고택에선 다만 뒷마당을 지키고 있던 저기 견공만 기억에 남을 뿐.

 

 

 

오후 1시 12분.

점심시간이 늦어 몹시 시장했다.

 

홍성답사 1박 2일동안의 먹거리는 첫날 점심에 어죽을 먹어본 것이 특이했고 그날 저녁과 둘쨋날 아침은 숙소에 딸린 식당에서

가정식 백반을 먹었으니 별로 특별한 것은 없었다.

점심은 좀 괜찮은 충청도식 한정식으로 대접하겠다해서 찾아갔던 음식점.

음식점은 고택이라고 할 만한 오래된 기와집이었는데 그 음식점에선 이렇게 개인이 운영.관리하는 식기박물관도 있었다.

 

음식의 종류나 가짓수는 많았고 음식의 맛도 정갈하고 괜찮았다.

그런데...

나를 비롯해서 대부분이 밥이 코로 들어갔는지 입으로 들어갔는지 도통 몰랐으니 음식의 맛도 느낄수가 없었다고 하며

개중에는 식사 후 나에게 소화제 준비해 온것 있으면 달라는 사람도 있었다.

그 이유는 너무 번잡하고 소란스러웠던 것.

 

밥을 먹으러 간 집에서 주인인 듯한 예쁜 여인네가 우리 일행을 기업체에서 상품홍보를 위해 보내주는 공짜 여행다니는 사람들 대하 듯 했다. 

배고픈 사람들 이리저리 끌고(?) 다니며 귀에 들어오지도 않는 음식점에 대한 유래와 식기박물관에 대해 장황하게 설명을 했으며

이전 답사처에서 시간이 늦어져 예약시간보다 조금 늦게 도착한 것이 이유가 되어 원래 예약했던 방에는 못 들어가고

안채와는 떨어진 생경하고 어설픈 공간에서 식사를 하게 되었는데 그 곳은 마치 학생수양관의 단체식당 같았지만

그것까지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식탁에 음식들을 차리는것과 동시에 한쪽 벽면을 꽉채워 비디오 테이프를 틀기 시작했다.

고막이 터질 정도로 소리는 컸는데 그것도 성에 차지 않는지 주인인 듯한 여인네는 고래고래 큰소리로

무언가를 우리에게 끊임없이 열심히 설명을 하기에 나는 답사를 주관한 분께 물었다.

 

"우리가 홍보물 보고 듣는 대신 공짜밥 먹는거예요?"

"아닙니다.밥값 정확하게 제대로 지불했습니다."

 

집에서 밥을 먹을 때도 누가 큰 소리로 이야기를 하거나 주변이 번잡하면 반드시 체하는 내 성미에 도저히 참을 수 없어

제발 소리라도 좀 줄여달라 부탁을 했을 정도였으니까.

 

배고픈 사람들 먼저 편안하게 조용하게 식사를 하게 한 다음 식기 박물관이나 음식점의 자랑을 했으면

차분히 듣고 또 차분히 돌아보고 했을것을.

 

 

공짜 점심을 눈치보며 얻어 먹고 나오는 듯한 기분으로 음식점을 나오다 그나마 보기 좋아 한 컷.

 

 

햇빛과 바람을 번갈아 골라먹은 붉은 열매 몇 알이

볼이 미어지게 할 말을 머금고 둥근 어깨에 웃음을 걸치고 있는 여기.

선잠 깬 바람이 길손처럼 지나갑니다.

 

웃음속에 내가 갇힙니다.

가을 끝에 매달린 열매는 다가올 계절이 얼마나 두려울까를 생각하는 걸음.

가슴속 품은 사람 한 번 만나기가 땅에서 별까지 걸어가는 일이란 걸

부디 그대 이름 부르며 달려가는 이 길이 바람의 여정은 아니길 바라며 ...

 

 

 

홍성군 금마면 송암리 구암마을의 미륵을 찾아 가는 길.

오른쪽 큰나무 아래에 계신듯 싶다.

