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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사.여행 후기

울산 망해사지(望海寺址)돌아보기.울산광역시

푸른새벽* 2016. 2. 12. 10:40

울산광역시 울주군 청량면 율리 산16

 

망해사지(望海寺址)

망해望海라 했으니 바다를 바라볼 수 있으려나?

 

 

 

울주군 청량면 율리 그리 높지 않은 영축산 기슭에 자리한 망해사지.

울창한 소나무들 보다 망해사지부도가 있음을 알려주는 시멘트 표지석이 먼저 눈에 띈다.

 

 

 

 

곳곳에서 자주 눈에 띄는 보석 같은 빨간열매가 달린 나무.

이 나무 이름이 뭐더라...

 

 

 

 

낙엽 쌓여 폭신한 언덕길을 오를 때의 갈색 분위기와는 사뭇 다른 광경이 펼쳐진다.

평지로 다듬어진 넓지 않은 터를 초록의 나무들이 둘러싸고 있는 듯한.

 

철책 울타리에  갇힌 아담한 석종형 부도가 우선 눈에 들어오고

 

 

 

 

나란히 서 있는 두 기의 부도.

 

이곳 망해사지에는 조성시기가 신라 말기로 추정되는 두 기의 부도가 자리하고 있다.

전형적인 팔각원당형의 부도를 똑 같은 모양으로 동.서로 만들었는데 양부도의 조형양식이나 각 부의 조각수법이 같으며

규모에 있어서도 거의 같은 크기이다.

 

 

 

 

망해사지 승탑(蔚州 望海寺址 僧塔) 두 기중 서편에 있는 승탑.

상륜부가 남아 있지 않으나 지붕돌 한쪽이 떨어져 나간 것 외에는 크게 손상되지 않은 모습이다.

 

 

 

 

승탑의 상륜부는 현재 아무런 부재가 남아 있지 않고

지붕돌은 처마가 비교적 얇고 넓은 편이며 풍령을 달았던 흔적인 구멍이 남아있다.

 

 

 

 

팔각기둥 모양의 몸돌은 각 면에 귀기둥을 조각하고 위쪽에는 창문 모양을 새기고 8면 가운데 하나 건너씩 모두 4면에 문 모양을 새겼다.

문 모양 위에는 아치형의 테두리를 둘렀다.

 

 

 

 

연꽃 장식 위에 올라앉은 중대석은 각 면마다 귀기둥을 조각한 팔각의 짧은 기둥이다.중대석을 받치고 있는 연꽃 하대석 윗면에는 중대석을 받치기 위한 굄이 각형 4단으로 조각돼 있다.그중 아래 1단은 비교적 높직하고 위쪽 3단은 나지막하다.상대석은 이런 중대석받침의 윗면 굄돌과 대칭되는 각형받침을 상대석 아래쪽에 조각해놓았으나 완전 대칭은 아니고 아래 나지막한 것이 둘,위쪽 높직한 것이 하나이다.연꽃잎이 장식된 상대석 윗면 역시 몸돌을 받기 위한 장치를 마련하였는데,상하로 된 원형 굄을 두 단 얕게 조각하고 그 아래위로 보조적 역할을 하는 각형 굄을 다시 1단씩 새기는 세심함을 보인다.('답사여행의 길잡이'에서 인용)

 

 

 

 

장방형 판석 여려 장을 잇대어 방형의 높직한 지대석을 마련하고 그 위에 기단부를 놓았다.

기단부는 팔각을 기본으로 한 상.중.하대석으로 이루어졌다.

안상을 새긴 팔각의 하대석받침과 고사리 모양의 큼직한 귀꽃까지 솟아오른 연꽃으로 장식했다.

 

참 이쁘다.

 

 

 

 

서편의 부도가 상륜부를 제외하고 거의 훼손이 없는 반면,

동쪽의 부도는 지금은 일으켜 세워져 있지만 한때 완전히 도괴되어 무너졌던 것이라

지붕돌 .몸돌을 비롯하여 각 부분의 훼손이 훨씬 심하다.

이같은 파손은 일제강점기 때 도굴로 인해 크게 파손되어 있었는데

상대석과 탑신,옥개석 등 부도의 중추부가 마구잡이로 깨어져 나갔다고 한다.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 이미 부도 두 기 중 한 기는 파손된 것으로 기록된 점으로 보아

1916년 이전에 도굴이 일어난 것으로 보인다.

