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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사.여행 후기

홍성 고산사 돌아보기.충남 홍성

푸른새벽* 2015. 11. 25. 22:59

 

하...

한 번 더 하...

 

고산사를 생각하면 지금도 다리가 땡기고 숨이 가빠지는 것 같다.고산사 경내에 들어가는 진입로는 측정 해 보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내 경험으로는 경사도가 45도는 넘을 것 같았고 자동찻길에서 부터 절집 마당까지는 꽤 먼거리였다.

 

버스에서 내려 고산사로 향하는 길로 접어 들었을 때 만 해도 발걸음은 가벼웠다. "별로 힘들지 않게 편하게 갈 수 있는 절집입니더" 두어 해 전 고산사에 갔었다는 카페지기의 말이 있었으니까.(나중에 엄청 욕을 먹었다고 한다.ㅋ)

 

그런데 몽땅 시멘트로 울퉁불퉁 포장이 된 길을 조금 걸으니 진입로 오른편으로 커다란 나무 상자가 있었고 그 안에는 굵직하고 길쭉한 대나무 막대기들이 빽빽히 꽂혀 있었는데 우린 그걸 보고 무슨 이런 막대기를 꽂아 놓았을까 이상하게만 생각했지 그 막대기의 용도에 대해선 전혀 몰랐었다.그러나 몇 걸음 걷지 않아 곧 그 막대기의 용도를 깨닫게 되었는데...

 

까마득히 높은 경사진 길이여서 절집으로 오르내리며 힘들 때 의지하라는 절집의 배려였던 것.부랴부랴 다시 돌아가 각각 막대기 하나씩을 들고 그 막대기에 의지해 걸어 올랐는데 그래도 나는 걷다 쉬다를 반복했을 정도로 무척 힘이 들었다.시멘트 포장이 된 길이 아니라 흙길이 었다면 그래도 조금은 수월했을텐데.

 

 

 

 

검정선글래스를 쓰고 있는 분이 들고 있는 막대기가 바로 그 주인공.

허위허위 숨가쁘게 고산사에 도착하니 탑이고 불상이고 법당이고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고 그저 가쁜 숨 고르기에 정신이 없었다.

 

 

 

 

 

 

홍성 고산사삼층석탑(洪城 高山寺三層石塔)

 

『고산사삼층탑은 대광보전에서 왼쪽 앞으로 약간 기울어진 상태로 세워져 있다. 기단저석에는 4면에 안상이 새겨져 있으며, 기단석과 초층 탑신에는 우주가 조각되어 있다. 모든 탑의 부재는 각 1개씩으로 구성되었으며, 옥개석의 층급받침은 3단을 나타내고 있다.

 
갑석 및 옥개석은 모두 부분적으로 파손된 상태이며, 3층의 옥개석은 거꾸로 얹혀있다. 상륜부에는 노반만 남아 있다. 이 탑의 총 높이는 218㎝로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추정된다.』(국립문화재연구소자료)

 

겨우 진정하고 살펴 본 삼층탑인데 이렇게 조금 높은데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것을 나는 훨씬 좋아하는데 아래에서 위로 쳐다보는 눈 맛에 비해 아래로 내려다보는 눈맛은 같은 탑이지만 또 다른 느낌이 분명히 있기 때문이다.

 

 

 

 

 

 

고산사 대적광전 오른쪽 넓은 공간에 잘 모셔진 홍성 고산사석조여래입상(洪城 高山寺石造如來立像).

답사자료에 의하지 않더라도 근래에 만들어진 석조 대좌 위에 봉안된 것을 확연히 알 수 있다.아침에 만난 대교리석불과 같이 왼손을 들고 있는데 아마도 홍성지역 석불의 특성이지 싶은 이 석불은 통일 신라 하대 또는 고려 때 것으로 추정하는데 새 연화대좌와 옛 불상의 대조가 묘하다.

 

 

 

 

 

 

고산사 대광보전(大光寶殿).

문화재청이나 각종 답사자료에는 보물 제399호로 지정된 것은 대웅보전이라했다.