 

 

홍성 송암리미륵(洪城  松岩里彌勒)

 

1970년대에 이 미륵이 비를 맞아 훼손되자 미륵당을 조그맣게 지어 모시고 미륵제를 지냈으나 무슨 연유인지 한 때 미륵제를 그만두었으나

마을에 우환이 생겨서 다시 지내기 시작했다고 한다.제의는 정월 열나흗날 밤 8, 9시경에 지내며 제의가 끝나면 집집마다 소지를 올리고는 마친다. 이후, 밤 11시경이 되면 개인 치성을 드리러 가는데 이는 동네에서 미륵을 위하기 전에 개인적으로 치성을 드릴 수가 없기 때문이다. 장가를 못 간 아들이 있으면 결혼을 시켜달라고 빌고, 아이를 낳지 못하는 사람이 있으면 미륵에게 임신 치성을 드리는데 마을 주민들은 ‘미륵님이 한 가지 소원은 꼭 들어준다’고 믿고 있다. (한국민속신앙사전자료)

 

 

내가 살고 있는 곳과는 한참이나 떨어진 이 작은 마을,이 외진곳에 나는 어떤 인연이 닿아 이렇게 찾아오게 되었을까.

 

송암리미륵을 뵙고 돌아나오는 길의 땡땡하고 야물딱진 가을볕이 내겐 왜 나붓하게만 느껴졌는지.

 

 

1박 2일 홍성 답사의 대미를 장식한 홍주성.

오후 2시 40분.

가을이라해도 오후의 햇살은 뜨거웠고 지독한 감기몸살에 식은땀으로 목욕해 손수건 몇개를 적시며 다닌 답사길.

체력도 거의 바닥이 났을 즈음 찾았던 홍주성이라...

 

한교수는 홍주성의 정문을 두고 바로 홍주성의 성곽 외벽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돌을 잘 다듬어 4m정도로 얌전하게 쌓아올린 홍주성곽은 원래의 길이는 1,772m였다고 하며 .현재 남은 길이는 810m 정도인데 이것도 일제강점기에 일본사람들이 서문과 북문을 철폐하고 성곽을 허무는 것을 읍민들이 강경하게 반대하여 이만큼이나마 남은 것이라고 하니 홍성 사람들의 강단과 저항이 쌓인 것 같다.

 

 

성곽 곳곳에는 이렇게 탑의 부재들이 박혀 있다.

 

 

 

1906년 항일의병을 기념하는 병오항일의병기념비(丙午抗日義兵紀念碑),

독립군 사령관이었던 백산(白山) 이청천(​李靑天, 1888~1957)의 글씨라고 한다.

 

홍성의 남산을 둘러 싸고 있어 '남산공원'의 일부이기도 한 홍주성은 홍성 사람들의 도심 공원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어

우리가 잠시 쉬는 그 시간에도 산책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홍주성외곽을 더 돌아보겠다는 일행과는 떨어져 나는 그냥 그늘에서 좀 쉬었으면 싶었다.

나와 같은 생각을 한 일행들이 몇몇 더 있어 성곽안 쉼터 의자에 앉았는데 우렁우렁한 확성기 소리가 들렸다.

역시 가뭄은 가뭄인가보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곳에 있는 군청에선 다음날부터 제한급수를 하겠다는 안내 방송을 하고 있었다.

 

 

홍화문을 바라보는 방향에서 오른쪽으로 줄줄이 늘어선 각종 비석들.

가장 왼쪽에 보이는 것이 충청남도의 문화재자료 제166호로 지정되어 있는 홍주성수성비(洪州城修城碑)이고

그 다음의 것들은 목사·현감·관찰사 선정비이다.

 

홍주성 안에 수두룩하게 세워진 관찰사.현감.목사의 공덕비들.

 

 

 

홍주성 축성 당시에는 적대(敵臺)가 24곳,문이 4곳,성내에 우물이 2곳 있었으며 둘레에는 해지를 파지 않았다고 한다.여러 번 수리를 했으나 1870년에 목사 한응필이 동문인 조양문(朝陽門)과 서문인 경의문(景義門),북문인 망화문(望華門)과 관영(官營)을 지었다.다른 성들과는 달리 남문은 문루가 없는 점이 특이하다.북문에서는 역대 목사들이 사형수를 처형하였으며 1894년 갑오농민전쟁 때에는 잡혀온 농민군 수백 명이 처형되기도 했다.또 홍주성이 풍수지리설에서 말하는 '천둥이 땅에 떨어지는 형세'이어서인지 조선 선조 때 이몽학이 반란을 일으키는 등 싸움을 많이 치른 셈이다.(*한국문화유산답사회 엮음 '답사여행의 길잡이'중에서*)

 

사진을 살펴보니 이 문은 조양문도,경의문도 망화문도 아닌 홍화문이니 그렇다면 이 성문은 남문이란건데

위의 답사자료에서 밝힌 바로는 '남문은 문루가 없는 것이 특이하다'했으니 누각이 아니라는건데 이 홍화문은 큰 누각이 아닌가.