 

 

 

 

망해사지승탑이 자리한 곳에는 각종 석조부재들 중의 하나.

석탑의 기단갑석일 것이라는 의견과 아닐것이라는 의견이 분분했다.

일행의 대부분은 크기나 모양으로 보아 탑의 기단석이라 했는데 탑의 기단석이 아닐거라는 이유는

기단석의 경우엔 네 면의 넓이와 크기가 같아야 하는데 이 석조부재의 경우는 지금 사진의 방향으로 볼 때

가로와 세로의 폭이 엄청나게 차이가 난다는 것이다.

설사 도굴꾼의 소행이라고해도 사각형의 기단석을 사정없이 깨트렸으면 깨트렸지 저렇게 세로면만 싹둑 잘라낸다는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승탑을 살펴보는 것보다 더 많은 시간을 이 석조부재 앞에서 갑론을박했는데

개개인의 상상력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이런것이 폐사지의 매력이 아닐까.ㅎ

 

 

 

 

망해사지승탑에 대해서도 아직 의견이 분분하다고 한다.

여러가지로 살펴봐도 확실히 승탑이 맞다는 의견과

승탑이라기고 단정짓기는 애매한 부분이 많으니 탑에 가깝다는 의견들인데

나같은 무지랭이는 문화재청의 자료를 아직은 믿고 있다.승탑이라고.

 

 

 

 

신라 제49대 헌강왕 때 왕이 울산 앞바다인 개운포(開雲浦)에 나가 놀다가 갑자기 구름과 안개가 자욱해지는 바람에 길을 잃게 되었다.

그 때 일관(日官)이 "동해 용의 조화이니 좋은 일을 행해 풀어야 한다"고 했다.

왕이 돌아와 곧 영취산 동쪽 기슭의 좋은 땅을 가려 절을 세우고 망해사(望海寺)라 하였다.

망해사를 혹은 신방사(新房寺)라고도 했으니.이는 처용을 위해 세운 절이다.

 

'그리하여 용을 위해 근처에 절을 짓도록 유사(有司.벼슬아치)에게 명령하였다.명령을 내리자마자 구름이 걷히고 안개가 흩어졌다.이 때문에 그곳의 이름을 개운포(開雲浦.구름이 걷힌 포구)라 한 것이다.

 

동해의 용은 기뻐하여 곧 일곱 아들을 거느리고 왕의 수레 앞에 나타나 덕을 찬양하며 춤을 추고 음악을 연주하였다.그 중 한 아들이 왕의 수레를 따라 서울로 들어와 왕의 정사를 보필했는데,이름을 처용(處容)이라 하였다.왕은 미녀를 주어 아내로 삼게 하고 그의 마음을 잡아 머물도록 하면서 급간(級干)이란 직책을 주었다.그의 아내가 매우 아름다웠으므로 역신(疫神)이 흠모하여 사람으로 변해 밤이 되면 그 집에 와 몰래 자곤 하였다.

 

처용이 밖에서 집에 돌아와 두 사람이 자고 있는 것을 보고는 노래를 지어 부르고 춤을 추다가 물러났는데, 그 노래는 다음과 같다.

 

동경(東京) 밝은 달에 밤새도록 노닐다가

들어와 자리를 보니 다리가 넷이구나

둘은 내 것이지만 둘은 누구의 것인가

본래 내 것이지만 빼앗긴 것을 어찌 하리.

 

그때 역신이 형체를 드러내 처용 앞에 무릎을 꿇어앉아 말하였다.

"제가 공의 처를 탐내어 지금 범했는데도 공이 노여워하지 않으니 감탄스럽고 아름답게 생각됩니다.맹세코 오늘 이후로는 공의 형상을 그린 그림만 보아도 그 문에는 절대로 들어가지 않겠습니다."

 

이로 인해 나라 사람들이 문에 처용의 형상을 붙여 사악함을 물리치고 경사스런 일을 맞이하려고 하였다.'(三國遺事 紀異 제 2편)

 

불교신문에 망해사지에 대한 글이 실려 있는데

'그래선가, 차라리 춤추고 노래 부르는 처용은 아내의 불륜을 이끈 세계에 대한 강렬한 항의로 보인다. 용으로 상징화한 비불교 신앙세력이었다가 불법에 귀의하여 중생을 깨달음의 세계로 이끄는 자가 바로 처용이라는 국내의 한 국문학자의 처용론도 귀기울여 볼만하다.'

