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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사.여행 후기

석남사 돌아보기.울산광역시

푸른새벽* 2016. 2. 10. 09:24

울산광역시 울주군 상북면 덕현리

가지산 석남사.

 

나라안에서 풍광좋기로 입소문 자자한 영남 알프스는

산을 좋아하긴 하지만 오르는건 자신없어 궁금하기만 할 뿐 언제가 한번은 꼭 가보겠다는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산.

그 산 자락에 자리하고 있는 석남사는 내겐 조용한 비구니절집이라고만 각인되어 있을 뿐 콕 집어 절절하게 그리워 가보고 싶었던 절집은 아니었다.

 

아니,어쩌면 석남사를 다녀왔던 사람들에게 들었던 이야기가 선입견으로 각인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이번 역시도 "석남사는 다른 사찰과는 달리 안거기간이 길며 지금도 수행중이니 각별히 조심해야 하며 법당이나 전각내부의 사진촬영 할 수 없는 것은 물론이고 발걸음마져 조심스러워야 한다"는 주의사항을 들었다.

 

 

 

 

2016년 1월 16일 오후 1시 경.석남사 입구에 도착했다.

두 개의 기둥에 비해 지붕이 조금 묵직해 보이는 일주문을 지나 오래된 나무들이 내어주는 잘 닦인 길을 따라 걷는다.절 마당으로 드는 이런 길을 좋아하는데 이렇게 잘 포장된 길보다는 흙길 그대로였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싶다.

 

 

 

 

 

 

일주문을 지나 조금 걸으면 절 마당에 들기 전 만나는 부도밭.

앞쪽 사각형 몸돌의 문양과 지붕돌의 생김새도 조금 특이한 이 부도나 옹기종기 모여있는 석종형의 부도들에 대해선

별 다른 자료가 없어 아쉽지만 지붕돌 생김새 특별한 이 부도 앞에는 '선종양종지종거기대사'라는 비석이 있으니 거기대사 부도임은 확실하다.이 부도의 생김새에 대해 답사 다녀와 여러가지 의문과 의견들이 있었고 그에 대해 명확하게 정리해준 분의 글을  추려보았다.

 

"조선후기 부도 중 상륜부가 길게 조성된 최초의 부도는 해남 대흥사 서산대사부도(1647)입니다.서산대사부도는 상륜부에 원추형의 높은 윤대가 표현되어 있어 상륜부가 길게 표현되었고 또한 고흥 능가사의 벽해당부도.벽천당부도.향암당부도에서도 상륜부가 긴 부도가 있습니다.거의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 중반에 조성된 부도이며 모두 상륜부가 전각형이며 2층의 모습을 하고 있으며 밋밋한 울주군 석남사 거기대사부도와는 형태가 약간 다릅니다.이 부도들의 모본(母本)은 능가사 광희대사부도(17세기 후반)로 추정합니다.

 

그런데 이와 비슷한 시기에 경상도 지역에서도 상륜부가 긴 부도가 출현합니다. 상륜부가 긴 부도의 유형은 두 가지로 형태로 나타나는데 하나는 윤대에 화문이 조식된 경우와 다른 하나는 윤대에 아무런 무늬가 없는 경우입니다. 전자는 청도 운문사 표충건사주태허대사남봉탑.진계당대사신서탑(1780)이고 후자는 포항 보경사 서운암부도군 중 송계당부도(1694)와 동봉대선사부도(1805).계영당부도(19세기 초)입니다.이중에서 석남사 지봉당 거기대사부도와 친연관계가 있는 부도는 포항 보경사 서운암동봉대선사회관부도입니다.

 

이 두 부도는 기단부가 하대석.중대석.상대석의 3단 구성이며 방형의 탑신석과 내부에 화문이 조식되어 있으며 상륜부가 아주 긴 특징이 있어 서로간의 밀접한 친연관계가 있습니다.그런데 지봉당거기대사부도는 탑신석이 방형이지만 직사각형으로 길게 조성되어 있기 때문입니다.이렇게 길게 조식된 탑신석은 포항 보경사 원진국사 부도인 보경사 부도를 그대로 모방한 모습입니다.이러한 탑신석이 긴 방형의 모습은 인접한 청도의 운문사퇴암당사지지여탑(1719)과 청도 대비사 취하당대선사청권탑(1768)에서 나타나듯이 이미 18세기에 방형의 긴 탑신석이 등장합니다.그래서 방형의 긴 탑신석의 부도가 선행의 모습입니다.