혹시 문루라는 명칭의 뜻을 내가 잘 못 알고 있나 싶어 사전을 찾아보니

'문루門樓란 대궐이나 성 따위의 문 위에 사방을 볼 수 있도록 다락처럼 지은 집'이라니 내가 알고 있는게 확실하다.

그렇다면 복원의 문제가 아닐까 싶다.

 

 

 

홍주성 홍화문에서 아주 가깝게 보이는 홍주아문.

오래된 나무들과 같이 있어 참 근사하게 보인다.

 

홍주아문은 조선시대 홍주목의 동헌인 안회당의 바깥문이다. 1870년 홍주목사 한응필이 홍주읍성을 크게 보수하면서 읍성의 동문인 조양문의 문루를 설치할 때 같이 세운 것이라 한다.

 

옛 홍주목 자리를 홍성군청이 그대로 물려받아 사용하고 있으니

홍주동헌 외삼문이었던 홍주아문(洪州衙門)은 지금도 제 구실을 톡톡히 해내고 있는 셈이다.

 

어찌 천편일률적이고 문화재건 문화유산이건 생각없이 자로 잰듯 원칙만 외치는 공무원들이 이런 기발한 생각을 했을꼬~

하기사 지금이야 군청건물이 낡아서 그런대로 봐주고 있지만 으리번쩍한 신청사를 지을 경우 언제 또 애물단지로 전락할지 모를일이다.

이런글을 쓰는 거개의 필자들은 대부분의 공무원들은 그렇지 않은데 일부가 그래서 욕을 먹는다고들 한다.

아니다.

내가 겪어 본,나라의 녹을 받는 공무원들은 다 그렇더라.

 

 

홍주아문 현판.

이 문에 걸려있는 홍주아문이란 현판은 안회당 현판과 함께 흥선대원군이 친필로 써서 내려주었으나 지금은 전하지 않으며

지금의 현판은 새롭게 단 것이다.

 

 

 

홍주군청 마당 한켠에서 늠름하고 씩씩하게 자리잡은 홍성 오관리느티나무와 느티나무 아래 근처에 박혀있는 부재에 대한 설명을 잠시 듣고

우리는 군청의 뒤로 돌아갔다.

 

 

 

옛 홍주목사의 집무실인 안회당(安懷堂)

 

정면 7칸 전체 22칸의 긴 건물로 오른쪽에는 누마루가 살짝 튀어나왔는데 전체적으로는 권위적이지 않으면서도

늠름한 자태를 풍기고 있다.1977년에 개수되어 비교적 말끔한데 가운데에 대청을 두었으며 양쪽으로 방을 두고 있다.

 

 

 

안회당 현판.

 

안회당(安懷堂)은 "노인을 평안하게 모시고, 벗은 믿음으로 대하고, 아랫사람을 사랑하여야 한다"라는 뜻으로

논어(論語) 공야장(公冶長)편 26장 '노자안지(老者安之) 붕우신지(朋友信之), 소자회지(少者懷之)'에서 따 왔다고 한다.

 

 

 

말간 살창에 사람의 손길로 반들반들한 마루와 마루로 오르는 나무 계단이 앙징맞고 예쁘다.

 

 

오후 세시 반.

점심먹은지 얼마되지 않았고 아침부터 쉴 틈없이 돌아친 답사길이라 몸살기에 더해 피곤과 졸음이 몰려오는 때.

아무 생각없이 그냥 이곳에서 댓자로 누워 쉬고만 싶었다.

 

안회당은 가운데에 대청을 두고 양쪽으로 방이 있어 홍성의 여러 유물적 사진을 걸어 놓았는데 간단한 회합의 장소로도 쓰이고 있는 듯하다.

