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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산 천호산 개태사(論山 天護山開泰寺).충남 논산 본문

☆~ 절집.절터/충 남

논산 천호산 개태사(論山 天護山開泰寺).충남 논산

푸른새벽* 2018. 11. 24. 15:38























































































논산 천호산 개태사(論山 天護山開泰寺)

 
충남 논산시 연산면 천호리


고속도로를 향하여 1번 국도로 가다 보면 옆모습이 중후하게 뻗은 산자락을 옆으로 하고 달리게 되는데 그것이 개태사가 진산으로 삼고 있는 천호산이다.길에서 바로 옆으로 개태사로 들어가는 좁은 기로 들어설 수 있으니 개태사는 여느 절과는 달리 비교적 평지에 자리하고 있다.


바로 백제의 장군 계백의 결사대가 신라군을 맞아 대적했던 곳이며 신라 하대까지 황산벌이었으나 지금은 논산시 연산면 천호리인 이곳에 자리잡은 개태사는 그 창건에 남다른 배경이 있다.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의 신검을 쫓아 황산 숯고개를 넘어 마성에 진을 치고 신검의 항복을 받아 낸 것은 마침내 후삼국을 통일한 역사적인 일이었으니 이를 기념하여 바로 그해인 936년에 지은 절이기 때문이다.그리하여 삼국통일은 하늘이 도와주심이라하여 황산의 이름조차 천호산이라고 고쳤다.


『고려사절요』에는 "개태사를 지을 때 사치스러운 것이 극도에 이르고...12월에 개태사가 완성되니 낙성법회를 베풀고 왕이 친히 소를 지었다" 고 되어 있어 고려의 호국대찰로서의 면모가 유감없이 드러나 있다.『동국여지승람』에 실려 있는 "생민들이 백가지 근심을 만나니,많은 고통을 이겨 낼 수 없었습니다" 로 시작하는 발원문에서 왕건은 "하늘에 고하여 맹세하기를 '큰 간악한 무리를 섬멸 평정하여 생민을 도탄에서 건져 농사와 길쌈을 제 고장에서 임으로 할 수 있게 하겠나이다' 하였더니...병신년 가을9월에 숭선성 가에서(후)백제의 군사와 대진하여,한번 부르짖으니 흉광의 무리가 와해되었고 두번째 북을 울리니 역당이 얼음 녹듯 소멸되어 개선의 노래가 하늘에 떠 있고 환호의 소리는 땅을 뒤흔들었습니다...부처님의 붙들어 주심에 보답하고 산신령님의 도와주심을 갚으려고,특별히 관사에 명하여 불당을 창건하고는,이에 산의 이름을 천호(天護)라 하고 절의 이름을 개태(開泰)라고 하였나이다"라고 하였다.


이 절에는 왕건의 영정이 설치되어 기일마다 제사를 지내며 그의 옷 한 벌과 옥대를 보관하였다고 한다.그렇게 번창하던 절이 고려 말에 이르러서는 세 차례에 걸친 왜적의 침입으로 무너졌고 조선 시대에도 불교 진흥책을 썼던 세조 때까지는 그런대로 면모를 유지한 것으로 보이나 그 뒤 완전히 폐허가 되었다.그리하여 석불은 도랑에 묻히고,가마솥은 홍수에 떠내려가 절의 자취도 없어져 500년 동안 면목없이 되었다가 1930년에 들어서야 한 여승의 힘으로 다시 절의 모습을 되찾게 되었다.


옛 영화는 자취가 없고 천호산 아랫자락을 베개삼아 기대 있는 이 절에는 개태사 창건 때의 것으로는 대웅전에 모셔진 석조삼존불 입상과 함께 큰 무쇠솥이 있으며 다른 당우나 요사채는 모두 그 뒤의 것들이다. 대웅전 앞의 오층석탑은 고려 때의 것으로 충청남도 문화재 자료 제274호이다. 원래 절터는 지금 절집이 있는 곳에서 동북쪽에 있는데 그곳 건물자리에 주춧돌,석불대좌와 함께 석조가 있으며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275호로 지정되었다.


마당에서 정면으로 축대 하나 위쪽에 있는 단군전이나 그 옆의 팔각당은 민간신앙과 어느정도 습합한 면모를 보여주는 듯도 하다.특히 팔각당 안에는 층층이 방석을 쌓고 동자부처를 모셔 앉힌 모습이  매우 넉넉하여 절로 웃음짓게 한다.
*한국문화유산답사회 지음 '답사여행의 길잡이'중에서*