 

방형의 탑신석이 아담한 균형을 이루고 있는 울주군 석남사 지봉당거기대사부도는 탑신석이 아주 긴 방형의 보경사 서운암 동봉당부도(1805)를 모본으로 조성된 부도로 추정되며 동봉당부도 보다는 약간 늦은 19세기 초반에 조성된 부도가 아닐까 합니다."(옛님카페 달넘새님의 글.)

 

 

 

 

 

 

 

부도밭이 있는 곳에서 조금 더  걸으면 만나는 풍경.

담장너머로 보이는 조금 우람해 보이는 전각이 내가 상상으로만 그려오던 석남사의 풍경과는 많이 다르다.

그래도 이런 계곡이 있어 좋다.

 

 

 

 

 

 

계곡을 가로질러 놓여 있는 다리.반야교.

반야교를 건너가야 절 마당으로 들 수 있다.

 

 

 

 

 

 

반야교에서 올려다 보이는 범종각.

요즘 그동안 다녀온 절집의 木魚 사진을 정리하는데 분명히 범종각 안에 목어가 있을터인데 집에 돌아와 사진을 정리해보니 석남사 목어는 없다.왜 석남사에선 목어를 야무지게 찾아보지 않았는지.후회막급.

 

 

 

 

 

 

반야교 앞에 우람하게 서 있는 전각이 침계루인데 이 침계루를 통과해야만 그야말로 제대로 절마당으로 들 수 있다.

이제부터 발걸음 소리도 내지 말아야 한다.

 

 

 

 

 

 

대웅전 앞에 우람하게 자리하고 있는 일명 대석탑. 

이 탑은 1973년에 세워진 것인데,그 연원은 도의선사가 세웠다는 15층 석탑에까지 이른다.그 15층 대석탑이 임진왜란 때 파괴되어 탑의 일부 부재만 남아 있던 것을 스리랑카에서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셔와 봉안할 곳을 물색하면서 비록 3층으로 축소됐지만 개축하였다는 것이다.그 높이가 11m에 이른다.('답사여행의 길잡이'에서 발췌)

 

 

 

 

 

 

울주군 문화재자료 제4호로 지정된 석남사수조(石南寺水槽).

익히 다른 폐사지나 절집에서 많이 봐 온 수조와는 형태미가 좀 다르다.비구니스님들이 계신 절집답게 수조 역시 모양이 부드럽고 예쁘다.

 

 

 

 

 

 

 

 

석남사 극락전 앞마당에 있는 석남사삼층석탑(石南寺三層石塔).

대웅전 앞의 삼층탑보다 크기는 작지만 석남사 창건당시에 축조되었을 것이라하니 역사는 훨씬 오래 된 것이다.

 

 

 

 

 

 

석남사 극락전.

극락전에는 석조아미타불이 모셔져 있고 극락전 옆의 조사전에는 중앙에 도의선사의 진영이 모셔지고,좌우로 순조.철종 연간에 활동하던 선사 여덟 분의 진영이 모셔져 살펴 볼 거리가 하나 둘이 아니었는데...워낙 "조심하라 .사진찍으면 안된다."해서 석남사에서는 대웅전을 비롯하여 어느 전각 하나 사진을 찍은게 없다.

 

 

 

 

 

 

그래도 극락전 현판 사진 하나는 건졌다.

석남사 극락전의 현판은 탄허스님의 글씨라고 한다.

 

 

 

 

 

 

대웅전 뒷편을 지나 석남사승탑을 보러가는 길.

석남사 대웅전 뒷편에 음전하게 자리하고 있는 저 길다란 나무통은 조선후기에 만들어진 엄나무 비사리구시라고 하는데

간월사(澗月寺)의 명문으로 보아 간월사에서 옮겨 온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석남사 대웅전 뒷편의 길을 지나 이 길을 쭈욱 따라가면 계단이 끝나는 곳에 승탑이 있다.

