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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 장하리삼층석탑(扶餘 長蝦里三層石塔).충남 부여 본문

☆~ 풍경소리/충 남

부여 장하리삼층석탑(扶餘 長蝦里三層石塔).충남 부여

푸른새벽* 2017. 2. 11. 11:15


















































































부여 장하리삼층석탑(扶餘 長蝦里三層石塔)


부여 읍내를 벗어나서 다리를 건너자마자 왼쪽에 있는 주유소를 끼고 가는 길이 장암면 장하리로 가는 길이다.지도로는 부여를 둥글게 감싸안고 휘돌아 가는 백마강과 나란히 달리게 되어 있지만 실제 길은 백마강이 보이지는 않는다.차로 10여 분 길을 따라 장하리에 닿으면 언덕을 뒤로 한 작은 마을 밭 가운데에 소담하게 석탑 한 기가 서 있다.


한눈에도 하늘을 향해 높이 솟은 것이 정림사터 탑과 닮았다는 느낌을 주는데 보물 제184호이다.


가까이 들여다보면 그것이 무엇보다도 훤칠한 몸돌과 얇은 지붕돌 때문임을 알 수 있다.곧 신라 지역의 석탑들이 이중의 안정된 기단 위에 몸돌을 세우고4~5층의 층급받침 위에 원만한 곡선을 이루는 지붕돌을 갖추고 있음에 견주어 이 장하리 석탑은 넓지 않은 지대석과 기단석 위에 모서리 기둥면석과 면석을 각각 따로 갖추었으며,모서리 기둥은 위가 좁아 상승감을 주고 있는데다가,몸돌 위에는 지붕돌과는 떨어진 얇은 판석이 두 층 놓여 지붕돌을 받치고 있다.또 지붕돌 추녀는 수평을 이루어 모퉁이가 살짝 위로 들린 점까지도 정림사터 탑의 모습을 그대로 빼다 박았다.


다만 높이가 4.85m로 정림사터 탑에 비해 훨씬 아담하며 고려 시대 어느 지방 세력가의 발원으로 세워졌을 테니만큼 전체적인 균형미나 세련성이야 정림사터 탑에 미치지 못한다.그러나 충청남도 지방 곳곳에서 만날 수 있는 많은 고려 시대 탑들이 상승감이나 처마의 기울기 등에서 백제탑의 느낌들을 간직하고 있는 것은 그만큼 지역 문화의 특성이 역사를 거치면서도 살아남아 면면히 이어지고 있는 것이라 하겠으며 이 장하리 삼층석탑은 그 좋은 보기라고 할 수 있다.더구나 이 탑은 강만 건너면 정림사터 탑을 볼 수 있는 곳에 건립되었으니 그 어느 탑보다 정림사터 탑의 영향을 많이 받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서천군 비인에 있는 오층석탑과는 비슷한 시기에 세워진데다가 구석구석 모습이 오누이처럼 닮은 데가 많다.


1931년에 1층 몸돌에서 범문 다라니경 조각과 은제 합,상아제 불상등이,해방뒤인 1962년에 해체 수리를 했을 때에는 2층 몸돌 윗부분의 사리공에서 사리 41과가 들어 있는 금동사리병이 발견되었다.이 유물들은 국립부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한국문화유산답사회지음' 답사여행의 길잡이'중에서*



부여장하리삼층석탑(扶餘長蝦里三層石塔)


보물 제184호  
충남 부여군 장암면 장하리 536 


백제의 옛 땅이었던 충청·전라도에는 부여정림사지오층석탑(국보 제9호)의 양식을 모방한 백제계 석탑이 몇 개 전하고 있는데 이 탑 역시 그런 계열에 속하는 탑이다.


땅 위에 자연석에 가까운 바닥돌을 깔고 그 위에 같은 돌로 너비를 좁히면서 3단의 기단(基壇)을 만들었다. 탑신(塔身)은 네 귀퉁이에 위로 오를수록 좁아지는 형태의 기둥 모양을 새겼고, 그 사이에 긴 판돌을 세워 면을 이루게 하였다. 동서남북 사면에 감실모양이 있는데, 우주와 면석의 약화된 모습으로 보는 경우도 있다. 감실은 목탑에 많이 나타나던 것으로 불상을 모시는 방을 의미한다. 석탑에서는 대부분 이를 형상화하는데 그쳐 모양만을 새기는 정도이다.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석탑으로, 전체적으로 탑신의 몸돌이 높고 지붕돌은 지나치게 넓어 안정감이 없어 보인다. 정림사지오층석탑을 모방하였다고는 하지만 조형감각이나 수법에서 훨씬 떨어지는 작품이다.


1931년에 탑신 1층의 몸돌에서 상아불상, 목제탑, 다라니경 조각 등이 발견되었으며, 1962년 해체 수리시에는 2층에서 지름 7㎝, 깊이 12㎝로 사리를 두는 공간이 둥근 형태로 발견되었는데, 그 안에 41개의 사리가 들어있었다. 이 유물들은 모두 국립부여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문화재청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