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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 봉산동당간지주(原州 鳳山洞幢竿支柱).강원 원주 본문

☆~당간지주/고려

원주 봉산동당간지주(原州 鳳山洞幢竿支柱).강원 원주

푸른새벽* 2016. 10. 16. 17:28


























































원주 봉산동당간지주(原州 鳳山洞幢竿支柱)


봉산동당간지주는 봉산동 민가가 밀집된 지역에 세워져 있는데 바로 옆으로 원주천이 흐르고 있어 사찰의 기능이나 역할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즉,당시 강이 주요 교통로로 활용되었으며,당간지주 소속 사찰이 강과 연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원(院)의 기능도 아울러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이 일대는 천왕사지(天王寺址) 등으로 전하고 있으나 이를 입증할만한 자료는 없는 실정이다.현재 당간지주가 있는 마을 일대에는 소위 철학관이라고 하는 점치는 집이 운집해 있다.이러한 것은 이곳에 절이 있었음을 간접적으로 시사한다.


두 지주는 봉산동으로 들어가는 도로 한쪽 편에 동서로 마주 서있다.기단부는 대부분 매몰되어 확인하기 어려우나부분적으로 지상에 노출되어 있는 큰 돌들을 볼 수 있어 자연석을 지하에 묻어 두 지주를 견고하게 고정하였던 것으로 보인다.그리고 두 지주 사이에는 간대석 역할을 하는 둥그런 돌이 남북으로 놓였다.간대석은 전체적으로 치석 수법이 고르지 못하고 파손된 부분이 많지만 상부에 3단의 원좌를 마련하고 가운데에 원공(지름 32cm,깊이 12cm)을 시공하여 당간을 끼우도록 하였다.


두 지주는 간대석 좌우에 'ㄷ'자형으로 홈을 파서 하단부를 끼워 견고하게 고정되도록 하였다.지주부는 각 면의 치석 수법이 고르지 못하고 정자국이 그대로 남아있다.서쪽 지주는 밑 부분에서 103cm되는 부분이 절단되어 시멘트로 연결한 흔적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1910년 절단되어 1980년 4월 복원한 것이라고 한다.지주 외면 모서리는 각을 깎았으며 지주 정상부는 반원형으로 깎아 보기 드뭄 치석 수법을  보이고 있다.동쪽지주는 파손된 흔적은 없으며 정상부는 옆에서 볼 때 양쪽에서 차츰 둥글게 깎아 올라가 꼭대기를 뾰족하게 치석하였다.이와 같이 두 지주는 전체적인 외관은 동일하지만 세부적으로 다른 치석 수법을 보인다.따라서 어느 쪽 지주는 후대에 보강된 것으로도 보인다.당간을 고정하는 간공은 지주 내면 상단부에 긴 타원형으로 마련하여 다른 당간지주에서 볼 수 없는 간공 시공 수법을 보이고 있다.


전체적으로 당간지주는 각 면에 정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어 정교함이 떨어지고 소박한 인상을 주고 있다.그리고 기단부와 지주부도 전형적인 양식이 채용된 것이 아니라 어색하고 형식적인 인상을 주고 있다.특히 간공은 다른 당간지주에서 보기 드문 시공 수법을 보인다.한편 원주를 중심한 이 지역은 고려시대에 접어들면서 남한강을 중심으로 많은 사찰이 창건내지는 중건되면서 정치,경제,문화의 중심 역할을 하였던 곳이다.그래서 흥법사지.법천사지.거돈사지 등을 비롯하여 많은 사찰과 사지(寺址)가 확인되고 있으며 고려시대 원주지역에 건립된 석탑과 석불 등이 현재 원주시립박물관에 옮겨져 있다.이러한 것으로 보아 원주 봉산동 당간지주도 고려시대에 건립된 것으로 보이며 특히 당간지주가 위치한 사찰의 입지 조건으로 보아 소속 사찰은 원주 지역에서 수로(水路)를 통한 교통과 산업의 중심지 역할도 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엄기표 지음 '한국의 당간과 당간지주'중에서*



원주 봉산동당간지주(鳳山洞幢竿支株)


시도유형문화재 제49호(원주시) 
강원 원주시 봉산동 1146-1 


원주시 봉산동 내천 옆에 자리한 이 당간지주는 원래 통일신라시대에 창건된 사찰내에 서 있던 것이라 한다.


기단부(基壇部)가 땅에 묻혀 있어 그 모양을 알 수 없으며, 좌우 두 기둥과 기둥사이의 당간받침돌만이 남아있다. 자연돌로 만든 당간받침돌은 양끝을 기둥밑부분이 들어갈 수 있도록 파낸 후 기둥을 끼웠고, 그 윗면에는 가운데에 동그랗게 테를 돌린 후 깃대를 끼워 세울수 있도록 구멍을 파 놓았다. 양 기둥은 직사각형이나 위로 오를수록 차츰 좁아져 맨끝은 뾰족하게 모아진 형태이다.


각 부분에서 날카로운 부분을 다듬어 부드러운 모습을 나타내고자 노력한 흔적이 엿보인다. 세워진 시기는 대체적으로 정교한 꾸밈이 없었던 고려시대로 여겨진다. 1910년 ‘한일합방’당시 기둥 한쪽이 파손되어 1980년 4월 복원해 놓았다
*문화재청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