 

 

 

 

 

 

내가 답사라는 이름으로 전국을 돌아다니기 전 품에 늘 끼고 살다시피 한 답사책에서 석남사를 소개하는 사진에서 보았던 딱 그 그림.

지금 생각하니 법당도 아니고 탑도 아닌 이 풍경을 석남사편에 넣었던 것은 바라보이는 풍광이 좋기도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니(순전히 내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비구니스님들이 계신 곳이라 법당이나 그 외의 것들을 사진을 찍기도,또 책에 넣기도 조심스러워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대웅전 뒷편으로 돌아들면 맞은 편으로 가지런한 담장이 보이는데 그 담장을 따라 자연스레 걷다보면 계단이 있고

계단을 오르면 울주 가지산 석남사의 대표적인 얼굴이라 할 수 있는,대표적인 유물인 석남사 부도를 만난다.

 

 

 

 

 

보물 제369호로 지정된 석남사 승탑(石南寺 僧塔).

 

팔각원당형을 기본으로 삼고,지대석 위에 상.중.하대로 구성된 기단을 쌓았으며 그 위에 몸돌과 지붕돌,상륜부를 차례로 놓았다.어느 부재 하나 빠지거나 크게 훼손됨 없이 비교적 온전히 보존되어 있다.1962년 해체 보수할 때 중대석 윗부분 중앙에서 사리공을 확인하였는데,사리 장치는 없었다고 한다.이미 도난당한 뒤였던 것이다.

 

통일신라 말기 또는 고려 초기에 세워진 것이 아닌가 추정되며,도의선사 부도라고 하지만 명확하지 않다.다만,전남 장흥 보림사에 있는 보조선사 부도와 닮은꼴인 데 비추어 가지산문과 어떤 연관성이 있지 않을까 생각해볼 수 있다. 그러나 시기적으로는 보조선사 부도의 양식을 본뜬 후대 작품임이 분명하다.('답사여행의 길잡이'에서 발췌)

 

그런데 울산 답사 후 카페에 올라온 글에는  신라 말 고려 초의 고승인 낭공대사(朗空大師)의 부도라고 확신하고 있는데 그렇게 확신하게 된 동기가 자세히 실려 있지만 여기서 그 글을 모두 옮기기도 그렇고해서 생략한다.

 

 

 

 

 

 

신라 헌덕왕 16년(824) 도의선사(道義禪師)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전해오는 석남사.중국에서 37년 수행 정진한 끝에 821년 신라로 돌아온 도의는 화엄종이 주류를 이루고 있던 신라에서는 선불교의 이념을 급진적이고 불온하다 하여 받아들이지 못하자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음을 알고 설악산 진전사로 들어가 40년간 제자를 기르며 지내다 입적한다.그의 제자가 염거화상(廉巨和尙)이다.염거화상 역시 공식적인 선문(禪門)을 열지 못하고 보조선사 체징(普照禪師 體澄)에게 법을 전하는데,이 보조선사에 이르러서야 최초의 선문인 가지산문이 열리게 되며 전남 장흥 가지산 보림사가 그것인데 전해지는 대로라면 석남사는 신라로 돌아온 도의가 진전사로 가기 직전에 창건한 셈이 된다.


이후 석남사에 대한 내력이 기록에 등장하는 것은 숙종 42년(1716)에 씌어진 「석남사적」에서다.이 기록에 의하면 임진왜란 때 불타 빈터만 남은 것을 현종 7년(1666)에 대웅전을 짓고 불상을 조성하였다고 한다.석남사는 이후 순조 3년(1803),1912년, 근래까지도 중수되면서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답사여행의 길잡이'중에서 발췌)

 

이 후 돌아가서 나에게 각인된 석남사는 어떤 모습일까.

그냥 승탑 이외에는 전혀...그리고 모든게 '금지'투성이였다는 그거.

 

 

 

 

 

 

별 기대없이 찾았던 석남사.

그래서 석남사를 떠나는 마음엔 되돌아 볼 아쉬움 하나 남지 않았고 발걸음 역시 가벼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