 

한국전통사찰정보 자료에 의하면

『근래까지 요사에 걸려 있었던 고산사 연혁에 관한 현판에는 1627년(인조 5)과 1671년(현종 12)에 각각 중수되었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이는 1974년 문화재연구소에서 고산사에 대한 학술조사를 실시하였을 때 발견된 암막새 기와 중에 ‘天啓六年月日高山寺’라고 새겨진 명문와(銘文瓦)의 내용과도 일치한다. 천계(天啓) 6년은 조선 인조 4년(1626)으로, 이 해에 고산사 대광보전이 대대적으로 중수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이때 대광보전 현판 뒷면에 ‘終南山麓有廢寺在基名當仙寶’라고 새겨진 「선학사영건기(仙鶴寺營建記」가 발견되어, 고산사 대광보전의 현판은 선학사에서 사용하던 것을 옮겨다 활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자료를 보면 왜 대웅보전이 아니라 대광보전인가를 수긍하게 된다.절집 법당의 현판까지도 재활용 할 수 있다는 기막힌 발상이 나쁘지 않다.되바라지지 않고 치장 요란하지 않고 수더분한 친구를 만난것 같은~ㅎ

 

 

 

 

 

 

연녹색의 가지런한 살창과 궁창에 그려진 문양이 참~ 이쁘다.

 

『고산사 대광보전은 기둥 위에만 공포가 있는 주심포 양식이어서 조선 초기 건물의 모습을 보여 주는데,크지 않은 건물이 팔작 지붕을 이루고 있어 특이하다.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칸수는 같으나 정면의 기둥 사이가 좀 넓은 편이다.

 

이 집을 조선 초기의 것으로 보게 하는 요소는 기둥머리의 짜임에 있다.기둥머리 위에 쌍 S 자 모양의 두공(頭工)을 놓고 그 위에서 쇠서(牛舌)가 빠져나왔는데 외목도리만 있고 내목도리가 없는 것이 주심포 방식이고 내.외목도리가 다 있는 것이 다포방식이므로 이 집을 주심포식으로 본다.또 한편으로는 주심포집은 대개 지붕이 맞배이며 천장이 그대로 드러나는 연등천장인 데 반해 이 집처럼 팔작지붕에 우물반자로 처리한 점은 다포계집에서 볼 수 있는 방식이다.또 지붕을 올리느라고 창방 위에 평방을 놓는 점은 다포계집의 방식인데 이 집도 그렇게 되어 있다.


여러 가지 면에서 주심포계와 다포계가 혼재하고 있는 것은 이 집이 변화의 중간 단계에서 고심하며 지은 집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갖게 한다.어쨌거나 전체적인 모습은 나름대로 아담한 규모의 아름다운 법당이다.』(한국문화유산답사회 엮음 '답사여행의 길잡이'자료)

 

 

 

 

 

 

 

대광보전이라면 비로자나불을 본존불로 모신 법당인데 고산사 대광보전에는 시무외 여원인을 한 석가여래좌상이 수미단 위에 모셔져 있다.그렇다면 고산사 주불전은 대웅보전이라야 맞다. 문화재청의 자료는 주불로 모셔진 불상을 기준으로 대웅보전이라고 칭했을 것이다.

 

『석가여래좌상은 소조불로 고려후기 여래상의 특징을 잘 간직하면서도 조선전기로 이행되면서 나타나는 세부적 변화과정이 잘 나타나 있는 불상으로 전체적으로 토속적인 느낌을 주며 머리는 나발이 뚜렷하고 목에는 삼도를 얕게 새겼다. 즉, 갸름한 얼굴형태나 착의법 형식에서는 고려 후기의 불상의 특징을 충실하게 따랐으면서도 어깨위로 치켜 올려진 옷주름이나 각 진 주름 표현 등에서는 조선 전기의 특징을 반영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반듯한 자세에 낮은 무릎, 손가락을 유난히 크게 표현한 점 등은 이 불상의 독특한 특징으로 생각되며, 세부적으로 부드러움과 섬세함이 잘 표현되어 있는 점은 소조의 특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문화재청자료)

 

어쨌거나 고산사 대광보전에 모셔진 석가여래좌상위의 닫집은 정말 화려하다.전하는 바에 의하면 불상 위의 닫집 일부가 미완성인 채로 있었다는데 단청을 그리던 화사가 아무도 들어오지도 말고 보지도 말라고 했는데 궁금증을 참지 못한 동자가 몰래 엿보자 그만 새로 변해 날아가 버렸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어쩐지 이런 전설은 부안 내소사를 비롯하여 여러 절집에서도 들었던 바가 있어 새삼 놀랍거나 신기하진 않다.어쨌거나 지금의 닫집과 단청이 그 때의 것은 아닐것이다.