 

차탁이 놓인 자리에서 창너머로 바라보이는 작고 이쁜 정자.여하정이다.

 

 

안회당을 돌아 반듯한 돌 다리를 건너면 여하정이다.

안회당의 후원이었던 듯 싶은 곳에 자리한 이 정자는 고종 33년(1896)에 목사 이승우가 연못가에 세운 육모 지붕 정자인데

봄.여름.가을.겨울 할 것 없이 사계절 내내 풍치는 그만일 것 같다.

 

여하정 육모기둥 안쪽에는 오언시(五言詩) 주련(柱聯)이 걸렸는데 이 답사기를 쓰면서 자료를 찾다가 발견한 것이 있어 옮겨 본다.

 

'余方宥公事 作小樓二間 (여방유공사 작소루이간)  내 목사로서 공사를 보게 되어, 조그마한 누 두 칸을 지었다

懷伊水中央 樹環焉泉縣 (회이수중앙 수환언천현)  연못의 물은 중앙을 맴돌고, 등나무 가지는 샘가에 달렸도다

開方塘半畝 九日湖之湄 (개방당반무 구일호지미)  반이랑 정도 수문을 열어 놓으니, 햇빛에 비친 연못의 물살이 아름답구나

一人斗以南 捨北官何求 (일인두이남 사북관하구)  남쪽은 한 사람의 도량으로 가하건만, 싫다하면 관직을 어찌 구하려 하는가

環除也皆山 於北豈無隹 (환제야개산 어북기무추)  환제는 모두 다 산인데, 그 북쪽에 어찌 새가 없을쏘냐

賓主東南美 基必宥所樂 (빈주동남미 기핑유소락)  손님과 주인이 동남에서 만나 좋아 하니, 반드시 즐거운이 있을 것이다'

(자료출처 - 다음블로거 turandott님의 자료에서인용)

 

 

 

홍주성에서 시작하여 홍주읍성을 마지막으로 1박 2일의 홍성답사를 마쳤다.

 

첫날의 열 한 곳.둘쨋날의 아홉 곳의 옛님을 만났던 홍성답사는 지독한 감기몸살 중에 만나뵜던 옛님들이라 더 기억에 남을 것 같은데

탑이나 석불보다는 홍성이 배출한 걸출한 인물들의 발자취를 더텨보는 의미가 더 강했던 것 같다.

그것은 홍성에서 태어나고 성장해 홍성사람에 대한 긍지가 남다른 한교수의 속내가 아니었나 싶기도하고.ㅎ

 

인터넷 세상을 터득했던 초창기엔 호기심으로 여러군데 동호회나 모임의 오프라인 만남에 많이 참석 했었지만

돌아와서는 항상 소모적인 시간들을 보냈다는 후회를 하곤했기에 요즘은 오프라인 모임엔 참석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단 한 곳.

우리 답사카페의 단체답사엔 피치못할 사정이 생기지 않는한 참석하려 노력한다.

그것은

답사후 돌아오면 가슴이 뿌듯하고 머릿속이 꽉 찬 듯 하며 다음 답사까지는 버틸 수 있을 만큼의 에너지가 축적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목에서 피가 날 만큼 감기몸살과 함께 한 답사여행이었어도 즐거울 수 있었다.

 

*덧붙이는 글 - 사진기를 새것으로 바꾼 후에 찍은 사진들은 내 컴퓨터의 자료에서 보면 정말 좋은데 이곳에 게시된 사진은 화질이 영 엉망이어서 이유가 뭘까 고민을 하고 있던 중 내 사진기와 비슷한 기종의 사진기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말에 의하니 사진의 크기를 한꺼번에 확 줄여서 그런 현상이 나타나는거라 했다.한번의 답사길에서 담아오는 사진이 몇 백장이라 사진의 크기를 일일이 차분하게 조정 한다는건 내 게으름 때문이라 어쩔 수 없고...

한가지 더

단체답사인 관계로 본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내 공간에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사진속 인물들께 정중하게 죄송한 마음 전한다.

자신의 사진이 게시된것이 불편한 분은 지적해주시면 삭제하겠다는 약속도 드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