 

처용설화.

다른건 몰라도 예쁜 아내가 다른 남자(역신)와 통정을 하는걸 보고도 참은게 잘 한 일인지는 모르겠다.

결국은 역신이 뉘우쳐 다시는 그런일이 없었다고 끝이 났지만

만약 처용이 아내가 외간남자와 통정하는 장면을 보는 즉시 역신과 싸웠다면 결말이 어찌 났을까?

그리고 그의 아내는 원래 행동거지가 문란한 여인은 아니었을까?

엄연히 혼인을 한,남편이 있는 여인네가 불가항력의 힘에 눌려 그렇게 한번의 일을 당한게 아니라

삼국유사의 문장을 읽어보면 밤마다 찾아오는 역신과 몰래 자곤 하였다 했으니...

 

아내와 통정을 하는걸 알면서도 노래하며 춤을 추었다는게 나는 도저히 이해가 안된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이해불가한 일들은 그 수를 헤아리기조차 어렵다해도

남녀의 관계에서 파생되는 사건이란게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진 않으니까.

 

그 일을 계기로 처용의 얼굴을 그려 문 앞에 붙여 놓으면 사악한 일을 방지할 수 있다는 대목에서도 그렇다.

처용의 얼굴을 그려 붙여 놓아 사악한 기운을 물리쳤다면

헌강왕 이후에도 신라는 몇 백년은 더 이어져야 하는게 맞다.

신라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헌강왕 이후 오십 여년 후에 망하게된다.

그래도 헌강왕대에서 신라왕조가 끝날 뻔한 것을 처용덕분에 그나마 오십년이라도 더 이어진거라 항변한다면

할 말은 없다.

 

9백년 이상 이어진 신라 왕조의 제 49대 헌강왕은 재위기간이 십년 남짓이며 그 다음 정강왕의 재위기간은 겨우 1년이다.

그 다음은 진성여왕인데 진성여왕은 사생활이 극히 문란했다고 세간에 알려져 있다.

이미 처용의 설화가 퍼진 헌강왕 때 부터 일부 귀족들의 사생활은 그렇게 문란했던게 아니었을까.

그러니 아내의 부정을 알고서도 세태가 그러니 처용 역시 그러려니하고 참은건 아니었을까...하는 의문.ㅎ

 

 

 

 

망해사지 부도가 있는 곳 아래에는 자그마한 절집이 있다.

그 절집의 주차장 근처 언덕에서 찾게 된 머리부분이 잘려나간 석불과 동자석.

 

 

 

 

절집 마당 한귀퉁이가 환하다.

벌써 동백꽃이 피었나 싶었는데

아하 ! 이곳은 남쪽지방이니까.

 

 

 

 

두상이 사라진 석불과 빨간 동백꽃에 홀려 있다가 이제 떠나야지 하고 돌아서는데

요녀석이 보였다.

한무리 답사객들의 왁자한 소리에도 짖거나하지 않고 어쩌면 저렇게 음전히 앉아 있었을꼬.

하긴 그동안 답사걸음으로 찾아 갔던 전국의 절집 견공들은 거의가 순했다.

제천 신륵사나 장흥 보림사를 비롯한 몇몇 절집을 제외하고는.

 

자신과 함께했던 반려견도 유기견으로 만들어 버리는 독한 세태에

그래도 날 춥다고 저렇게 옷을 챙겨 입혀준걸 보니 이 절집 사람들의 성정이 따뜻한것 같아 다행이다.

안녕~건강하게 잘 있어~

뭣이 그리 바빴는지 이녀석을 한번 쓰다듬어 주지도 못한게 영 서운하다.

 

 

 

 

바다를 볼 수 있겠다는 기대로 찾았던 망해사지.

시절이 수상해도 살아 있는 것들은 살아가야 하듯이

바다는 보이지 않아도,바다의 방향이 어딘지 가늠조차 할 수 없어도

찾아 올 때 바다를 볼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가졌듯

눈에 보이는 곳 옹색하더라도 내겐 바다가 보이는 너르디 너른 망해로 남아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