 

 

 

 

 

 

 

대단히 불경스러운 일이지만 품 넓은 부처님께서 중생들의 호기심이니 이해해주시리라 편하게 생각했다.ㅎ

 

고산사 법당의 소조불상은 그냥 보면 대좌는 없이 수미단에 앉아 있는 모습으로 그 앞에는 각종 불구들과 공양물들이 놓여 있어 대좌가 있다는 사실을 철저히 공부하지 않은 답사객이나 불자들은 알지 못할것 같다.그렇지만 우리는 훌륭한 대좌가 있다는 정보를 미리 알고 갔었고 교수라는 명함을 가진 인솔자의 지대한 영향력으로 불상 뒤로 돌아가 장막을 들치고 대좌와 마주할 수 있는 영광스런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나 혼자였으면,내밀 명함이 없는 사람이었다면 언감생심 꿈도 꿀 수 없었을 것을.

 

팔각으로 된 겹꽃 복련 지대석 위에 단아한 팔각 홑꽃 복련 하대석이 있고 팔각의 기둥돌로 받쳐진, 거의 원형 그대로인 앙련 연꽃대좌가 그 속에 숨어 있었다.아니~이렇게 훌륭하고 아름다운 대좌를 왜 이렇게 깊숙히 감춰 놓았을까?고산사 법당이 협소하긴 했지만 그 이유라면 으리번쩍 거대한 닫집을 조금 줄이고 대좌에 온전하게 앉아계신 모습을 볼 수 있도록 하는게 더 낫지 않을까 싶다.

 

대좌의 사진이...좁고 어두운 공간에서 여럿이 몰려들어 살피다 보니 사진을 찍기가 쉽지 않아 두 부분으로 나누어 찍어 온 걸 다시 이어붙였더니 어째 영~.

 

 

 

 

 

 

결성면의 높지 않은 청룡산에 자리잡고 있는 고산사.

나지막한 산자락에 조용하게 자리잡은 이 절에는 수더분한 편액을 달고 있는 대광보전과 요사채 그리고 모서리가 다 깨져서 애처로운 작은 삼층석탑과 등신대 석불입상이 있을 뿐 한적하기 그지없으며 전하는 말로는 신라 때에 창건되었다고 하나 분명한 기록은 없다고 한다.

 

 

 

 

 

 

힘들게 걸어 올라온 만큼 절 마당에서 내려다보이는 풍경은 힘들여 올라온것을 보상 받을 만큼 호쾌하고 시원했다.

 

가을이 저렇게,더 할 수 없도록 익은 줄은 몰랐네.

 

 

 

 

 

 

 

허이허이 올라왔던 고산사를 다시 조심조심 내려간다.짚고 왔던 대나무지팡이에 다시 의지해서.

 

경사진 길이나 사람의 인생살이나 어렵사리 올라올 때 보다 내려갈 때가 더 힘들고 위험하다는건 그간의 경험으로 잘 알고 있다.더우기 약해진 관절을 조심해야 하는 만큼의 세월을 살았기에 내려갈 때 무릎에 전해지는 고통은 올라갈 때와는 비교불가.그런 이유로 내 사진기에 담아진 고산사 풍경은 다양하지가 못해 위의 사진 두 장은 남의 것을 슬쩍 해 왔는데 자세히 보니 제일 왼쪽에 엉거주춤히 내려가는 뒷모습이 찍혔네.ㅎ

 

이번 홍성의 1박 2일간의 답사중에 절집이라고는 첫 날에 가 본 용봉사.고산사 두 곳 뿐이었다. 답사기를 쓰면서 다시 고산사를 생각해 보았다.내 기억속의 고산사는 어떤 모습으로 남아 있을까...

 

보물로 정해진 대광보전도 아니고 단아한 불대좌도 아니고 안쓰러운 탑도 아니고 그냥 대나무 막대기와 경사진 길 뿐이라.내 답사걸음 중 지금까지 가장 어렵고 힘들었던 절집의 첫번째는 팔월 한 여름 뙤약볕에서 올랐던 해남의 북미륵암인데 이제 그 첫번째의 자리를 홍성 고산사에게 내 주었다.그래도 해남 북미륵암은 산행의 즐거움은 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